211화. 비무의 승자
“허허.”
청진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 검이 보잘것없는 재주시라니, 겸양이라기엔 꽤나 자존심 상하는 말이로군요. 게다가 무수한 문파들 위에 올라서신 지금이 아닙니까?”
당설련의 붉은 입술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청진의 진심 어린 말은 그녀의 마음을 사뭇 흡족하게 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당문은 오직 검술만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두 차례의 본선 비무를 마치고, 단 여덟 문파밖에 남지 않은 이 자리에 말이다.
그러니 ‘무수한 문파들 위에 올라섰다’는 청진의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칭찬을 해 주시니 저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군요.”
우우웅.
당설련의 연검이 나지막이 울기 시작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그 음색에 청진의 안색도 굳었다.
당설련은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가문의 절기를 흉내내 봤어요. 이 검식의 이름은 만천설화(滿天雪花)라고 한답니다.”
“만천설화!”
만천설화라 함은 하늘에 눈꽃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그녀의 말처럼 당문의 유명한 절기, 만천화우를 모방한 것이다.
탓.
당설련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녀의 유려한 몸이 부드럽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아름다운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청진은 결코 경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당설련의 연검이 청진의 목을 노리고 짓쳐들어왔다.
‘살수!’
청진은 그 검에 담긴 살기를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웅.
내력을 실은 청진의 검이 즉시 연검에 맞섰다.
콰앙.
아니나 다를까?
내력을 담은 두 검의 충돌은 엄청난 충격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 충격의 여파로 청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당설련은 허공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몸을 틀었다.
파라라락.
우아한 분홍빛 의복이 바람을 일으키며 당설련의 향기를 사방에 퍼트렸다.
젊은 청년인 청진으로선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지금은 비무 중이다.
청진은 당설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사락.
그리고 청진의 시야에 당설련의 눈동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콰과곽.
무수한 검영이 청진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헉!’
그것은 당설련이 펼쳐 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연격이었다.
말 그대로 차가운 눈꽃이 하늘에 가득 흩날리고 있었다.
단 한 번만 스쳐도 목숨을 앗아 갈 치명적인 눈꽃이.
청진은 즉시 자신의 검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즉시 모든 내력을 끌어 올렸다.
후우욱.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팔 하나쯤은 각오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진의 단련된 마음은 후회와 두려움을 몰아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검에 내력이 집중되고 대지가 그의 발을 받쳤다.
하늘의 양기와 땅의 음기, 그 두 기운 가운데 선 청진은 전력을 다해 검을 떨쳐 내었다.
“하아아!”
쿵.
묵직한 진동이 비무대를 울렸다.
그 충격은 한순간에 모든 사람들을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컸다.
그리고 충돌의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파락.
당설련의 유려한 몸이 꽃잎처럼 비무대에 내려섰다.
“하아, 과연.”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당설련은 말했다.
“그것이 무당의 태극검법이군요.”
당설련의 오른쪽 옷 소매는 길게 갈라져 있었다.
그 사이로 새하얀 그녀의 팔이 언뜻 보였다.
“후우우.”
청진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자세를 잡으며 청진은 당설련을 향해 섰다.
“부족할 따름입니다.”
청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무사하지는 않았다.
길게 갈라진 그의 오른쪽 옷소매는 당설련의 연검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스륵.
검을 들어 당설련을 향하며 청진이 말했다.
“이번 비무는 조금 길어지겠군요.”
청진의 눈동자는 호승심으로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상대방이 아리따운 여성이라는 건 이제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당설련은 고개를 저었다.
“네?”
청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러나 당설련은 대답 대신 그녀의 연검을 거둬들였다.
치링.
당설련이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연검이 그녀의 가녀린 허리로 모습을 감췄다.
“그게 무슨…….”
“제 절기로도 승부를 보지 못했으니 더 이상의 비무는 무의미해요. 그리고 도사님의 태극검법을 본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만족한답니다.”
당설련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졌어요.”
그녀의 난데없는 말에 청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침묵에 빠졌다.
당설련은 비무를 주관하는 소림의 대표자, 진허에게 말했다.
“승패를 선언하지 않으실 건가요?”
“아, 무, 무당의 승리외다!”
진허는 그제야 크게 소리쳤다.
“와아아아!”
사람들의 탄성과 환호가 그제야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청진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문은 이후의 비무자를 내지 않을 거예요. 즉, 제가 마지막이라는 뜻이지요.”
전혀 패자 같지 않은 모습으로 당설련은 말했다.
“무당의 승리를 축하드려요. 이제 무당은 명실공히 천하사대문파에 이름을 올리게 되겠군요.”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청진의 귓가에 울렸다.
사람들은 어느새 천하사대문파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과연 어느 문파가 천하사대문파가 될지가 모든 사람의 관심이었다.
그 첫번째 자리를 영광스럽게도 무당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후후.”
청진이 무언가 말하려는 데 당설련이 끊었다.
“여자가 만족했다고 하면 남자는 물러나야 한답니다. 질척거리는 남자는 미움받아요.”
청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 그리고.”
발길을 돌리려던 당설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가능한 빨리 의국(醫局)에 들러보시는 편이 나을 거예요.”
‘의국?’
청진이 의아해했지만 당설련은 그대로 몸을 돌려 비무대를 내려갔다.
혹시나 싶어 청진은 내력을 운용해 보았다.
그리고 단전 부근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깨달았다.
‘설마!’
청진은 깜짝 놀라 당설련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당설련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청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틈에…….’
당설련이 어째서 갑자기 패배를 선언했는지 청진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비무는 분명 청진의 승리다.
당설련은 사용이 금지된 독을 썼고, 청진을 향해 살수까지 펼쳤기 때문이다.
소림의 진허나 청진 자신을 끝까지 속일 수 없으니 결국은 발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미리 패배를 선언한 것이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 물러난다는 것처럼 말이다.
“으음.”
청진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비록 자신이 독에 대해 전혀 무방비한 상태였다고 해도 청진과 같은 고수를 중독시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생사를 건 싸움이었다면 어땠을까?
목숨을 잃은 사람은 오히려 청진 자신이었을 것이다.
“와아!”
“무당! 무당!”
사람들은 청진의, 그리고 무당의 승리에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청진은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비무대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걸어가던 당설련은 앞에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는 그는 바로 화산의 매화검, 영호준이었다.
“여어, 축하하오.”
“무얼 축하한다는 거죠?”
당설련은 가볍게 머리카락을 넘기며 대답했다.
“당연히 당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 아니겠소?”
“눈이 좋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나는 졌어요.”
“뭐, 사람의 관점이란 다 다른 법이니까.”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스스로 비무대를 내려온 건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참관석의 노련한 원로들이 살수니, 독이니 해서 성질 부리면 제법 귀찮거든.”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하지만 당설련의 표정은 여전히 냉담했다.
“제 길을 막아선 이유가 겨우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영호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이라면 신흥오대세가가 가져올 무림맹의 변화에 관해 신선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흥, 신흥오대세가.”
노골적으로 조소를 흘린 당설련이 물었다.
“그래서, 신선한 견해란 어떤 걸 말하는 거죠?”
“예컨대.”
영호준은 당설련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신흥오대세가는 기존 무림맹 십팔대문파와는 달리 삼십 년 전의 정사대전에서 비교적 자유롭소. 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래서요?”
“그러니까.”
영호준은 등을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당설련에게 다가왔다.
“앞으로 무림맹은 과거의 정사 구분에서 벗어나 다른 식의 연대를 취할 수도 있다는 거요. 이를테면 소림이나 무당, 화산같이 본질적으로 수도(修道)를 목적으로 하는 문파와,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이익 활동을 펼쳐가는 세가들로 말이오. 그렇게 되면…….”
당설련을 스쳐 지나갈 듯,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영호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문은 그런 세가 연합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지 않겠소? 자연히 정사대전의 상징적인 종결자로서 군림하고 있는 신승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날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되면 당문은 사실상의 천하제일문이 되겠지. 천하사대문파라는 허명 따위는 산속에서 도나 닦는 문파들에게나 줘 버리고 말이오.”
영호준은 조금 전 당문이 무당에게 승리를 양보한 이유를 정확히 추론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설련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제법 독창적인 생각이군요.”
“부정하지 않는 거요?”
영호준이 당설련을 돌아보았지만 당설련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글쎄요? 말씀하셨듯이 관점이란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요.”
사박.
당설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영호준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호준은 슬쩍 뒷머리를 긁었다.
“음, 이상한데?”
영호준의 지적은 옳았다.
앞으로 무림맹은 정확히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것은 영호준이 당설련의 마음을 아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지나치게 차갑다.
“대체 뭘 또 숨기고 있는 거요?”
영호준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미 떠나간 당설련의 대답은 없었다.
***
“이, 이게 바로 소문의 그것이오?”
흑산채의 채주 장호달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앞에 놓여 있는 검은색의 환약이었다.
한 손에 쥘 정도로 커다란 것이 조금 다를 뿐, 흔들리는 불빛 아래 보이는 그것은 언뜻 보면 엉터리 약사들이 만들어 판다는 만병통치약과 비슷했다.
“그렇소. 이것이 바로 대력천신기혼단이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자신을 신녹림의 순찰사라고 밝힌 사내는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것이면 장 채주의 내공도 강호의 내로라하는 고수에게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가 될 것이오. 그야말로 창해상전이요, 환골탈태라 할 수 있겠지.”
창해상전은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었다는 뜻이고 환골탈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의미다.
“화, 환골탈퇴까지 할 수 있단 말이오?”
장호달의 말에 순찰사의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탈퇴가 아니라 탈태요. 그리고 누가 환골탈태를 한다고 했소? 환골탈태와 같다는 뜻이지.”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장 채주는 이제 단순한 채주가 아니오. 앞으로 신(新)녹림의 이름이 천하를 울릴 터인즉, 그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길 바라오.”
사뭇 훈계하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장호달은 눈앞에 있는 환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 무슨 부작용 같은 건 없소?”
순찰사의 입술에 비웃음이 걸렸다.
“장강에서 암천무제가 남궁세가의 가주 뇌검 남궁진천을 일검에 베어 버린 것을 벌써 잊었소? 뭐, 굳이 장 채주가 믿지 못하겠다면…….”
순찰사는 탁자 위에 놓인 환단에 손을 뻗었다.
“자, 잠깐!”
장호달은 급히 환단을 집어 들었다.
“누가 믿지 못한다고 했소? 그저 혹시 몰라서 묻는 것이지…….”
침을 꿀꺽 삼킨 장호달은 손안에 쥔 환단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헌데 이런 귀한 것에 어찌 보답을 해야 할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혹시 산채를 넘기라고 하는 건 아닐까 염려하며 장호달은 순찰사의 눈치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