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210화 (210/530)

210화. 신흥오대세가

운현은 지객당에서 막바지 서류 작업을 돕고 있었다.

변기량이 말렸고 관지부가 불편해했지만, 쌓인 서류를 보니 도저히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운현은 팔을 걷고 서류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관지부와 변기량이 운현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잠시였다.

쌓인 서류들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운 서기님, 이쪽 처리 부탁합니다.”

“아, 그건 제가 할게요.”

“저도 막 끝났으니 나누지요.”

무지막지한 업무량은 세 사람을 철저히 효율적이 되게 했다.

덕분에 눈치 보기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세 사람은 업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바스락.

‘음, 지금쯤 본선이 시작됐을 텐데.’

서류를 넘기던 운현이 문득 생각했다.

‘뭐, 나중에 보면 되겠지.’

어차피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는 데다가 진짜 고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깨달은 후다.

나중에, 예컨대 본선의 마지막 쪽 비무들만 봐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빨리 서류 작업들을 끝내야 해야 했다.

다행히 예선이 끝났기에 남은 서류들을 마무리만 하면 끝이다.

운현은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휘리릭.

능숙한 붓이 일필휘지로 서류를 작성해 나갔다.

덕분에 운현은 모용미가 자신을 찾는다는 것도, 그리고 독고랑이 장외 비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

천하무림대회는 날이 갈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각 문파에서 뽑힌 열 명의 제자들이 펼치는 본선은 매 비무마다 손에 땀을 쥐게했다.

무엇보다 현재 각 세가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나온 터라, 무림맹 비무대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슥.

무복을 입은 준수한 청년이 검을 들었다.

“단목세가의 단목기요.”

단목세가의 마지막 비무자, 단목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주시하며 예를 표했다.

직전의 비무에서 이미 두 번이나 승리를 거둔 그였지만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감히 경시하지는 못했다.

상대는 바로 매화검 영호준이었기 때문이다.

“화산의 영호준이오. 연이은 비무에 피곤하실 듯하니 가능한 빨리 끝냅시다.”

미소를 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단목기의 눈매가 움찔했다.

“친절하시군. 그러나 그리 쉽게 끝나진 않을 것이오.”

스릉.

매화검 영호준의 검이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단목기는 신중한 자세로 천천히 움직였다.

스윽.

상대는 매화검 영호준이다.

비록 소문으로는 풍류나 즐기는 한량으로 들리지만 매화검의 칭호는 결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단목기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쉭.

상대를 탐색하기 위해 단목기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빠르고 날카롭지만 내력이 크게 실리지 않은 검이었다.

아래를 향하고 있던 영호준의 검도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단목기의 검을 막았다.

캉.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맞닿던 바로 그때였다.

훅.

‘윽.’

단목기는 단번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검이 영호준의 검에 붙어 버린 것처럼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다.

휘릭.

영호준의 검이 원을 그렸다.

그와 함께 단목기의 검 역시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영호준의 검과 함께 움직였다.

마치 처음부터 두 자루의 검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처럼.

‘이익!’

단목기는 급히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웅. 카앙.

자신의 검이 나지막이 울음을 흘리며 드디어 영호준의 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휘리릭.

분리된 영호준의 검이 현란하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단목기는 자신의 눈앞에 선명하게 피어오르는 한 송이의 매화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퍼엉.

“큭.”

본능적으로 막은 검 덕분에 단목기는 치명상을 피했다.

그러나 대신 영호준의 검격에 실린 내력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단목기는 낙엽처럼 뒤로 날아갔고, 그대로 승패가 결정되어 버리고 말았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단목기가 쓰러졌다.

휘릭.

검을 거두며 영호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빨리 끝났잖나. 그렇지?”

지켜보던 여인들의 입에서 탄식같은 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소림의 진허가 즉시 판정을 내렸다.

“화산의 승리요!”

“와아아아.”

사람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매화검 영호준은 검을 거두고 군중들을 향해 한 손을 들었다가 내리며 과장되이 감사를 표했다.

언뜻 가벼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행동이기도 했다.

“매화검!”

“영호준 대협!”

사람들이 매화검 영호준의 명호를 연호했다.

젊은 아가씨들은 색색의 손수건을 흔들며 영호준의 주위를 끌어보 려고 하기도 했다.

“과연.”

귀빈석에 앉아 있던 무당파 장문인이 감탄하며 말했다.

“화산의 매화검이로군요.”

화산의 장문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허나 우리 화산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임은 분명하지요. 허허허.”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화산의 장문인이 말했다.

“허나 상대도 제법 괜찮았습니다. 분명 단목세가였지요?”

두 장문인은 사뭇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소위 거대 세가나 문파의 수장들은 비무에 나서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기건 지건, 얻을 것은 없는데 위험부담은 엄청나기 때문이다.

“비록 패배했다고 하지만 단목세가는 이번 무림대회를 통해 커다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무당의 장문인이 단목세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쓰러져 있던 단목기는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비무대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패배도 그리 씁쓸하지만은 않을 테지요.”

단목세가는 본선 첫번째 비무에서 기존 십팔대문파 중 하나인 점창파를 꺾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었다.

지금 비무대를 내려가는 패배한 단목기의 표정도 제법 밝았다.

“그렇습니다. 혹자는 신흥오대세가라 한다지요?”

신흥오대세가는 이번 무림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다섯 문파였다.

사람마다 다르게 꼽기는 했지만 단목세가나 모용세가, 남해검문은 언제나 빠지지 않았다.

물론 모두가 세가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문파들이 아니었기에 일반적으로 신흥오대세가라 부르고 있었다.

“저들이 무림맹에 새로운 활력이 되어 준다면야 우리로선 기꺼운 일이지요. 허허.”

단목세가를 바라보는 무당과 화산 장문인들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저들이 무림맹에 들어와서 다른 세가들과 경쟁을 벌여 준다면 그리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흥.’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당문의 눈꽃, 당설련은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과연 그럴까?’

무당이나 화산 같은 거대 정파들의 속셈은 뻔했다.

어차피 몇몇 문파들이 무림맹에 들어온다 해도 기득권을 쥔 쪽은 자신들이다.

오히려 새로운 문파들과 기존 무림맹 문파들 사이를 적절히 이용하면 자신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거대 정파들의 셈법이었다.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걸?’

속으로 중얼거린 당설련은 단목기를 흘깃 쳐다보았다.

‘패배한 주제에 자랑스러운 표정이라니, 애초에 영호준을 상대로 탐색이 말이나 돼?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어야지.’

그랬다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감히 매화검 영호준에게 탐색 따위를 시도한 것 자체가 패인이다.

경멸의 눈빛으로 단목기를 쳐다보던 당설련은 고개를 들었다.

“와아아아!”

“매화검! 매화검 영호준!”

영호준은 아직도 비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들을 향해서는 한쪽 눈까지 찡긋하며 손을 흔든다.

“흥!”

당설련의 속마음은 결국 날카로운 조소가 되어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환호는 한동안 끊이지 않았고, 당설련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지고 있었다.

사락.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 있기에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

“무당의 청진이외다.”

“어머나, 고지식도 하셔라.”

당문설화 당설련은 가볍게 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늘 보는 처지에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까지 있나요?”

무당의 도사이자 대표자인 청진은 씁쓰레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래도 이곳은 비무대 위라서 말입니다.”

무당의 아홉 번째 비무자로 나선 청진은, 역시 당문의 아홉번째 비무자인 당설련에게 말했다.

“하아, 그런 매정한 말씀을 하시면 여자들은 마음이 상한답니다.”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는 듯, 당설련은 한 손을 봉긋한 가슴에 살포시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청진은 쓴웃음을 흘렸다.

평소 대의사청에서 그녀의 모습이 어떤지 뻔히 아는데도 저런 표정이라니, 정말이지 여인들은 알 수가 없다고 청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저런 뻔한 연기에 가슴이 덜컹한 자기 자신도 말이다.

스릉.

청진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두 손을 검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

“당문의 눈꽃을 맞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당설련은 미소를 지었다.

“무당의 도사님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시군요. 좋아요.”

칭.

그녀의 손이 허리를 스치는가 싶더니 얇은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검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휘청이고 있었다.

“연검이다!”

“오, 드디어 나왔군!”

그녀의 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비무대 주위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검 자체도 보기 드물지만, 당문의 눈꽃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당설련의 미모는 사람들이 열광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녀는 연검으로 이미 많은 상대를 무릎 꿇려 왔다.

휘리릭.

그녀의 연검이 햇빛 아래 찬란한 빛을 뿌렸다.

“아름다운 검이지요?”

당설련이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조심하세요.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치명적이기 마련이니까요.”

지잉.

유연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연검이 움직임을 멈추고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당설련이 검에 내기를 실은 것이다.

“도사께서는 군자시니 선공을 양보하실 거라 믿겠어요. 그럼!”

탓.

그녀의 발이 가볍게 땅을 박차고, 당설련의 몸은 마치 바람에 실린 부드러운 깃털처럼 청진을 향해 날아갔다.

청진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내력을 담은 청진의 검이 바람을 가르고, 곧이어 두 자루의 검이 치열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챙, 채채챙.

가벼운 타격음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두 자루의 검에 실린 내력까지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피피픽.

당설련의 연검은 때로 곧게, 때로는 유연하게 끊임없이 청진의 빈틈을 노렸다.

마치 독니를 세운 독사 같은 그녀의 날카로운 연격을, 청진은 묵직한 내력을 담은 검으로 차분히 막아 가고 있었다.

실제로 청진은 자신의 본래 자리에서 반보 이상을 움직이지 않았다.

치치치치칭.

더더욱 빨라지고 있는 두 사람의 공방은, 보통 사람들은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칭, 탓.

당설련이 부드럽게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유연하게 흔들리는 연검을 여전히 청진에게 향한 채, 당설련은 미소를 떠올렸다.

“과연 무당의 검은 명불허전이군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휘릭.

검을 아래로 내리며 청진이 말했다.

“저야말로 어째서 당문의 검이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하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군요.”

청진의 말은 진심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현란하게 쏟아지는 당설련의 쉴 새 없는 연격은 청진에게 단 한 순간의 반격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나, 도사께선 여인을 칭찬하는 방법을 아시는군요.”

당설련은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재주일 뿐이랍니다. 당문의 진정한 힘은 다른 곳에 있으니까요.”

당문은 암기와 용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당문의 진정한 힘은 바로 그 독심(毒心)에 있다.

그러니 이런 비무 따위, 특히 예와 법을 지키라 누누히 강조하는 비무에서 당문의 진정한 강함이 드러날 리가 없는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