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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09화 (209/530)
  • 209화. 검기도 내력도 사용하지 않겠다

    중년 사내가 넌지시 권했지만 독고랑은 대꾸조차 없었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옆에 있는 의자를 잡아당겨 털썩 앉았다.

    독고랑이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다림만큼의 보람이 있을 것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돈 거는 사람이 어디 있더라?”

    중년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기다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벅.

    한 사람이 비무대로 올라섰다.

    커다란 도와 그만큼이나 큰 체격을 가진 그 무인은 강렬한 눈빛과 무수한 흉터를 가지고 있었다.

    턱.

    비무대 중앙에 멈춰 선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산동에서 온 정발산이다.”

    그가 말하자 웅성거림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정발산이라고? 산동의?”

    “산동 흑호 정발산!”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인물인 듯 가벼운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 반응에 만족한 듯 정발산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손을 등 뒤로 돌려 커다란 도를 풀었다.

    쿵.

    칼집 끝이 비무대를 찍었다.

    정발산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가 내게 가르침을 주겠는가?”

    별로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내력이 실린 그 말은 비무대 주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은 침묵 속에 도전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정발산이 조소를 떠올릴 때였다.

    저벅.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 향했다.

    비무대로 오르고 있는 그는 바로 독고랑이었다.

    “누구지?”

    “글쎄? 모르는 사람인데?”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독고랑은 천천히 걸어 정발산을 마주하고 섰다.

    정발산이 피식 웃었다.

    “너는 누구냐?”

    독고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독고랑이다.”

    “독고랑?”

    정발산이 인상을 썼다. 그러나 곧 경악이 그의 얼굴에 번져갔다.

    “고독객 독고랑!”

    다른 이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독객이라고?”

    “검기발현의, 그 고독객?”

    사람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태허문주를 일검에 쓰러뜨렸다며?”

    “철정산에서 떼몰살을 시켰다던데?”

    그리고 그 웅성거림은 곧 하나로 귀결되었다.

    “아니, 검기발현의 고수가 여기 왜 나와?”

    정발산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여긴 당신 같은 고수가 나올 곳이 아닌 듯하오만.”

    정중한 어조였지만 그의 눈에는 불쾌감이 역력했다.

    그러나 독고랑은 담담히 말했다.

    “검기는 쓰지 않겠다.”

    정발산의 눈이 빛났다.

    “내력도 사용하지 않겠다. 그저 본신의 힘과 이 검 한 자루만으로.”

    슥.

    자신의 검을 들어보이며 독고랑이 말을 이었다.

    “나는 비무에 임하겠다.”

    말하는 독고랑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두려운가?”

    “흐으으.”

    신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정발산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솔직히 매우 솔깃한 제안이오만.”

    검기발현의 절정고수를 이긴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비록 내력과 검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제약이 붙었지만 그래도 승부는 승부다.

    만의 하나라도 정발산이 이긴다면 단번에 강호 무림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자신도 모르게 검기를 사용할 경우도 있지 않겠소?”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독고랑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패배를 인정하지.”

    정발산의 눈이 빛났다.

    ‘이건 기회다.’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고독객 독고랑을 꺾었다는 명성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닌 데다가, 자신이 이길 가능성은 결코 작지 않았다.

    아니, 지금 정발산은 자신이 이길 것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다.

    피 튀는 실전이라면 자신도 겪을 만큼 겪은 데다가, 무엇보다 자신은 내력을 써도 되지 않는가?

    “좋소.”

    스르릉.

    정발산이 자신의 도를 꺼냈다.

    그리고 칼집을 비무대 밖으로 던졌다.

    텅.

    칼집을 버리는 것은 이 비무에 목숨을 걸겠다는 의미다.

    정발산은 자신의 큰 도를 두 손으로 맞잡고 독고랑에게 예를 표했다.

    “산동 흑호 정발산, 오늘 한 수 배우겠소.”

    독고랑을 바라보는 정발산의 눈은 불타오르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독고랑 역시 자신의 검을 뽑았다.

    스릉.

    칼집을 버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칼을 세우고 나지막이 말했다.

    “독고랑이다.”

    독고랑의 눈이 빛났다.

    “와라.”

    그것은 도발이었다.

    정발산은 이를 갈았다.

    으득.

    그러나 상대는 충분히 거만할 자격이 있는 자다.

    그만큼 전력을 다해 쓰러뜨릴 가치가 충분하고도 넘치는 상대이기도 했다.

    웅.

    내력을 실은 정발산의 대도가 나지막이 울음을 흘렸다.

    그리고 정발산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검기발현의 고수에게 상대가 안 되듯이, 내력을 쓰지 않는 독고랑은 자신의 상대가 못 된다.

    정발산의 강인한 발이 자신만만하게 비무대를 박찼다.

    “타하아!”

    후우우욱.

    내력을 실은 정발산의 대도가 폭풍처럼 독고랑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그러나 독고랑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

    무림맹 천하무림대회에 몰려든 문파와 개인의 수는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중소 문파와 신흥 무관들이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예선을 벌이는 반면, 거대 문파와 세가 들은 느긋하게 본선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예선을 통과한 열 네 문파가 정해지자 무림맹은 천하무림대회의 정식 개회를 선언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을 환영하오.”

    소림의 대표자이자 천하무림대회의 총괄을 맡은 진허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듯 강호 무림의 동도 여러분을 보니 이 진허, 감개가 무량하기 그지없소이다.”

    진허는 말을 이으며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가 서 있는 비무대 주위는 무인들로 가득했다.

    무림맹 십팔대문파라 하는 거대 문파와 세가 들은 물론이고, 예선을 통과한 열네 문파들 외에도 온갖 문파들과 무인들이 이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당당히 예선을 통과한 모용세가도 있었다.

    “진허 대사가 무림대회를 총괄하는군요?”

    모용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선부터 모든 비무를 직접 챙기더구나. 소림의 승려답게 매우 고지식한 사람이야. 저분만 보면 무인들도 피한다니까? 하하.”

    소림의 진허는 대단히 깐깐했고 규정에 엄격했다.

    예선을 치르는 동안 그의 악명 아닌 악명이 파다해질 정도였다.

    “고생하셨네요.”

    모용미가 말했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오라버니.”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세가의 일이 바쁜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

    모용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차피 본선은 이제부터가 아니냐?”

    말하는 모용진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이제부터다.

    모용세가의 이름이 무림맹에, 그리고 천하에 알려지는 것은 말이다.

    “진 오빠! 힘내!”

    옆에 앉은 모용상아가 작은 손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모용진은 빙긋 웃었다.

    “그래, 고마워. 상아가 응원해 주니 힘이 막 나는걸?”

    “헤헤헤.”

    모용상아가 웃었다.

    모용미는 귀여운 동생의 모습에 미소를 머금었다.

    뒤늦게 합류한 사람은 모용미만이 아니었다.

    여동생 모용상아는 물론,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도 있었다.

    무림맹 십팔대문파들도 대부분 장문인이나 가주들이 참석했다.

    물론 그들이 직접 비무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각 문파와 세가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전부 비무대회에 이름을 올렸다.

    그만큼 이번 비무대회가 가지는 의미는 컸다.

    무림맹이 설립된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각 문파의 역량을 재어 볼 수 있는 공식적인 비무대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 정말 많다. 다 본선에 올라온 문파들이야?”

    모용상아가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탈락한 사람도 많고, 심지어 무림과 관계 없는 사람들도 많아.”

    “탈락한 사람들이 왜? 집에 안 가?”

    어린아이다운 직설적인 말에 모용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대회의 결과를 끝까지 보기 위해서야. 이 대회의 결과에 따라 아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거든. 그리고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각 문파들의 실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기도 하고.”

    “아, 그렇구나.”

    모용상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운 오빠는?”

    모용미와 모용상아의 눈이 동시에 모용진을 향했다.

    “아. 운 대인께서는 안 계시더구나.”

    “안 계시다고요?”

    “없어?”

    두 여동생이 동시에 묻고 모용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무림맹에 오자마자 알아봤는데, 북해에 가셔서 아직 안 오셨다고 하더구나.”

    운현은 이미 돌아와 있었지만 모용진은 알지 못했다.

    그가 알아본 때는 운현이 돌아오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용진은 운현이 무림맹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해요?”

    “북해가 어디야?”

    또 동시에 나온 물음에 모용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 곳이야. 어째서 가셨는지는 알려 주지 않더구나.”

    모용미가 의아한 눈빛으로 말했다.

    “맹에서 천하무림대회를 여는데 북해라니, 이상하네요.”

    “그럼 지금 운 오빠 없어?”

    모용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어쩌면 오셨을지도 모르니 한번 더 알아보마. 그동안은 예선을 치르느라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거든.”

    “그럼 제가 알아볼게요.”

    모용미가 말했다.

    “그래. 우선 서기부로 찾아가 보려무나.”

    모용진의 말을 들으며 모용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북해라,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사이, 단상에 선 소림사의 대표자 진허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상대를 해할 수 있는 살수는 어떠한 경우라도 엄히 금지하며, 이를 어길 경우 승패에 상관없이 그 자격을 박탈하고 소속 문파에 관리 책임을 물을 것이오.”

    진허의 말은 사뭇 엄중했다.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럴 만도 했다.

    진검 비무에서 아슬아슬한 순간은 말 그대로 무수하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살수라고 판단할 것인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판정 기준에 자격 박탈과 문파 문책이라는 엄한 징계까지 튀어나오니 불만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때였다.

    “무림맹의 여러 영웅들이여!”

    제갈세가의 대표자 제갈연이 멋들어진 수염을 휘날리며 앞으로 나섰다.

    제갈연은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천하무림대회는 바로 여러분을 위한 자리요!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이곳 무림맹에서 마음껏 펼쳐 내시오. 이기는 자에게는 명예와 부가, 승리한 문파에게는 고귀한 자리가 보장될 것이오!”

    분위기는 단번에 고조되기 시작했다.

    한 자루의 칼로 무와 명예, 그리고 명성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

    천하무림대회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제갈연이 ‘승리한 문파’를 따로 언급한 것은 그 의미가 더욱 컸다.

    남궁세가가 사실상 봉문을 한 이상 그 자리를 메울 새로운 문파가 바로 이번 무림대회를 통해 결정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고조된 시선을 마주하며 제갈연은 격앙된 목소리로 한껏 외쳤다.

    “나 제갈연, 무림맹 십팔대문파를 대신하여 지금 천하무림대회의 개막을 선언하오.”

    와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사방을 뒤덮었다.

    그야말로 무림맹이 들썩일 것 같은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던 무림맹 십팔대문파의 대표자들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매화검 영호준의 안색만은 그리 밝지 않았다.

    “뭐가 불만이시지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당설련이 물었다.

    그녀의 얼굴 역시 가벼운 흥분과 기쁨으로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으음, 뭐랄까. 꼭 십팔대문파의 이름으로 개회 선언을 해야 했나 싶어서 말이오.”

    “그럼 누구 이름으로 하지요? 신승이요?”

    빙긋 웃으며 당설련이 말했다.

    “저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신승의 이름에 눌려 사는 건 말예요.”

    이번 천하무림대회에는 말 그대로 천하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신승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의 이름조차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갈연의 개회 선언은, 신승 대신 십팔대문파를 주축으로 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선언이기도 했다.

    비록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도 말이다.

    “그래요. 충분해요. 이제는 벗어나야 할 때죠. 드디어 무림맹의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는 거예요.”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당설련은 속삭이듯 말했다.

    와아아아.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무림맹을 연호하며 달아오른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천지가 떠나갈 듯 울리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라.”

    영호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새로운 세대가 또 다른 혼란의 시작이라도 말이오?”

    그 목소리는 사람들의 환호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당설련 역시 그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천하무림대회의 본선은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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