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장외 비무
“안 마실 거냐?”
운현이 주저하고 있자 신승의 눈꼬리가 대번에 올라갔다.
이러다 정말 심기를 거스르겠다 싶은 운현은 얼른 대답했다.
“마시겠습니다.”
운현은 독고랑에게 눈짓을 했다.
같이 가자는 뜻이었다.
저벅, 저벅.
운현은 신승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독고랑은 운현 옆을 지키듯 선 채였다.
그사이, 신승은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채웠다.
후룩.
소리를 내며 마시는 신승의 모습은 소림의 와불 선사를 연상케 했다.
운현은 조심스레 잔에 손을 뻗었다.
독고랑 역시 찻잔을 손에 들었다.
“……추운 데서 고생했다.”
문득 신승이 말했다.
그 단순한 말에 운현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감사합니다.”
예를 표한 후 운현은 천천히 차를 마셨다.
“흘흘. 어떠냐? 좀 따뜻해졌냐?”
“네.”
운현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그래, 북해는 어떻더냐?”
신승이 나지막이 물었다.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북해는…….”
아니, 답하려 했다.
“아가씨들은 예쁘더냐? 영약 같은 건 안 받았어? 북해는 물개 거시기가 진짜 유명한데.”
“네?”
운현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비슷한 걸 받긴 했지만 운현의 것은 아니다.
그건 전부 무림맹에 고스란히 반납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말할 때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신승은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아이는? 간 김에 아예 도장도 찍고 부모님 허락도 받지 그랬냐? 북해까지 갔는데 그 정도는 하고 와야지. 혹시 예쁘장한 시녀가 있으면 나한테도…….”
“대, 대사님!”
운현은 하마터면 손에 든 찻잔을 엎을 뻔했다.
신승은 와락 인상을 썼다.
“왜 갑자기 소리를 치고 그래? 이 늙은이 귀 아직 안 멀었어.”
귀까지 후비적거리며 신승은 투덜거렸다.
갑자기 무례를 범해 버린 운현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에이, 꼴을 보아하니 아무것도 안 가져온 모양이구만. 요즘 젊은 것들은 당최 어른 공경할 줄을 몰라요. 이것저것 챙겨 줘 봤자 다 헛거라니까?”
“아니, 그게…….”
당황하던 운현은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대사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운현은 심각했다.
하지만 신승은 아니었다.
“중요?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면서 중요는 개뿔. 어차피 그런 이야기는 보고서에 다 적었을 것 아냐?”
그런 그렇다.
상인이나 암천무제, 북해 빙제의 친서 같은 중요한 내용을 공식 보고서에 빠뜨릴 수는 없으니까.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리고 세상에 남녀상열지사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냐? 그거 없으면 애초에 사람이라는 족속이 존재할 수가 없는데, 뭐가 더 중요하겠냔 말이다.”
운현은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중요한 일이긴 하다.
“아니 그래도…….”
“에이, 재미없는 놈. 오랜만에 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쯧쯧.”
신승은 아예 흥미가 사라진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차 다 마셨으면 가라. 나도 바쁘니까.”
하나도 안 바빠 보이는 신승이 말하니 신뢰가 전혀 안 간다.
운현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신승은 손까지 내저으며 운현을 재촉했다.
결국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
와룡헌을 나온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독고랑이 물었다.
“아니, 그게…….”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쩐지 오늘은 이상하게 별 말씀이 없으셨던 듯해서.”
“그렇습니까?”
독고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매우 시끄러운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와불 선사님처럼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긴 하지만…….”
말은 많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농담이거나 운현을 놀리려던 것뿐이다.
굳이 따지자면 수고했다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뭔가 걱정이라도 있으셨나?”
항상 운현을 보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거나, 아니면 문제거리를 던져 주던 신승이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이 운현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혹시 신승 불영의 신변에 무슨 심각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뭐, 괜찮으시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승 불영이다.
그가 못 하면 천하의 그 누구도 할 수 없으니, 운현의 걱정은 사실 기우인지도 몰랐다.
“숙소로 돌아가실 겁니까?”
문득 독고랑이 물었다.
“나는 서기부로 가 보려 하네. 좀 알아봐야 할 것이 있어서.”
운현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독고랑은 운현이 무엇에 대해 알아보려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까 말씀하신 도적 떼들의 일입니까?”
운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독고랑에겐 속이거나 감출 수 없다.
“맞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그리고 지객당에 말해서 자네 숙소를 하나 마련해 볼 테니 무림맹을 나가지 말고 기다려 보게.”
독고랑은 고개를 숙여 운현의 뜻을 받들었다.
무림맹 내에 머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만일의 경우 운현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아, 그리고.”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운현이 다시 말했다.
“천하무림대회 예선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니 한번 둘러보는 게 어떤가?”
그건 독고랑을 위한 운현의 배려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독고랑은 서기부 건물 밖에서 하루 종일 운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저는…….”
“가 보게. 재미있을 것 같은 비무가 있으면 내게도 알려 주고.”
운현이 웃으며 독고랑의 말을 끊었다.
독고랑은 잠시 주저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서기부 건물 앞에서 보세.”
운현은 손을 젓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이 전각들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독고랑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운현이 완전히 떠난 한참 후에야, 독고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비무라.’
과거 비무에 미쳐 살던 고독객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무인이라면 그 단어에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은 이가 없으리라.
저벅.
발걸음을 옮기는 독고랑의 눈빛은 어느새 번득이고 있었다.
***
독고랑이 도착한 곳은 식당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었다.
‘식당으로 보인다’는 것은 건물 자체가 임시로 지어진 것인 데다가, 넓은 내부가 대단히 지저분하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무림맹 내에 이런 곳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형씨는 어디서 오셨소?”
문득 누군가 말을 걸었다.
독고랑이 고개를 돌리자 나무 아래 주저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낡은 무복을 입고 지저분한 모습의 그 사내는 한 손에 술병까지 들고 있었다.
“뭐, 여기로 온 걸 보니 말 안 해도 대강 짐작은 가오만. 큭큭큭.”
이 식당은 무림맹에서 천하무림대회를 위해 연 곳이다.
그러나 사실상 거대 세가들이나 이름깨나 있는 문파들은 이곳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주 시내의 고급 음식점이나 객잔에서 식사를 했다.
그러므로 여기 있다는 것은 낭인이거나, 그저 그런 중소 문파와 무관 출신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무림맹의 관리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지저분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덕분에 시비나 싸움도 잦았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무림맹 사람들이 하나같이 미칠 듯 바쁜 덕분에 이루어진 일종의 사각지대가 바로 이곳이었다.
슥.
고독객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중년 사내의 게슴츠레한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거 참 입이 무거운 양반이로군.”
누가봐도 남다른 기도를 풍기는 독고랑에게 중년 사내는 관심을 보였다.
지저분한 식당을, 아니 정확히는 그곳에 있는 무인들을 쳐다보던 독고랑이 문득 물었다.
“비무를 할 만한 곳을 알고 있소?”
“비무라…….”
중년 사내가 턱을 매만지며 씩 웃음을 지었다.
“명색이 천하무림대회인데 칼 든 무사들이 얌전히 차례를 기다릴 리 없지.”
중년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오시오.”
그는 술병을 든 채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겼다.
독고랑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타하아앗!”
귀를 찢을 듯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만큼의 기세가 그의 검에는 없었던 듯, 그는 곧 참담한 신음과 함께 검을 떨궈야 했다.
떵그렁.
“으윽……. 져, 졌다.”
“케헤헤. 겨우 그 정도의 실력으로 감히 이 강남 대호 구의역 대협에게 덤비려 하다니, 아직 백 년은 이르다. 케헤헤헤.”
구의역은 거만한 태도로 패자를 비웃었지만 그도 상대가 쉬운 것은 아니었던 듯 이곳저곳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크으윽.”
패배한 사내는 자신의 검을 주워 들고 황급히 비무대를 떠났다.
홀로 남은 구의역은 두 팔을 벌리고 주위를 향해 도발하듯 소리쳤다.
“자, 이 강남 대호 구의역에게 덤빌 자가 있느냐!”
승자다운 당당한 기세였지만 비무대를 둘러싼 이들 중에 겁을 집어먹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도전적인 시선과 간간이 섞인 비웃음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네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터져 나온 일갈에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향했다.
주렁주렁 고리가 달린 커다란 환도를 들고 건장한 사내가 비무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나 당산 대협 이호선이 한 수 가르침을 주도록 하마!”
“케헬헬. 어디서 빌어먹던 애송이인 줄 몰라도 오늘 제대로 임자 만난 줄 알아라.”
거칠게 내뱉는 말들 속에서도 서로의 시선은 신중하게 상대를 탐색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선 비무대 위에는 새로운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고독객을 안내한 중년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시답잖은 놈들이 또 비무대를 차지하고 있군.”
그는 고독객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기다리면 볼만한 사람들이 좀 나올게요. 꼭 저렇게 사람들 없는 틈을 타서 잘난 척하는 놈들이 있다니까.”
고독객은 비무대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비무대는 생각보다 제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비무대의 크기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휘장을 친 천막이 여럿 세워져 있는 것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뭐, 무림맹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니 장외(場外)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이런 쪽이 의외로 재미있는 법이거든. 출전 자격도 필요없고 문파나 소속을 따지지도 않으니까.”
중년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꼴리는 대로 튀어 나갔다가 재수 좋으면 이기는 거고, 아니면 한번 쪽팔리고 마는 거지.”
“승패는?”
고독객의 물음에 사내는 어깨를 으쓱했다.
“쓰러지는 놈이 지는 거 아니겠소?”
“재미있군.”
고독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규칙도 없고 판정관도, 참관인도 없다.
어쩌면 가장 실전에 가까운 비무가 바로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챙, 채앵
“이놈, 어딜!”
그사이 비무대 위에서는 승패가 갈리고 있었다.
기세 좋게 나섰던 이호선은 현란한 구의역의 초식에 호흡을 잃고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크악!”
한 줄기 비명이 이호선에게서 새어 나왔다.
이호선은 왼손으로 오른 팔을 쥐고 몸을 웅크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흐르고 옷소매가 금방 붉게 물든다.
“흐흐, 어떠냐? 계속 덤비려느냐?”
“이, 이놈. 다음에 두고 보자.”
“헹. 두고 보자는 놈이 너 하나인 줄 아느냐? 오기 전에 미리 예약이라도 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케헤헤헤.”
이호선은 입술을 깨물고 비무대를 내려오고, 구의역은 가쁜 숨을 고르며 비무대 가운데 섰다.
“나는 강남 대호 구의역이다! 강남 대호 구의역! 알았느냐? 크하하하.”
호탕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도 연이은 비무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그대로 비무대를 내려왔다.
비록 지쳤지만 비무의 승자로서 당당한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이제 비무대가 비었군.”
중년 사내가 독고랑에게 슬그머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