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신승의 차(茶)
그렇지 않아도 운현은 신승 불영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참이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제갈연도 일어서서 정중하게 답례를 했다.
그리고 발을 돌리려던 운현은, 같이 일어선 제갈기호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
제갈기호는 아예 운현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자신은 안 간다는 뜻이다.
‘하긴 두 사람은 사형제간이니까.’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운현은 돌아섰다.
그리고 막 집무실을 나오는데 뒤에서 제갈기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운 서기님. 나중에 같이 기루 가기로 한 거 잊지 마십시오!”
‘응?’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던가?
오랜 여정 중에 그런 말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약속까지 한 기억은 없었다.
탁.
그러나 이미 집무실의 문은 닫혔다.
운현은 어깨를 으쓱하고 밖에 서 있던 독고랑을 보았다.
“가세, 독고 제.”
독고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와룡헌으로 향했다.
사실 운현을 북해로 보낸 장본인, 신승 불영이 운현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탁.
집무실 문이 닫히자 대표자 제갈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기루라고?”
“운 서기도 제법 풍류를 알더군요.”
제갈기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아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예쁘고 매력적이더라니까요? 북해에서도 그렇고 남궁세가의 아가씨도 그렇고요. 하긴, 눈이 높을 만도 하지요. 자그마치 검성의 후계자 아닙니까?”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제갈기호의 모습에 제갈연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가려면 좋은 곳으로 가라. 항주에서 가장 화려하고, 제일 비싼 곳으로.”
제갈연의 말에 제갈기호가 눈을 빛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 운 서기와 친분을 쌓는 것은 너 자신뿐 아니라 세가의 큰 자산이 될 테니까.”
제갈기호는 득의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 말은 곧 제갈세가에서 운현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분명히 알려 주고 있었다.
이미 가주의 뜻을 확인했으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욱 파격적인 결정이 내려졌음이 틀림없었다.
“그보다.”
바스락.
제갈연은 얄팍한 서찰을 품에서 꺼내 탁자에 놓았다.
제갈기호가 비밀리에 제갈세가에 전한, 오직 운현에 대해서만 기록한 또 다른 보고였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냐? 단 일검에 오십여 기마대를 몰살시키다니?”
“그건 소문이고요.”
제갈기호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하지만 혼자서, 검 한 자루로 오십여 기마대를 무력화시킨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도 단 이 합, 아니, 서로 부딪힌 적이 없으니 합은 아니고…….”
고개를 갸웃하던 제갈기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허공에 두 번 검을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오십여 기마대는 궤멸했지요. 그게 전부입니다.”
제갈연의 찌푸린 눈살은 펴지지 않았다.
“그걸 믿으란 말이냐? 설령 검성 본인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제갈기호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모르는 것 아닙니까? 검성이 기마대를 상대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것도 그렇다.
제갈기호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여하튼 저는 이번에 아주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운 서기나 검성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나와는 아주 다른, 뭐랄까 하늘 위에서 노니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이해 자체가 불가능해요.”
그 말에는 제갈기호의 진심이 엿보였다.
제갈연은 그가 적어도 거짓이나 과장을 말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말을 그대로 믿으란 말인가?
“태극혜검 이야기는 또 뭐냐?”
제갈기호의 보고서엔 믿지 못할 이야기가 또 있었다.
운현이 태극혜검의 묘리를 사용하여 열두 기마를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만.”
제갈기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 단어 말고는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더군요. 이화접목이나 사량발천근 정도로 중무장한 기마 열둘을 날려 보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날려 보내?”
“네.”
진지한 눈빛으로 제갈기호가 말했다.
“육중한 전마들이 그냥 허공에 팔랑팔랑 날아다니더군요. 나비라도 된 줄 알았습니다.”
짐짓 과장을 섞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적어도 무언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으음.”
제갈연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기댔다.
제갈기호의 이 서찰은 세가를 거쳐 자신에게 전해졌다.
그것은 곧 가주 제갈명이 이 보고를 신빙성 있다고 판단했음을 말해 준다.
제갈기호가 짐짓 여유가 있는 것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말이다.
“이 일은.”
바스락.
서찰을 접어 품에 넣으며 제갈연이 말했다.
“당분간 입 밖에 내지 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갈기호가 답했다.
제갈연은 판단을 유보한 것이다.
어쨌거나 제갈세가가 운현을 대하는 태도는 이미 결정된 것이고, 이 사실로 인해 변할 것도 그다지 없을 테니까.
“세가로 돌아가면.”
제갈연이 제갈기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가주께서 네게 무공 비급과 세가 운영에 대해 배우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 뜻을 중히 받들어 깊이 정진해야 할 것이다.”
제갈기호의 눈이 반짝였다.
제갈연의 말은 제갈기호에게 장차 세가의 중책을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제갈기호는 모르지 않았다.
“이거 운 서기께 아주 크게 대접해야겠는데요?”
너스레를 떨지만 그 목소리가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제갈연은 알 수 있었다.
제갈연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해라. 어차피 너도 이번에 세가에 돌아가면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세가의 중책을 감당하려면 그만큼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비록 제갈기호에게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가 감당할 그릇이 못된다면 가주는 언제든 뜻을 돌이킬 것이다.
그러니 한동안 나오지도 못할 것이라는 제갈연의 말은 지극히 옳았다.
“후우.”
제갈연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향기로운 차를 음미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로써 북해의 일은 정리되었다지만.’
어쩌면 운현이라는 더 큰 문제를 내부에 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하던 제갈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보다 생각할 일이 아주 많았다.
“수고했다. 가 보도록 해라.”
제갈연의 말에 제갈기호는 빙긋 웃었다.
“넵.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아, 혹시 좋은 기루를 아시면 좀 알려 주시지요, 대사형.”
너스레를 떠는 제갈기호의 모습에 제갈연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준비해 두었던 비단 전낭을 들어 가볍게 던졌다.
툭.
제갈기호는 즉시 그 전낭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묵직함에 미소를 지었다.
“더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라.”
제갈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 갔다.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대사형 제갈연의 그 말은 어떤 칭찬보다 더 제갈기호를 흡족하게 했다.
어느새 제갈기호의 얼굴에는 득의의 미소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
“괜찮으십니까?”
문득 들려온 독고랑의 목소리에 운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두 사람은 와룡헌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아, 괜찮네.”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에 빠져 있었다지만 주위도 제대로 살피지 않고 걸어왔단 말인가?
옆에 독고랑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엉뚱한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냥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독고랑은 그게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운현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 담긴 신뢰가 운현으로 하여금 실토를 하게 했다.
“실은 좀 걱정되는 게 있네.”
독고랑의 눈빛이 다음을 재촉했다
운현은 말을 이었다.
“상인이라는 자는 암천무제를 통해 장강수로채를 손에 넣었네. 북해를 회유하려고도 했지. 그런데 만일 그 상인이 녹림까지 장악했다면…….”
독고랑은 운현이 그리 생각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들이 북해로 가는 도중 실제로 녹림채들의 습격을 당한 적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최근 극성이라는 녹림의 움직임도 수상하다.
만일 이것이 상인의 계획이라면 그는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혹시라도……. 아니, 아닐세.”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생각이 과했나 보네. 수로채 연합이나 녹림이나 이미 유명무실한 조직이라고 하니까.”
과거 무림맹은 장강수로채 연합과 녹림에 철저한 응징을 가했다.
명분과 내부 결속, 그리고 실리를 챙기기에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장강수로채 연합과 녹림은 완전히 해체되고, 지금은 그저 이름이 남아 있는 명목상의 조직이 되어 버렸다.
지도력을 발휘할 수채나 산채는 없었고 힘 좀 쓰는 수채나 산채가 스스로 총채주를 자칭하는 것이 전부다.
지금 장강수로채 연합이 문제 되는 것도 사실은 암천무제와 황천대 때문일 뿐, 정작 수로채들은 무림맹의 안중에도 없다.
사실이 그러했고 말이다.
“하하하. 나도 참 이상한 소리를…….”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넘기려 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독고랑은 진지한 눈빛으로 운현에게 말했다.
“제가 듣겠습니다.”
그 눈동자 앞에서 운현은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을 알았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모두가 천시하던 도적 떼들로 대업을 이룬 적이 있었네. 조금 다르지만 도적 떼들로 대업을 꾀하려던 자도 있었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황천대라는 이름이 자꾸 마음에 걸리네.”
남궁세가를 봉문시킨 이는 암천무제다.
그러나 남궁세가의 무력을 막아 낸 이들은 스스로를 황천대라 밝힌 자들이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 문장이,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떨쳐 낼 수 없던 말이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다[蒼天旣死].”
운현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독고랑 역시 묻지 않았다.
와룡헌은 이미 지척이었지만, 운현은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와룡헌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운현이 예를 표하자, 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던 신승 불영이 손을 멈췄다.
“이제 왔냐?”
인사인지 핀잔인지 모를 말을 하고 나서, 신승은 남은 새 모이를 아무렇게나 뿌리고 손을 털었다.
그리고 마당에 놓인 탁자에 털썩 앉았다.
“이쪽으로 오너라.”
신승은 운현에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거기 너도. 네 주인님 안 잡아먹을 테니 그렇게 겁먹지 말고.”
그것은 독고랑을 향한 말이었다.
“아, 이 사람은…….”
운현이 독고랑을 소개하려 했지만 신승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안다. 고독객인지 뭔지 하는 놈 아니냐? 철정산에선 칼춤깨나 췄다면서?”
독고랑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나 신승 불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피비린내가 안 나는구나. 이 정도면 별호도 바꿔야겠는데?”
피식 웃으며 신승이 말했다.
“다정검이나 유정검 같은 걸로 말이다.”
다정검은 정이 많다는 뜻이며 유정검은 검에 정이 담겨 있다는 의미다.
어느 쪽이든 독고랑의 소문이나 인상과는 전혀 동떨어진 별호였다.
“저기 독고 제는…….”
운현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신승은 찻잔에 차를 따랐다.
또르르륵.
비어 있던 두개의 잔이 차로 채워지고, 은은한 차향이 주위에 퍼져 갔다.
“수고했으니 한 잔씩들 받아라.”
웃음을 흘리며 신승이 말했다.
“별건 아니지만 아무나 못 마시는 거다.”
그의 말대로였다.
천하에 신승 불영이 직접 주는 차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운현은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또 무슨 뜻이 담겨 있을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 차 한 잔을 받고 나면 뭔가 또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