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천하무림대회
왕족의 행차가 부럽지 않을 것이라는 삼궁주의 말은 정확했다.
동행한 상단은 규모 자체가 매우 컸고, 운현과 제갈기호, 독고랑은 왕족 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을 위해 준비된 마차는 크고 넓어서 누워 뒹굴거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제갈기호는 두꺼운 모피 가죽 위에 반쯤 누워서 시녀가 따라 주는 과실주를 음미하고 있었다.
“이야, 이거 정말 좋군요. 정말이지 호사가 따로 없습니다.”
제갈기호가 시녀에게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국적인 용모의 시녀는 상단주가 세 사람만을 위해 따로 고용한 사람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눈치가 빨라서 제갈기호도 사뭇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갔으면 좋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일행이 북해에 올 때와 달리, 상단은 제법 멀리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안전하고 편해서 몸도 마음도 느긋했다.
무엇보다 사절단의 본래 목적, 북해와 우호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성공했으니 더더욱 그렇다.
운현은 쓰게 웃으며 손에 쥔 찻잔을 어루만졌다.
제갈기호와 달리 운현은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독고랑은 그 차조차도 드물게 마셨지만.
“그나저나 무림맹으로 돌아가면 운 서기께서는 어쩌실 겁니까?”
한층 뻔뻔해진 제갈기호가 물었다.
그는 운현을 마치 아는 형님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운현 역시 먼 여정에 정이 쌓여서인지 그런 제갈기호를 멀리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운현은 잠시 생각했다.
“글쎄요, 저는 다만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상처 주는 일 없이, 그저 검이나 수련하면서요.”
“흐음.”
제갈기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참 어려운 소원이군요.”
“네?”
운현의 반문에 제갈기호가 씩 웃었다.
“이 상단에 있는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는지 모르십니까? 북해의 무신이랍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운현이 눈을 껌뻑거리자 제갈기호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운 서기님을, 북해의 무신이라고 부르고 있다고요.”
“엑?”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흘렸다.
“제, 제가요?”
당혹스러운 운현과 달리 제갈기호는 여유롭게 웃으며 시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이국적인 용모의 시녀가 즉시 그의 잔을 채웠다.
“아니, 제가 왜…….”
“그럴 수밖에 없지요. 북해 사람들이 하나같이 운 서기님을 천신 대하듯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그야…….”
푸른 늑대라는 이름이 북해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아무리 운현 자신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가는 곳마다 북해인들이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데 어찌 상단의 사람들이라고 모를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운현을 향해 건배라도 하듯 잔을 들어 올린 제갈기호가 말했다.
“세상은 말이지요, 아주 혹독합니다. 이름을 얻으면 존경보다 시기와 질투가 먼저 쏟아지거든요. 운 서기께서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아니, 이제는 천하에 셀 수도 없을 정도가 되겠군요.”
잔에 남은 술을 입에 털어넣으며 제갈기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운 서기께서 겪으실 일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분명 옳은 말이었다.
운현은 조용히 그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아마도 조만간 선택의 때가 오겠지요.”
문득 제갈기호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운현이 고개를 들자 제갈기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엇을 선택하든 상관없습니다. 운 서기님의 자유니까요. 하지만 마음을 정하셨다면 결코 뒤돌아 보지 마십시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제갈기호는 말했다.
“포기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강호 무림입니다. 한 팔을 잃고,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다들 그렇게 살아남는 곳이니까요.”
그의 말은 운현의 마음을 울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제갈기호는 조용히 말을 맺었다.
“이것이 제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충고입니다. 어쩌면 그저 주정꾼의 헛소리일 수도 있겠지만요.”
다시 잔을 채우며 제갈기호가 넉살 좋게 웃었다.
운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제갈기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다시 말도 안 통하는 시녀와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독고랑을 한번 바라보고 나서 운현은 찻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앞날은 여전히 불안하다.
또 무슨 가당찮은 오해와 소문이 일어날지, 어떤 상상도 못 하던 일이 닥칠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강호 무림인가?’
어쩌면 동경과 환상만을 가지고 있던 예전이 훨씬 나았을지 모르겠다고, 운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운현 일행을 태운 마차는 남쪽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여 가고 있었다.
***
좋은 길은 일찍 끝나고 편한 날들은 빠르게 지나갔다.
운현 일행이 속한 상단의 행렬은 어느새 국경을 지나 관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제갈기호는 공기부터 다르다며 반색을 했고, 운현도 오랜만에 보는 친근한 경치에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항주까진 금방이겠군요.”
제갈기호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사스러운 마차 여행이 곧 끝날 것 같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며칠이나 남았지요?”
제갈기호가 중년의 행수에게 물었다.
상행의 책임자인 행수는 어느새 제갈기호와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사교성이 좋은 제갈기호가 가만히 있지 않았던 것이다.
“관도 상황에 달린 일이지만, 아무래도 조금 늦어질 것 같습니다.”
“네? 늦어진다고요?”
운현이 반문했다.
상단주는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요즘 들려오는 소문이 하도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아니, 행수께서 죄송하실 일은 아니고…….”
운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행수는 제갈기호와 달리 운현을 매우 어려워했다.
물론 운현이 별로 말이 없는 데다 ‘북해의 무신’이라는 소문 탓이겠지만, 그래도 직책은 제갈기호가 더 높은데 말이다.
“소문이라니요? 무슨 일이라도 났답니까?”
제갈기호가 슬쩍 나섰다.
운현은 뒷일을 제갈기호에게 맡기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 그것이…….”
한번 운현의 눈치를 본 행수는 제갈기호에게 답했다.
“요즘 곳곳에서 산채나 수로채가 활개를 치고 있다 합니다. 그놈들이야 물론 예전에도 그랬습니다만, 최근에는 큰 관도도 안전하지 않다고 해서요. 그래서 최대한 안전한 길을 고르다보니…….”
“그럼 어쩔수 없는 일이지요. 안전은 중요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던 제갈기호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항주까지는 대부분 무림맹의 영향이 미치는 곳일 텐데요?”
국경 부근의 변방이라면 몰라도 제대로 된 관도라면 당연히 관에서 관리도 할 것이고 주변의 무림맹 문파들도 있을 것이다.
감히 산채나 수로채 따위가 욕심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행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요즘 무림맹 문파들은 이 문제에 신경을 쓸 수가 없습니다.”
“네?”
제갈기호의 반문에 운현도 눈을 동그랗게 썼다.
관도가 위험할 정도인데 무림맹이 신경을 못쓴다니?
“그게 무슨…….”
제갈기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수가 말했다.
“지금 무림맹은, 아니 강호 무림은 전부 난리니까요. 다른 데도 아니고 무림맹에서 천하무림대회를…….”
“아!”
운현과 제갈기호가 동시에 말했다.
사절단이 무림맹을 떠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던, 그간 북해에서 지내며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 그제야 생각난 것이다.
“천하무림대회!”
바로 무림맹에서 여는 천하무림대회였다.
물론 이 무림대회의 목적은 천하제일인을 정하는 것도, 천하제일문파를 뽑는 것도 아니다.
‘천하’의 의미는 그저 널리 모든 문파들을 받겠다는 의미일 뿐이며 실제로는 장강수로채 연합에 대한 견제에 가깝다.
그러나 무림인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달랐다.
명실공히 강호 무림을 지배하는 무림맹, 그곳에서 ‘천하무림대회’를 여는 것이다.
비단 이름을 날리기 원하는 젊은 무인들이 아니더라도, 강호 무림을 사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슴이 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였군요…….”
제갈기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무림대회가 열리는데 어느 문파가 산채나 수로채 따위에 신경을 쓰랴?
제갈기호는 이 상황을 충분히 납득했고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운현은 아니었다.
‘……뭔가.’
본래 장강수로채 연합을 견제하기 위한 대회다.
그런데 정작 그 대회 때문에 산채나 수로채가 활개 치는 것을 방치한다니?
‘이상한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아니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운현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게 어딘지 불안한 운현과, 다시 느긋한 표정이 된 제갈기호를 싣고 마차는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무림맹 지객당의 책임자, 관지부는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그것은 바로 천하무림대회, 정확히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천하에서 모여든 수많은 문파들이 날마다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건과 사고의 처리는, 바로 무림맹의 손님 대접을 전담하는 지객당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관지부 님, 큰일났습니다. 소두문과 북방파가 시비가 붙어서 기물이 파손되고 숙소의 문짝 수십 개가 날아갔습니다.
―관지부 님! 청해문이 배정된 숙소를 거부하고 나간답니다! 청해문의 문주는 지객당의 처리에 대해 정식으로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관지부 님, 큰일 났습니다! 흑도파가 식당에서 식탁을 엎었습니다. 이딴 건 절대로 못 먹는다고 시정을 요구…….
―관지부 님! 혈도문과 신검문이…….
―관지부 님, 큰일났습니다! 대도문에서…….
―관지부 님, 큰일…….
“관지부 님!”
“으헉!”
관지부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이제는 누가 이름만 불러도 경기가 일어날 정도다.
“저는 바빠 죽겠는데 대낮부터 무슨 낮잠이십니까?”
“뭐?”
관지부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불만 가득한 변기량이 있었다.
서류를 가득 들고 온 변기량은 그것들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하긴 철야도 벌써 나흘째니 피곤하실 만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깜빡 졸았었나 보다.
그러나 관지부는 그것보다 변기량이 들고 온 서류 뭉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네. 어제 일어난 온갖 사건들에 대한 보고 및 대책들입니다. 이걸 전부 정리하고 대책까지 세우려면 오늘도 철야겠군요.”
일그러진 관지부의 표정에 변기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성한 서기들도 죽을 맛이라더군요. 하긴 그쪽은 화난 무인들을 직접 상대해야 하니까요.”
고생하는 것은 지객당만이 아니다.
무인들의 불만을 직접 들어야 하는 서기들을 비롯해서 일하는 시비들과 노복들, 하다못해 삯을 주고 고용한 품꾼들까지, 무림맹에 있는 사람치고 고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높으신 분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별 도리가 있나.”
관지부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빨리 무림대회가 끝나기를 바랄 수밖에.”
하지만 그날이 빨리 오지 않으리란 건 관지부도, 변기량도 잘 알고 있었다.
“끝나요? 정식 비무는 아직 시작도 안 한 데다 날이 지날수록 더 많이 몰리고 있는데요?”
소문은 소문을 부르고 사람은 사람을 부른다.
예상을 뛰어넘는 문파와 무인 들이 무림맹에 몰리자 사람들은 더더욱 천하무림대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뒤늦게 참가를 원하는 문파와 무인 들은 물론 관전만이라도 해 보려는 호사가들이 몰려들어서 대도시 항주가 몸살을 앓을 정도였다.
그러니 무림맹의 상황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오죽하면 전대 거마들이 이번 무림대회를 노린다는 소문까지 있더라고요.”
변기량의 말에 관지부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전대 거마?”
“모습을 감췄던 마도나 사파의 고수들 말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그들이 왜?”
“그야 무림맹에 원한이 많으니까요. 복수도 될뿐더러 자신들의 명성을 높일 수 있으니…….”
“헛소리.”
관지부가 변기량의 말을 끊었다.
“지금 무림맹에 고수가 몇이나 되는지 아냐? 말 그대로 천하의 모든 문파가 모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떤 미친 마두가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 죽을 작정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지.”
그의 지적은 구구절절 옳았다.
“애초에 그런 소문이 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마두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떠벌리기라도 했다는 거냐?”
그러고 보니 그 말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