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아름다운 그녀
운현은 소궁주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반짝이는 눈동자, 곧게 뻗은 콧날, 윤기 흐르는 붉은 입술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좋은 향을 풍겨내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까지.
생각에 집중한 소궁주의 모습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소궁주님.”
그래서일까?
운현은 용기를 내어 소궁주를 불렀다.
슥.
소궁주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의 비파를 다시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날, 별이 쏟아지던 북해에서 들었던 소궁주의 비파.
세상에 오직 두 사람뿐인 것 같던 그 순간을 운현은 잊을 수 없었다.
모든 가식과 의혹을 벗어버리고 서로의 진실된 마음을 내보일 수 있었던 그 밤을, 소궁주의 그 미소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소궁주는 대답대신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머지않아 빙제의 자리에 오를 거예요. 이름뿐인 빙후 같은 것이 아니라, 진정한 북해의 여제로서요.”
그건 이미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그러나 그녀 자신이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무림맹을 이끄는, 혹은 핵심 인물이 되겠지요. 적어도 강호 무림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저는…….”
운현은 부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건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소궁주의 말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때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그곳은 피가 흐르는 전장일까요, 아니면 별빛이 아름다운 서호의 호반일까요?”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운현이 아는 가장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인생의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요.”
소궁주는 가만히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 가볍고 허무하며, 지독히도 아팠다.
“하지만 당신이 검을 놓지 않고, 제가 뜻을 꺾지 않는 한 길은 하나뿐이에요.”
운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검을 놓으라고?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제 운현에게 남은 것은 어쩌면 검 하나뿐인데도?
말 없는 운현을 향해 소궁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문왕을 조심하세요.”
그건 난데없는 말이었다.
“일대상인도, 암천무제도 쉽게 움직이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문왕은 달라요. 그는 서슴없이 당신을 죽이려 할 거예요.”
“……소궁주님.”
운현이 무어라 하려 했지만 소궁주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멀어져 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소궁주가 발을 멈췄다.
“그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궁주는 그저 고개만 조금 운현을 향한 채 말했다.
아름다운 그 눈동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대의 선택은 옳았다.”
소궁주는 말을 이었다.
“이것이 그 옛 언어의 해석이에요.”
‘아.’
운현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처음 본 만년빙정의 기운은 어마어마한 것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 가공할 힘만 있다면 천하를 쥐는 것조차 너무나 손쉽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실제로 단 두 번 휘두른 것만으로도 운현은 오십여 기마대를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운현은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바다를 한 줌 손에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릇이 될 운현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힘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리고 운현은 그 환상 같은 검무를 보았다.
힘에 휘둘리지 않고 힘을 다스리며, 옳은 길을 따라 걷는 누군가의 모습을 말이다.
그러니 그 옛말은 운현의 선택이 옳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사박.
그러나 회상은 잠깐이었다.
소궁주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운현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어깨가 유난히 가냘프게 보였지만 운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박, 사박.
어느새 소궁주의 모습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며칠 후 사절단이 북해를 떠날 때까지도 소궁주는 운현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절단은 북해를 떠났다.
***
화려한 대전은 대부분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오직 하나의 등만이 탁자를 밝히고 있을 뿐, 커다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이곳의 주인은 어둠 속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사락.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가 문득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북해가 침묵했습니다.”
화려한 비단 부채를 흔들던 하얀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젊은 청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연락이 전부 끊어졌다는 말이냐?”
짐짓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분노가 숨어 있었다.
고개 숙인 검은 무복의 사내는 말을 이었다.
“네. 저희와 연계되어 있던 모든 인물이 영향력을 상실하거나, 혹은 제거되었습니다. 현재 북해의 권력 핵심과 연결된 모든 선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흐음.”
하얗고 고운 손이 비단 부채를 흔들었다.
“누구지? 어쭙잖게 북해의 자존심을 내세우던 그 일궁주의 짓인가?”
대전의 주인, 문왕은 다른 손을 뻗어 포도 한 알을 집었다.
“아닙니다.”
검은 무복의 수하는 즉시 답했다.
“일궁주는 삼궁주에 의해 빙궁에서 축출당했습니다. 이번 일의 주동자는 삼궁주입니다.”
“삼궁주?”
여인처럼 고운 문왕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에겐 그만한 세력이 없을 텐데?”
“푸른 늑대가 나타나 삼궁주를 도왔다고 합니다.”
“푸른 늑대? 아아, 그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온다는 인물 말이로군. 하지만 그건 그저 전설 아닌가?”
“그렇습니다. 허나 푸른 늑대가 나타나 빙제의 인정을 받았으며, 패왕도와 그의 오십여 기마대를 단 일검에 몰살시켰다고 합니다.”
“헛소리.”
문왕은 조소를 숨기지 않았다.
“단 일검에 오십여 기마대를 죽여?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헛소문이거나 혹은 의도적인 과장이겠지.”
탁.
화려한 비단 부채가 문왕의 손 아래서 접혔다.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한 과장, 말이다.”
문왕은 제법 굵은 포도를 목으로 넘겼다.
껍질을 은쟁반 위에 뱉어낸 문왕은 비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패왕도를 꺾은 것은 사실이겠군.”
“알려진 바로는 푸른 늑대를 제압하기 위해 일궁주의 삼백 기마대가 나섰으나 오히려 삼궁주의 계략에 빠져 퇴각했다고 합니다. 이후 삼백 기마대는 해체되었고 일궁주는 사실상 권력 쟁탈전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북해의 권력 승계 구도가 크게 요동쳤다고 합니다.”
“그래. 그런데 어떻게 그 결과가 우리와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되지? 혹시 그 푸른 늑대의 뜻인가?”
문왕은 정확하게 핵심을 짚었다.
수하는 고개를 숙였다.
“네. 그가 바로 무림맹에서 온 검성의 후계자라고 합니다.”
문왕의 하얀 손이 멈칫했다.
결국 북해는 무림맹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문왕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검성의 후계자?”
그 이름을 문왕이 모를 리가 없다.
“무제가 찾던 그놈 말이냐?”
사실 검성의 후계자에 대한 소문 따위는 문왕의 관심 밖이다.
하지만 암천무제, 문왕이 지독히도 질투하는 무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자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재미있는데?”
문왕의 가느다란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검성의 후계자가 푸른 늑대가 되어 단번에 북해를 손에 넣었단 말이지? 상인(上人)께서 직접 찾아가시기까지 했던 바로 그 북해를?”
붉은 입술에 비릿한 미소가 짙어졌다.
“상인께서는 무어라 하시더냐?”
자신이 아는 일을 상인이 모를 리 없다.
수하는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말했다.
“북해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으셨습니다. 다만 푸른 늑대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가 문서(文書)의 주인일지도 모르니까?”
문왕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의 추측은 맞았다.
“네. 창룡검주와 푸른 늑대, 그들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보시는 듯합니다.”
“큭큭큭. 그럴 테지.”
문왕은 웃었다.
“언제나 아버지의 관심은 문서의 주인에게만 향해 있지 않는가? 무제는 강자만 찾아다닐 뿐이고 비련은 오직 그의 뒤만 따르니, 결국 천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팍.
붉은 비단에 금빛 실로 용봉을 아로새긴 작은 부채가 펴지며 문왕의 입을 가렸다.
“나뿐이란 말이군.”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수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북해는 어떻게 할까요?”
“그냥 두어라. 상인께서도 관여치 않으시니 구태여 나설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지 않느냐? 하지만 이곳의 일이 정리되고 나면…….”
얇은 문왕의 입술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내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는 북해의 꼴을 반드시 보아야겠다.”
자신의 말을 잠시 음미하던 문왕은 다시 수하에게 물었다.
“녹림과 수로채의 준비는 어찌 되어 가고 있느냐?”
“수로채는 개파대전을 앞두고 그 수와 세력이 크게 늘었습니다. 녹림의 산채들 역시 예상대로의 진척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환약 제조에 필요한 재료의 준비가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
문왕의 눈꼬리가 살짝 일그러졌다.
“천하삼대상단이라는 자들이 그렇게도 무능력한 것들이었단 말이냐?”
“워낙 대량이라 비밀리에 구하기가 쉽지 않은 듯 보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일 내에 완수하겠다고 다시 한번 약조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문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만의 하나라도 차질이 빚어진다면, 확실하게 본보기를 보여 주도록.”
그 말의 의미를 수하는 분명히 알았다.
“존명.”
묵직한 목소리로 답한 수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직 보고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일부 산채와 수로채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문제냐?”
나쁜 보고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문왕은 짜증을 내지 않았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은 무능한 자들이지, 문제를 보고하는 자는 아니다.
“예정보다 일찍 준비를 마친 몇몇 산채와 수로채에서 인근의 부호나 세력가를 습격, 약탈하고 일가를 몰살시킨 일입니다.”
“크크크.”
비릿한 웃음소리가 문왕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그럴 테지. 쓰레기 같은 것들이 힘을 갖게 되니 어찌 휘둘러 보지 않겠느냐?”
“어떻게할까요?”
문왕은 느긋하게 부채를 흔들었다.
“관(官)에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일부 지역에서 조사에 들어갔으나 형식적인 것입니다.”
“그렇겠지.”
관은 본래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집단이다.
위에서 명이 내려온다면 또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미 문왕의 줄이 고위 관리들에게 닿아 있으니,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산채와 수로채는 본래 그 근거지가 흩어져 있다.”
문왕은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일부에서 사고가 있었다 해도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보이진 않을 터, 책임자를 문책하되 적당한 수준에서 마무리하도록.”
사락.
문왕은 부채를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여전히 대부분 어둠 속에 가려 있었다.
“녹림과 수로채가 준비되면 상인(上人)께서 명하신 것들이 모두 끝난다.”
문왕은 수하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면 이제 곧 천하가 내 손안에 들어온다. 암천무제는 이름대로 어두운 밤하늘 아래 사라지고, 내가 밝은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콰직.
붉은 비단 부채가 그의 손안에서 일그러졌다.
“이제, 곧 말이다.”
문왕의 목소리는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숨은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수하는 문왕의 그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그가 할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슥.
수하는 깊이 고개를 조아리며 문왕의 뜻에 부복했다.
화려한 대전의 주인, 새로운 세상의 주인을 꿈꾸는 문왕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