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몰락과 종결
일궁주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이 상황의 의미를 그제서야 그도 깨달은 것이다.
“아, 물론.”
삼궁주는 전대 장로들을 돌아보았다.
“존경받는 전대 장로님들께서도 결코 그냥 넘어가시진 않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전대 장로들의 얼굴에 낭패가 스쳤다.
그러나 갈등은 길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푸른 늑대께 의구심을 가지고 계시나요?”
“그렇지 않네.”
전대 장로 중 한 명이 대답했다.
그는 한숨을 한번 쉬고 천천히 답했다.
“북해의 율법을 따라, 우리는 푸른 늑대께 적대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겠네.”
그건 완벽한 항복 선언이었다.
삼궁주는 자신들의 모든 행적을 이미 알고 있음이 분명했으니까.
전대 장로의 말에 삼궁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일궁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 어쩌실 건가요? 일궁주 오라버니.”
그 노골적인 조소에 일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거사는 실패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우리는.”
피가 나올 듯 악다문 입술 사이로 그가 말했다.
“그저 푸른 늑대의 무위를 견식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네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안 됩니다!”
돌연 카불이 외쳤다.
“삼궁주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설령 북해십이비라도 삼백 기마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빙궁의 다음 주인을 결정…….”
“닥쳐라!”
일궁주는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카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일궁주님!”
“이미 늦었다. 카불.”
묵직한 그 목소리는 패왕도 바얀투의 것이었다.
그는 체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북해십이비가 나선 이상 우리는 북해 모두를 적으로 돌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패왕도 바얀투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삼백 기마대라고? 북해를 거역하고도 살아남을 기마대는, 아니 부족은 어디에도 없다.”
북해십이비에 대한 북해의 믿음은, 푸른 늑대와 마찬가지로 깊고 오래된 흔들리지 않는 전통이다.
어떻게 포장하더라도 모든 북해인들은 북해십이비를 믿을 것이다.
빙제의 통제조차도 벗어난 오직 북해만을 위한 무력, 그것이 바로 북해십이비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북해십이비를 상대로 그럴 수 있을까?
게다가 이곳에는 패왕도마저 인정한 푸른 늑대가 있는데?
그러니 북해십이비가 나타난 이상 삼백 기마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그런…….”
카불은 일궁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일궁주는 그에겐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돌아가자.”
휘릭.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듯 일궁주는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이랴!”
따각.
화려하게 치장한 일궁주의 말이 땅을 박찼다.
그와 함께 삼백 기마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는 천천히 멀어져 갔다.
패왕도 바얀투와 그의 두 용사 에센과 쿠툴라도 운현에게 예를 표하고는 말에 올랐다.
마지막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던 카불도 말을 타고 자리를 떴다.
이제는 멀어진 일궁주와 삼백 기마대의 뒤를 따라서.
따가닥, 따가닥.
어쩐지 허탈하게 들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북해십이비의 가녀린 모습도 돌무덤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신을 보던 빙설의 시선을, 운현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어, 저대로 그냥 보내도 되나요?”
제갈기호가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저대로 보내도 돼요.”
삼궁주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일궁주는 때리는 대로 맞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까요. 그의 삼백 기마대는 해체되어 변경으로 뿔뿔히 흩어질 테고, 부족들의 후원은 끊어질 거예요. 어쩌면 일궁주전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지도 모르지요.”
일궁주전은 빙궁에 주어진 일궁주의 공식적인 거처다.
그것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건 정치적으로 완벽한 몰락을 의미했다.
“추종하던 세력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아마도 온몸의 피가 흘러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겠지요?”
화사한 그녀의 미소가 제갈기호는 오싹하게 느껴졌다.
삼궁주는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선언하듯 말했다.
“일궁주는 이것으로 끝이에요.”
문득, 제갈기호는 이런 결과를 위해 자신들을 미끼로 던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젠 무섭기까지 한 삼궁주 앞에서 차마 그런 질문을 할 용기는 없었다.
“크흠.”
제갈기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쏴아아.
차가운 북해의 바람이 황량한 땅을 휘감고 지나갔다.
운현은 천천히 미명을 거두었다.
스릉.
티 없이 깨끗하고 푸른 북해의 하늘이 어쩐지 차갑고 잔인하게 보인다고, 운현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
“수고하셨소.”
마지막, 북해를 떠나는 접견 자리에서 빙제는 운현에게 말했다.
“북해를 위해 그대가 기꺼이 감당해 준 수고에 대해 깊이 감사하오.”
빙제의 남쪽 말은 조금 옛스러웠지만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의 감사에 운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북해는 그대의 변치 않는 벗이 될 것이며, 그대가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온 지혜로운 푸른 늑대임을 잊지 않을 것이오. 그대가 살아 있는 한 말이오.”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빙제는 작은 함 하나를 들어올렸다.
“무림맹의 신승께 보내는 서찰이오. 이것이 아마도 그들이 원하는 것일 테지.”
웃으며 말하는 빙제에게서 시녀가 함을 받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운현에게 들어 올렸다.
운현은 제갈기호에게 눈짓을 했다.
제갈기호는 즉시 운현의 뜻을 알아차렸다.
저벅.
앞으로 나선 제갈기호는 정중하게 함을 받아 들었다.
“무림맹 사절의 정사로서, 반드시 신승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로써 빙제의 서찰은 운현 개인이 아니라,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전해진 정식 약속이 되었다.
소중히 함을 받아 드는 제갈기호를 보며 운현은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여정의 가장 큰 짐을 덜어 낸 것이다.
“패왕도와 그의 용사들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었다 들었소.”
문득 노년의 빙제가 말했다.
“검 한 자루로 오십여 기마대를 몰살시켰다던데, 어떻게 한 거요?”
‘모, 몰살?’
어느새 이야기가 그렇게 와전된 듯했다.
운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죽은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빙제는 그런 것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재촉하듯 바라보는 빙제에게 운현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년빙정이 보여 준 그 경이로운 검무를 떠올리며 운현은 말했다.
“가야 할 길[道]이 보이면, 그저 따를 뿐이지요.”
“흐음.”
빙제는 뒤로 몸을 기댔다.
“그러니까 말로 할 수는 없다는 의미로군.”
날카로운 빙제의 눈빛에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빙제는 잠시 운현을 지긋이 바라보았으나 길지는 않았다.
“……알았소.”
빙긋 웃으며 빙제가 말했다.
“나도 언젠가 한번 가르침을 받았으면 좋겠군.”
빙제에게 가르침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푸른 늑대다.
그러니 빙제의 말은 경우에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현도, 빙제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권력의 정점에 선 자는 누구에게도 패배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패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과거 빙제가 검성에게 그러했듯 말이다.
그래서 운현은 그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사락.
빙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빙제의 예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푸른 늑대를 향한 경의와 친애를 담아서.
운현 역시 깊이 허리를 숙였다.
북해의 권력 정점이자, 가혹한 운명에 매여 있는 늙은 전사를 향한 존경과 연민을 담아서.
사락.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무림맹 사절단의 빙제 단독 접견은 끝이 났다.
달칵.
운현과 제갈기호, 독고랑이 빙제의 집무실을 나오자 기다리던 십이궁주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잘됐어요, 잘됐어! 아, 이렇게 말하는 게 맞아요?”
운현이 빙그레 웃는데 역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궁주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십이궁주와 달리 삼궁주의 목소리는 짐짓 냉정했다.
마치 지극히 사무적인 대응인 양.
“돌아가시는 길은 상단이 함께할 거예요. 올 때처럼 길이 어렵지는 않겠지요. 아마도 왕족의 행차가 부럽지 않을 테니까요.”
제갈기호가 옆에서 반색을 했다.
올 때처럼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기쁜 것이다.
하지만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궁주께서는 함께 가시지 않나요?”
“가지 않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어요.”
싸늘하게 거절하는 그녀의 말에 제갈기호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래도 조만간 오시겠지요?”
싱글싱글 웃으며 제갈기호가 말했다.
“그 친구, 마차를 몰던 빙혼이 남지 않았습니까? 그건 결국 소궁주께서 다시 돌아가실 것을 대비한 것 아닌가요?”
소궁주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보기보다 예리하시네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넉살 좋은 제갈기호는 웃으며 소궁주의 날 선 말을 받아넘겼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변함이 없어요.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가지 않아요.”
말하는 소궁주의 눈빛은 운현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가 말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말은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운현은 가슴이 무거워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십이궁주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참! 사절단에 주는 선물 있어요!”
“선물요?”
제갈기호의 눈이 커지더니 반짝반짝 빛났다.
“북해에는 남자에게 좋은 영약이 많다던데, 혹시 그런 것도 있습니까? 그 무슨 버섯같은 거라든가, 뿔 같은 거라든가…….”
“많아요!”
십이궁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더라, 북해의 물개 거시기인데…….”
“해구신!”
제갈기호는 체통조차 잃은 채 흥분했다.
“정말 그게 있다고요? 그, 그게…….”
십이궁주는 말도 없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엄지 손가락을 척 들어올렸다.
“지, 지금 봐도 됩니까? 아니, 내가 뭐 가지겠다는 건 아니고 냄새라도…….”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줄 거니까요. 따라와요.”
십이궁주는 말이 끝나자마자 앞장섰다.
제갈기호는 냉큼 그 뒤를 따랐다.
신나게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웃음을 머금었다.
문득 삼궁주를 돌아보니 그녀 역시 십이궁주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오직 십이궁주만을 향한 미소다.
“저, 소궁주님.”
소궁주는 고개를 돌렸다.
그 눈동자가 순간 너무나 아름다워서 운현은 숨을 멈출 정도였다.
“왜요?”
십이궁주 덕분일까? 그녀의 목소리엔 얼음 같은 냉정함이 살짝 걷혀 있었다.
“아니, 저기 그게.”
말하려던 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운현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렸다.
“혹시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북해의 말 같은데…….”
운현은 만년빙정이 들려주었던 알 수 없는 말을 천천히 발음했다.
그다지 복잡하지 않고 짧은 문장이라 기억하기는 쉬웠다.
소궁주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어디서 들은 말인가요?”
“역대 빙제의 연공실에서 들었습니다.”
소궁주의 눈동자에 의혹이 스쳤다.
빙제의 연공실에는 운현 혼자 들어갔는데 ‘들었다’라니, 누가 말해 주었단 말인가?
하지만 소궁주는 곧 의혹을 지웠다.
어차피 이제는 상관없는 일인 데다 운현의 이해 못 할 말이 처음도 아니어서다.
“이건 아주 오래전에 사용되던 말이에요. 어느 곳에도 겨울이 없던 시대를 지나, 모든 곳이 겨울이었던 시대부터 쓰인 말이라고 하지요. 지금은 그저 예식으로나 조금 남아 있는 죽은 옛말이지만요.”
소궁주는 뜻을 해석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