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소궁주의 분노
침묵 속에서 운현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역시 이 힘은…….’
사람이 쓸 것이 못 된다.
지금 이건 특별한 검법도, 무공조차도 아니다.
그저 빙혼의 막대한 기운을 검을 통해 쏟아 냈을 뿐, 그것이 전부다.
그 강대한 흐름이 순식간에 모든 기운들을 휩쓸어 가 버린 것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역전의 용사라도, 강인한 북해의 준마들이라도 힘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심지어 운현 자신의 내력조차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마대의 내력을 날려 버린 만년빙정의 기운은 운현의 내력까지 휩쓸어 갔다.
결국 이건 자신조차 해하는, 말하자면 동귀어진이나 마찬가지인 수법이다.
당연히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쓸 이유도 없고 오래 지속할 수도 없다.
만년빙정이 보여 준 그 사람, 그는 대체 어떻게 그리도 오랫동안 펼쳐 낼 수 있었는지 몰라도 말이다.
“음.”
운현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휘청했다.
“서기 오빠!”
십이궁주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그러나 그보다 독고랑이 더 빨랐다.
휙, 탁.
단번에 운현 옆으로 날아온 독고랑은 조심스럽게 운현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소.”
운현은 부축을 거절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다는 걸 미리 보여 줬어야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버텨야 했다.
패왕도 바얀투, 그리고 그의 세 용사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슥.
몸을 바로 세운 운현은 패왕도 바얀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더 하시겠습니까?”
최대한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다른 이들에겐 그저 담담하게만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 공포감을 더했다.
수십의 기마대를 검 하나로 와해시켜 놓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이한 목소리였으니까.
턱.
패왕도 바얀투가 말에서 내려섰다.
그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바얀투가.”
스륵.
건장한 바얀투의 몸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땅에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희끗희끗한 머리를 천천히 아래로 숙였다.
“푸른 늑대를 뵈오.”
그 짧은 말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른 용사들, 쿠툴라와 에센도 말에서 내렸다.
쿵, 쿵.
그들 역시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푸른 늑대를 뵙습니다.”
“푸른 늑대를 뵙습니다.”
십이궁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운현에게 전했다.
“그들이 당신을 푸른 늑대라고 했어요.”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 하나를 넘었나.’
그렇게 속으로 되뇌던 바로 그때였다.
펑.
자그마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곧 피리 같은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피이이이.
하늘로 오르는 하얀 연기의 궤적은 모두가 볼 수 있었다.
고개를 든 패왕도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카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카불의 손에는 대나무 한 마디 정도의 통이 들려 있었다.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카불, 너 이 자식! 아직도…….”
쿠툴라와 에센이 화를 내려는데 바얀투가 손을 뻗어 그들을 제지했다.
패왕도 바얀투는 허탈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여기서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이냐?”
십이기수와 서른여섯의 기마대가 무너졌다.
패왕도 바얀투와 두 용사 쿠룰라, 에센이 진심으로 푸른 늑대를 인정했다.
이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카불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래도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전쟁입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불이 말했다.
“너…….”
“이제 저자에게 기마대를 날려 버릴 힘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설령 그가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두두두.
멀리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카불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혼자서 삼백 기마대마저 당해 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두두두두.
황량한 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는 점차 커져 갔다.
그와 함께 카불의 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도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지, 지금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갈기호가 불안한 표정으로 십이궁주에게 물었다.
“저자가 뭐라고 한 거지요? 뭐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잘못된 거죠?”
닦달하듯 제갈기호가 말했다.
방금 전 카불이 쏘아 올린 신호탄과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는 이 말발굽 소리를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십이궁주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아, 이거 참 공교로운 일이네요.”
그녀를 돌아보던 카불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카불을 보며 십이궁주는 즐거운 듯 말을 이었다.
“내 것은 분홍색인데 말이에요.”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대나무 한 마디 정도의 통이었다.
방금 전 카불이 쏘아 올린 것과 똑같은 것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카불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 십이궁주는 통에 달린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퍼엉. 피이이이.
작은 폭발음과 함께 분홍색의 연기가 푸른 하늘에 긴 궤적을 남기고 올라갔다.
모든 사람은 그 신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이것이 훨씬 예쁘죠?”
제갈기호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지금 예쁜 거 따질 땝니까!”
“깜짝이야! 당신 소리 너무 질러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십이궁주가 말했다.
하지만 제갈기호는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방금 그거 분명히 신호를 보낸 거죠? 누군가 도와주러 오는 거죠? 맞지요? 제발 맞다고 해 줘요.”
제갈기호는 애가 닳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발굽 소리의 정체가 중무장한 기마대라는 것을 이제는 멀리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
십이궁주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와요.”
“언니요? 아, 소궁주님요?”
대답을 들었지만 제갈기호는 여전히 불안했다.
“저기, 설마 소궁주님만 오는 건 아니죠?”
불안한 듯 묻는 제갈기호의 말에 십이궁주가 고개를 갸웃한다.
“글쎄요?”
제갈기호의 표정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아니, 저쪽은 신호를 올리자마자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데 우리 쪽은 이게 뭡니까? 하다못해 뿔피리 소리라도 들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뿔리피는 불지 않아요.”
“어쨌든 간에 말입니다!”
제갈기호가 짜증을 냈다.
그런데 정작 십이궁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제갈기호도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조금 전 그 목소리는 십이궁주가 아니다.
“어?”
푸르릉.
거친 숨을 내뿜는 준마 한 마리, 그리고 가볍게 말을 내리는 한 여인이 보였다.
가벼운 무복을 입었지만 그 아름다움을 숨길 수 없는 여인, 바로 북해의 삼궁주였다.
“언니!”
십이궁주는 한달음에 삼궁주에게 달려갔다.
“이미 저쪽이 신호를 올렸는데, 너까지 쏘아 올릴 필요는 없었잖니.”
질책하듯 말했지만 삼궁주는 안겨 드는 십이궁주를 내치지 않았다.
삼궁주는 십이궁주를 안고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고했어.”
“헤헤.”
십이궁주는 웃으며 삼궁주를 올려다보았다.
제법 감격적인 모습이었지만 제갈기호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정말로 혼자 온 겁니까?”
그 절규를 삼궁주는 무시했다.
자박, 자박.
삼궁주는 가벼운 걸음으로 운현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운현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사박.
삼궁주의 한쪽 무릎이 메마른 땅에 닿았다.
몸을 낮춘 그녀는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어, 저기, 이러지 않으셔도…….”
“삼궁주가 푸른 늑대를 뵙습니다.”
삼궁주가 고개를 들었다.
“연공실은 마음에 드시던가요?”
묻는 그녀의 눈동자는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음, 그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 장엄한 만년빙정의 모습을, 그리고 환상처럼 아름답던 그 아득한 옛날의 검무를.
가슴이 벅찬 운현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삼궁주는 이미 일어서고 있었다.
사박.
패왕도 바얀투를 바라보며 삼궁주가 말했다.
“그래도 패왕도께서는 납득하신 모양이군요. 다행이에요. 저로서도 장군께 무례를 행하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사락.
삼궁주는 시선을 돌렸다.
“허나 안타깝게도 당신은 아닌 듯하네요.”
그녀가 말한 상대는 카불이 아니었다.
이히히힝, 푸르르.
따각, 따각.
말들이 투레질을 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사이 삼백 기마대가 지척에 다가온 것이다.
중무장한 무사들이 살기 어린 눈을 빛내고, 창검이 햇살 아래 푸르게 번쩍였다.
“역시 너로구나.”
선두에 선 젊은 청년이 말했다.
삼궁주를 내려다보고 있는 훤칠하고 준수한 얼굴의 그는 바로 빙궁의 일궁주였다.
카불의 신호 뒤에 피어오른 분홍색 신호를 보고 이미 누군가 나타났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피부를 찌르는 듯한 기마대의 살기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사뭇 요염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일궁주는 피식 웃었다.
“그래, 너밖에는 없겠지.”
미소를 머금은 채 일궁주는 말을 이었다.
“말해 봐라. 이 삼백 기마대에 맞설 너의 계책은 무엇이냐?”
그 목소리엔 은은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제아무리 삼궁주의 지략이 뛰어나도 지금 이 삼백 기마대를 당해 낼 방법은 없음을 자신한 탓이다.
하지만 삼궁주의 표정은 여전했다.
“일궁주님의 삼백 기마대는 무서운 전력이지요.”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삼궁주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요. 푸른 늑대를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필요해요. 하지만 푸른 늑대께는.”
요염한 미소가 그녀의 붉은 입술에 흘렀다.
“열둘이면 충분해요.”
사락.
삼궁주의 하얀 손이 가볍게 들리는 것과 동시에 돌무덤 사이에서 새로운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수수한 무복을 입은 열두 명의 가녀린 여인들.
그러나 그녀들의 모습을 본 순간 일궁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제갈기호는 반가운 표정으로 외쳤다.
“빙설!”
모습을 드러낸 여인들 중에는 익숙한 그녀, 빙설이 있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일궁주는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북해, 십이비.”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사람은 일궁주만이 아니었다.
패왕도도, 그의 용사들도, 그리고 전대 장로들까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북해십이비는 북해 최강의 전력이다.
그런 그녀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었다.
“설마 네가 북해십이비를 뜻대로 움직일 정도였단 말이냐?”
일궁주의 물음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했다.
“설마요.”
삼궁주는 가늘게 웃었다.
“북해십이비는 오롯이 북해를 위한 힘. 설령 빙제시라도 사사로이 그녀들을 움직일 수는 없어요.”
사락.
일궁주를 돌아보며 삼궁주가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마치 사냥감을 노려보는 표범 같다는 느낌이 든 것은 일궁주만이 아니었다.
“북해십이비를 움직이게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랍니다.”
일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냐?”
“패왕도, 그의 세 용사들, 그리고 십이기수와 심지어 오십여 기마대까지도.”
소궁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요. 어쩌면 인정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이 푸른 늑대에 대한 순수한 도전이라면요.”
그녀의 말에 패왕도는 수치를 느꼈다.
단 한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오십여 명의 기마대를 끌고왔다.
그 행동이 얼마나 비겁한 것인지 이제야 새삼 실감한 것이다.
“하지만.”
삼궁주는 말했다.
“삼백 기마대는 푸른 늑대에 대한 적대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아, 그러고 보니 카불이 말했던가요? 이건 이미 전쟁이라고. 그러니.”
화륵.
그녀의 눈동자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감히 푸른 늑대께 전쟁을 선포한 자들을 어찌 북해십이비가 좌시할까요?”
삼궁주의 눈빛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