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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00화 (200/530)

200화. 여러분 전부 말입니다

패왕도는 강렬한 눈빛으로 운현에게 말했다.

“나는 패왕도 바얀투일세. 그대가 검성의 후계자이자, 푸른 늑대의 이름을 칭하고자 하는 자인가?”

‘칭하고자 한다’는 단어는 그의 입장을 분명히 보여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패왕도의 의도는 전달되지 못했다.

“푸른 늑대냐고 물어요.”

십이궁주의 통역은 매우 간결했다.

제갈기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 그것 뿐인가요?”

하지만 십이궁주는 제갈기호의 말을 못 들은 척했고,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크흠. 푸른 늑대입니다.”

자신을 푸른 늑대라 칭하는 건 생각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인 이상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에겐 지나치게 과분한 칭호라는 걸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해도 말이다.

십이궁주는 패왕도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분이 바로 푸른 늑대시니.”

사뭇 당당하고 오만하게 십이궁주는 말했다.

“그대들은 북해의 율법이 명한 바, 마땅한 예를 표하라 하십니다.”

패왕도 바얀투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은 용사 쿠툴라와 에센, 카불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남쪽 말을 알아듣는 카불의 경우엔 특히 그랬다.

‘십이궁주가 마음대로 말을 덧붙였군.’

카불이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허나 딱히 틀린 것도 아니지.’

없던 말이 생겼지만 따져보면 마찬가지다.

운현은 자신이 푸른 늑대라고 말했다.

그것은 곧 패왕도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인 데다, 푸른 늑대에 합당한 예를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건 또 왜 이렇게 길지요? 그냥 단순한 대답이었는데.”

여전히 십이궁주가 못 미더운 제갈기호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십이궁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 정말 시끄러워요. 뒤에서 자꾸만 종알종알……. 맡겼으면 믿는다예요.”

제갈기호는 찍소리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맡겼으면 믿으란 말이 매우 정당한 데다, 어차피 그녀 외엔 통역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기꺼이 예를 표하겠네.”

패왕도 바얀투가 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대가 진정 푸른 늑대라면 말일세.”

십이궁주는 한숨을 쉬며 운현에게 말했다.

“싸우자네요. 아, 그는 패왕도 바얀투라고 해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패왕도 바얀투와 그의 세 용사들, 오십여 명에 이르는 기마대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완전무장한 그들은 하나같이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처음 볼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빙제도 이미 경고했었다.

운현에게 도전할 사람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살기를 번득이는 패왕도가 오십여 기마대와 함께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운현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심지어 긴장조차 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년빙정이 보여 준 광경에 비하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히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운현이 답했다.

십이궁주는 눈을 들고 거만한 시선으로 패왕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원한다면 덤벼 보세요.”

패왕도의 표정이 굳었다.

북해의 용사이자 일파의 장로인 그에게 십이궁주의 말과 표현은 분명 모욕이었다.

하지만 십이궁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요? 기분이 나쁘신가요? 비록 푸른 늑대께서는 당신들을 존중하시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어디서 감히…….”

으득.

이를 갈고 십이궁주가 말했다.

“푸른 늑대께 이빨을 드러내는 건가요?”

패왕도는 이를 악물었다.

십이궁주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북해의 율법은 푸른 늑대에게 지극한 경의를 표할 것을 명하고 있다.

패왕도와 그의 기마대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운현이 진실로 푸른 늑대라면 말이다.

패왕도가 분노를 억누르는 사이, 제갈기호가 슬며시 운현에게 말했다.

“운 서기님, 상황이 좋지 않으니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침 제게…….”

“괜찮습니다.”

운현이 제갈기호의 말을 끊었다.

“어차피 한 번은 납득시켜야 할 테니까요.”

빙긋 웃으며 운현이 말했다.

그 모습에 긴장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저도 조금, 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네?”

제갈기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독고랑이 나지막이 말했다.

“운 대인. 제가 저들을…….”

“괜찮네, 독고 제.”

운현은 그의 말도 막았다.

“걱정 말게. 그리고 사실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운현은 독고랑에게 몸을 기울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나도 검을 뽑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던 참이거든.”

말하는 운현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의 눈빛처럼.

“……대인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독고랑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독고랑은 한 걸음 물러섰다.

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도 거두었고 심지어 긴장감조차 아예 사라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구경꾼이다.

어이가 없는 사람은 제갈기호였다.

‘아니, 이 상황에 대체 뭘 믿고.’

운현이 대단한 건 자신도 안다.

하지만 독고랑마저 저러면 안 되지 않는가?

머릿속이 꽃밭으로 되어 있나 싶은 저 십이궁주를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자신과 독고랑뿐인데 말이다.

“그대의 용기에.”

묵직한 목소리에 제갈기호의 생각이 끊어졌다.

패왕도 바얀투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경의를 표한다. 검성의 후계자여.”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제갈기호는 이제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십이궁주 역시 가볍게 코웃음을 흘릴 뿐 통역하지 않았다.

휘릭.

패왕도는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기마대를 향해 한 손을 들었다.

따각, 따각.

세 명의 용사와 십이기수를 포함한 오십여 기마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운현은 목검을 풀러 독고랑에게 건넸다.

“잠시 이걸 부탁하네.”

“네.”

독고랑은 운현의 목검을 마치 보검인 양 정중하게 받아 들었다.

“다녀오십시오.”

운현은 웃었다.

그리고 북해의 검, 미명을 손에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어느 정도 걸어간 운현은 그 자리에 서서 몸을 돌렸다.

완전 무장한 오십여 기마대가 운현을 향해 무리지어 서 있었다.

패왕도가 말 위에서 운현을 향해 말했다.

“북해에 십이비가 있다면 나 패왕도에게는 십이기수가 있다.”

내력이 실린 그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들렸다.

“능히 북해의 장래를 짊어질 용사들이니, 이 십이기수가 먼저 그대를 시험할 것이다.”

십이궁주가 통역을 하려는데 패왕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삼대!”

따각.

그 말에 네 명의 기마가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미친!”

제갈기호가 반사적으로 외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인합격이라고? 게다가 말을 타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오!”

네 명이라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거기다 말을 탄 채다.

어지간한 갑주라도 박살 내는 기마의 파괴력을 생각하면 제갈기호가 화를 낸 것도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패왕도의 눈빛은 차가웠다.

“감히 푸른 늑대를 자처하려면 이 정도는 당연하다.”

통역은 없었지만 대강 그 의미를 알아차린 제갈기호는 더욱 분노했다.

“아니, 무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소? 어찌 이런…….”

슥.

운현이 한 손을 들어 제갈기호의 말을 막았다.

패왕도를 바라보며 운현이 말했다.

“한꺼번에 다 오셔도 좋습니다.”

그 말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패왕도는 십이궁주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십이궁주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 한꺼번에…….”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십이궁주가 말했다.

“다 덤비래요.”

패왕도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오만하군. 십이기수 전부를 감당하려면…….”

“아, 혹시 몰라서 말씀드립니다만.”

운현의 목소리에 패왕도의 말이 끊겼다.

십이궁주를 보며 운현이 말했다.

“제가 말한 것은 말 그대로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전부 말입니다.”

이번엔 십이궁주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입을 떡 벌린 채 십이궁주는 운현을 쳐다보았다.

“기, 기마대 전부요?”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십이궁주에게 말했다.

“전해 주시지요.”

머뭇거리던 십이궁주는 고개를 돌려 패왕도를 보았다.

“……크흠.”

십이궁주는 심호흡을 하고 배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사뭇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작 십이기수 따위로 나를 시험하겠다니 가소롭기 그지없구나.”

패왕도를 노려보며 십이궁주는 말했다.

“너희가 진심으로 나와 겨루기 원한다면 전부, 한꺼번에, 다 덤벼라.”

으득.

패왕도는 이를 갈았다.

이런 모욕은 맹세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설사 전설 속의 첫 푸른 늑대라 할지라도 이리 오만하지는 못할 것이다.

“패왕도 님.”

용사 카불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자가 자초한 것입니다. 이대로 돌격을 명하시지요.”

카불로서는 호기였다.

이대로 검성의 후계자를 짓밟아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결과다.

그러나 패왕도는 카불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십이기수!”

따각.

완전무장한 또 다른 여덟 기마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저자의 말을 너희도 들었다. 그러니.”

패왕도 바얀투가 열기 가득한 목소리로 명했다.

“너희가 검성의 후계자를 시험하라!”

쿵.

대답 대신 십이기수는 일제히 창대로 땅을 찍었다.

내력이 실긴 창대가 땅을 울리고, 열두 개의 창날이 파르르 떨리며 나지막한 울음을 흘렸다.

그러나 운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쉬운 듯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둘뿐이라……. 그럼 그건 안 되겠군.’

저들을 상대로 만년빙정이 보여 준 그 광경을 재현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 볼 것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운현은 또 다른 광경을 머리속에 떠올리며 천천히 미명의 손잡이를 쥐었다.

스르릉.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미명의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해의 햇살 아래 반짝이는 칼날을 보며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두려움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전혀 없었다.

슥.

운현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자세를 잡았다.

아니, 자세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편안히 서서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조금 앞으로 내밀었을 뿐, 그것이 전부였다.

푸르릉.

자신의 말이 흥분하는 것을 느낀 용사 카불은 반사적으로 말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시선은 검성의 후계자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 오만한 남쪽 놈이 스스로 죽을 자리를 구하는군.’

카불의 생각은 지금 기마대 모두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말을 탄 열두 명의 전사를 검 한 자루로 맞서다니?

그야말로 개죽음에 다름 아니다.

‘단번에 짓이기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다.’

집단의 힘은 개인의 단순한 총합 그 이상이다.

게다가 정예 중의 정예이자, 이미 상인(上人)의 무공을 수련한 십이기수라면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우웅.

십이기수의 창날에서 울리는 나지막한 소리를 들으며 카불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반드시.’

카불은 곧 이어질 결과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가라.”

따각.

나지막한 패왕도의 목소리와 함께 전마를 탄 십이기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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