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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99화 (199/530)

199화. 환상의 검무

십이궁주의 말뜻은 분명했다.

그녀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은 절대 아니었다.

기마대의 흉흉한 기세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해를 끼칠 수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 떠나면, 서기 오빠 혼자 영문도 모르고 당해야 해요. 그러니까 절대 물러서선 안 돼요.”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소.”

독고랑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눈앞의 패왕도 바얀투를 향해 이글거리고 있었다.

십이궁주는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금방 사라지고, 십이궁주는 기마대를 향해 고개를 들고 가슴을 폈다.

그 모습은 사뭇 도도하고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제법인데?’

제갈기호는 내심 감탄했다.

평소엔 그저 귀엽고 조금 멍해 보이던 십이궁주가 지금은 더없이 든든하고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슥.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제갈기호는 기마대를 살폈다.

‘수장은 이 사람이고, 저 셋이 그다음, 그리고 부장급으로 보이는 열둘에 나머지 기마대까지.’

숫자를 파악한 제갈기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 쉰둘인가?’

패왕도와 세 사람의 용사를 제외하더라도, 열두 명의 기수와 서른여섯의 기마대 역시 하나같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여차하면.’

제갈기호는 슬며시 자신의 짐에 손을 가져갔다.

‘여기 있는 걸 전부 퍼붓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다.

물론 독고랑, 십이궁주, 그리고 운현과 함께 말이다.

‘젠장, 그러니 제발 빨리 와 주시오. 운 서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운현을 향해 제갈기호는 그렇게 속으로 기원했다.

***

운현은 눈을 떴다.

아니, 정신을 차렸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꿈에서 깨어나듯 운현은 어느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각했다.

만년빙정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이게 무슨…….’

휘청.

‘아.’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탓일까?

운현은 살짝 현기증을 느끼며 균형을 잃었다.

탁.

한 발을 내디디며 운현은 자세를 바로했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이런.’

운현은 자신이 꽤나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옷은 흐트러져 있는 데다 머리까지 풀어 헤쳐져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상처 같은 건 없었지만 무슨 난리통이라도 지나온 것 같은 몰골이다.

운현은 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무리 혼자라 하더라도 의복과 행실을 단정히 하는 것이 선비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던 운현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만년빙정을 쳐다보았다.

‘만년빙정, 빙혼.’

거대한 만년빙정은 처음 보았던 모습 그대로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귀가 멀 듯한 울림도, 지하 공동을 휘몰아치던 기세도 더 이상 없었다.

마치 운현이 겪은 그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락.

운현은 살짝 몸을 떨었다.

마지막 순간 운현이 보았던 그 낯선 환상은 바로 검무였다.

자신의 검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조차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친숙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검무였다.

운현 자신도 모르게 그리움의 감정이 솟아날 정도로 말이다.

“하아.”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검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대체 그 검무는 무엇이었을까?

운현은 가만히 서서 만년빙정을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웠던 검무의 궤적이 아직도 향기처럼 남아 주위를 떠도는 것 같았다.

“그 검무는.”

만년빙정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운현이 말했다.

“당신의 기억입니까?”

대답은 없었다.

만년빙정은 조용히 빛을 뿌리며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슥.

운현은 만년빙정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마지막 순간 조금 멈칫했지만, 결국 운현의 손끝은 만년빙정에 가 닿았다.

두근.

‘윽.’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지금은 잠들어 있지만, 저 깊은 곳에서 숨 쉬듯 가만히 일렁이는 그 엄청한 힘을 운현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고이 잠든 이의 숨소리를 확인하듯, 운현은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들리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다만 빙정답게 차가운 한기만이 손을 타고 전해질 뿐이다.

“……후우.”

운현은 한숨을 쉬며 손을 거뒀다.

그러곤 쓴웃음을 머금었다.

‘혹시 대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니.’

아마도 그건 너무나 놀라운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만년빙정의 모습은 여전히 위압적이었다.

하지만 운현에겐 어쩐지 그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벗처럼 말이다.

이대로 그냥 하염없이 이곳에 있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저벅.

하지만 운현은 몸을 돌렸다.

이곳은 결코 오래 있을 곳이 아닌 데다, 그에게는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벅, 저벅.

‘낙일검의 비밀이었구나.’

운현은 이제 안다.

낙일검이 무엇이며,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 낙일은 운현의 안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본래 만년빙정의 일부였다.

그래서 운현이, 정확히는 낙일이 만년빙정과 동조하며 공명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알 수 없는 것은 그 환상 같은 검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깨어나며 들렸던 목소리, 분명 북해의 언어 같던 그 알 수 없는 음성은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저벅.

돌문 앞에 서서 운현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 두려는 듯, 지하 공동과 거대한 만년빙정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만년빙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운현은 천천히 돌문을 닫았다.

그르릉.

문이 닫히는 순간, 운현은 만년빙정이 빛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느낌일 뿐이었다.

쿵.

돌문이 닫히고 만년빙정과 지하 동공의 광경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락.

운현은 돌아섰다.

그리고 내려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들어올 땐 그리도 으시시하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떠나는 발걸음이 아쉽기만 했다.

***

제갈기호는 속이 탔다.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기마대의 날카로운 시선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운현을 향한 기약없는 기다림 때문이었다.

‘대체 이 서기님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그리고 삼궁주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물론 서기님, 운현이야 조금 늦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삼궁주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십이궁주는 분명 언니, 삼궁주가 알려 주었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작 그 삼궁주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설마…….’

제갈기호는 순간 떠오른 생각을 얼른 지웠다.

삼궁주가 자신들을 팔아넘길 리는 없었다.

동생인 십이궁주까지 위험에 처할 테니까.

“십이궁주님.”

나지막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제갈기호가 말했다.

이쪽을 노려보는 기마대의 눈빛이 너무나 살벌해서 손가락만 까딱해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염려가 무색하게 십이궁주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돌렸다.

“왜요? 왜 불렀어요? 할 말 있어요?”

제갈기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일이니 궁금한 것이라도 물어봐야 했다.

“삼…….”

삼궁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려던 제갈기호는 말을 삼켰다.

혹시 기마대 중에 남쪽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이궁주는 제갈기호의 생각보다 더 총명했다.

“언니요? 언니는 지금 안 와요.”

그녀는 용케도 제갈기호가 물으려던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문제였다.

제갈기호는 반쯤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조금 전, 용사 카불의 눈빛은 분명 유난히 번득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거 물어본 거 아니예요?”

“아니, 그건 맞지만…….”

십이궁주는 제갈기호의 시선을 따라 카불을 쳐다보았다.

“아하.”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십이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상관 없어요.”

당당하게 웃으며 십이궁주는 제갈기호에게 말했다.

“곧 서기 오빠 아니, 푸른 늑대께서 오실 테니까요.”

“네?”

제갈기호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십이궁주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푸른 늑대는 결코 꺾이지 않는 북해의 수호자예요. 그러니 아무리 패왕도와 그의 세 용사, 그리고 북해십이기수가 상대라 할 라도.”

사락.

패왕도를 똑바로 바라보며 십이궁주가 말했다.

“절대로 지지 않아요.”

그건 완벽한 남쪽 말이었다.

패왕도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십이궁주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그러나 제갈기호는 그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아니, 잠깐만요. 그럼 지금…….”

제갈기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운 서기님만 믿고 있는 거란 말입니까? 저쪽은 기마대가 오십이 넘는데요?”

십이궁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제갈기호를 돌아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말했잖아요. 귀 안 들려요?”

‘이 씨앙…….’

욕이 나오려는 걸 제갈기호는 간신히 참았다.

동시에 삼궁주에 대한 의혹이 더욱 커졌다.

혹시 삼궁주가 정말로 자신들을 팔아넘긴 건 아닐까?

권력 쟁탈전에서 혈육의 정 따위는 왕왕 무시된 역사를 생각하면 더더욱 불안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아!”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십이궁주가 환하게 웃었다.

제갈기호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십이궁주가 웃었던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운 서기님!”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제갈기호는 그만 목소리까지 떨렸다.

“제갈 공자님.”

걸어오던 운현이 제갈기호를 향해 웃었다.

“십이궁주님, 그리고 독고 제.”

티 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손을 들어 보였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그건 마치 산책하다 우연히 만난 것 같은 편안한 인사였다.

오십여 기마대의 흉흉한 눈빛도, 전대 장로들의 놀란 표정도 운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요?”

운현이 물었다.

그 말에 제갈기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이자들이…….”

제갈기호가 전대 장로들을, 그리고 기마대를 흘깃 바라보았다.

설명은 필요없었다.

전대 장로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고, 오십여 기마대는 놀라움과 경계 그리고 적의가 뒤섞인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특히 전대 장로들의 놀라움은 컸다.

‘여기까지 오도록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운현은 검성의 후계자다.

그가 남다른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전대 장로들은 물론 패왕도 바얀투까지도 말이다.

그들은 낭패와 경악을 숨길 수 없었다.

그만큼 운현의 접근은 너무나 의외였다.

마치 걸어온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슥.

운현은 고개를 돌려 패왕도와 그의 오십여 기마대를 보았다.

“누구십니까?”

패왕도 바얀투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는데 십이궁주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푸른 늑대께서 그대들이 누구냐고 묻고 계세요.”

십이궁주의 표정은 사뭇 자랑스러웠다.

“대답하세요.”

눈을 빛내며 십이궁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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