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패왕도 바얀투
북해 빙궁.
사절단 정사인 제갈기호는 운현의 방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홀짝.
북해의 풍광을 즐기던 제갈기호는 찻잔을 놓으며 슬쩍 독고랑의 눈치를 살폈다.
독고랑은 말없이 팔짱을 끼고 서 있을 뿐, 의자에 앉지도 차를 마시지도 않았다.
제갈기호와 잡담을 나누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지만 그래도 제갈기호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에 독고랑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운 서기도 그렇지. 말도 없이 혼자서 연공실인지 뭔지로 가 버리면 나는 어쩌라는 거야?’
제갈기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곳은 적지 한가운데다.
무림맹의 사절단이라는 이유만으로 북해 남자들로부터 살벌한 위협을 느끼던 제갈기호로서는 운현의 방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검기발현의 절정고수인 독고랑의 곁보다 안전한 곳은 없을 테니까.
물론 그 위협은 제갈기호가 시녀들과 지속적인 친목 도모를 시도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제갈기호가 다시 차를 홀짝일 때였다.
탁탁탁.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제갈기호는 고개를 들었다.
독고랑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무례에 제갈기호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저기요!”
제갈기호는 깜짝 놀랐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여인이 바로 십이궁주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귀여운 얼굴의 그녀는 제갈기호와 독고랑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섰다.
“다들 빨리……. 뭐하는 거예요? 짐 챙겨요?”
무언가 말하던 십이궁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건 제갈기호가 할 말이었지만 그녀가 그리 말한 것도 당연했다.
제갈기호가 자신의 짐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거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제갈기호는 짐을 놓았다.
사실 검을 꺼내려던 것이었는데 깜짝 놀라는 바람에 짐을 끌어안아 버린 것이다.
“크흠, 그런데 십이궁주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제갈기호가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십이궁주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예요. 서기 오빠 위험해요.”
“네? 아니, 그게 무슨…….”
“무슨 일이오?”
제갈기호의 말을 독고랑이 끊었다.
십이궁주는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가 전했어요. 서기 오빠 위험해요. 빨리 가야…….”
저벅.
십이궁주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독고랑이 이미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아, 같이 가요! 당신 어딘지도 몰라요예요!”
십이궁주가 급히 독고랑을 뒤따르며 외쳤다.
사실 길을 아는 건 그녀뿐이니 그 말이 옳았다.
하지만 독고랑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제갈기호는 더욱 당황했다.
“어? 잠깐만요. 나도 같이 가야…….”
제갈기호는 그렇게 외치며 짐에서 무언가 꺼내려다가 곧 포기했다.
독고랑과 십이궁주가 이미 방 밖으로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에이!”
짐을 전부 들고 제갈기호는 급히 일어섰다.
그리고 다급한 걸음으로 멀어진 두 사람을 뒤따랐다.
“같이 가자고요!”
탁탁탁.
가장 빠른 독고랑과 그 뒤를 쫓는 십이궁주, 그리고 짐을 끌어안고 뒤따르는 제갈기호의 발소리가 고요한 빙궁 복도를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
십이궁주와 독고랑, 제갈기호는 곧장 빙궁을 나와 말을 탔다.
걸음은 독고랑이 빨랐지만 말을 타자 사정이 달라졌다.
십이궁주는 보기보다 매우 말에 능숙해서 여유 있게 독고랑을 앞질렀다.
제갈세가의 자제로 어려서부터 말을 탄 제갈기호조차 그녀의 기마술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따가닥, 따가닥.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십이궁주가 말을 세웠다.
휘릭.
옷자락을 휘날리며 십이궁주가 내려서고 제갈기호와 독고랑도 말을 멈췄다.
“워, 워.”
말이 멈춰서자 제갈기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그저 돌무덤들 뿐이었다.
푸른 나무는커녕 풀조차 보이지 않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경치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제갈기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십이궁주님, 여기 맞습니까? 아무것도 없…….”
슥.
문득 독고랑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제갈기호는 하던 말을 멈췄다.
어느새 노인들이 십이궁주 앞에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나.
“멈추시게.”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십이궁주에게 말했다.
제갈기호는 긴장했다.
노인들의 기세가 사뭇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독고랑 역시 검 손잡이에 얹은 손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십이궁주께서는 이곳이 금지임을 모르시는가?”
노인의 말에 십이궁주가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답니다.”
십이궁주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세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대 장로에 대한 예였다.
“저는 다만 푸른 늑대를 마중하기 위해 왔을 뿐, 감히 이곳을 침범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낭랑한 목소리로 십이궁주가 말했다.
“아니면, 제가 여기 있어서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뒤에 서 있던 노인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십이궁주께 우리를 모욕할 권한은 없소이다.”
신경질적인 반응이었지만 십이궁주는 오히려 빙긋 웃었다.
“설마요, 제가 어찌 감히 전대 장로님을 모욕할 수 있겠어요? 그저 단순한 질문에 이리도 날 선 반응을 보이시니 오히려 저야말로 당혹스럽네요.”
‘오오.’
그 모습에 제갈기호는 내심 감탄했다.
북해의 언어는 모르지만 십이궁주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평소 이상한 어법 탓에 살짝 멍청해 보이던 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운 서기가 위험하다는 것 아니었나? 설마 여기가 그 연공실인지 뭔지가 있는 곳인가?’
제갈기호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
묵직한 소리가 멀리서 울려 오기 시작했다.
‘어?’
처음에 그것은 멀리서 울리는 나지막한 천둥소리 같았다.
그러나 제갈기호는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멀리서 다가오는 기마대의 소리였다.
‘헉.’
제갈기호의 안색이 단번에 변했다.
독고랑은 물론 십이궁주도 그 모습을 보았다.
두두두두.
솟구친 창날이 멀리서도 햇빛에 반짝였다.
완전무장한 기마대는 기를 올린 채 당당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수십에 이르는 숫자였다.
“이리 와서 옆에 서요.”
십이궁주의 낭랑한 목소리가 제갈기호의 귓가에 울렸다.
“네?”
제갈기호가 반문하자 십이궁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옆이 아니라 앞인가? 나 틀렸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갈기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저 기마대가 안 보입니까? 빨리 이곳을 피해야지요!”
“피하지 않아요.”
단호한 목소리로 십이궁주가 말했다.
“우리는 이 자리를 지키려고 여기 온 거예요.”
말하는 십이궁주가 눈동자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독고랑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제갈기호는 인상을 구겼지만 십이궁주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전대 장로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실 건가요? 이곳은 금지이니 들어올 수 없다고?”
그녀의 눈빛엔 조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들이 기마대와 내통했음을 십이궁주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전대 장로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북해의 율법은.”
굳은 표정으로 한 노인이 말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소.”
“그 말씀을 들으니 매우 안심이 되네요.”
가볍게 예를 표하며 십이궁주는 말했다.
전대 장로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지만 십이궁주는 상관않고 몸을 돌렸다.
두두두두두.
대지를 박차는 강인한 북해의 말들과, 갑주를 입고 창검을 든 수십의 기마대가 그들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십이궁주와 독고랑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제갈기호만이 한숨을 내쉬며 들고 온 짐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푸르릉.
강인한 북해의 말이 더운 숨을 내뿜었다.
수십의 기마대는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가장 선두에 선 패왕도 바얀투는 말 위에서 고삐를 쥔 채 십이궁주와 남쪽에서 온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패왕도는 제갈기호에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독고랑에게선 눈을 떼지 못했다.
날 선 한 자루의 검 같은 독고랑의 기세가 패왕도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검성의 후계자와 함께 온 무림맹의 무인들입니다.”
패왕도 뒤에 있던 용사 에센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옆에는 잔뜩 흥분해 있는 쿠툴라와 냉담한 표정의 카불이 함께하고 있었다.
“특히 저자는…….”
에센이 독고랑에 대해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소궁주에 대한 예는 잊으셨나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에 패왕도는 고개를 돌렸다.
십이궁주가 패왕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패왕도 바얀투 장군.”
패왕도는 십이궁주를 짐짓 내려다보며 말했다.
“십이궁주께서 내게 예를 요구할 자격이 된다 생각하시는가?”
십이궁주는 아직 젊고 소궁주들 중에 가장 지위가 낮다.
반면 패왕도 바얀투는 수많은 싸움터를 거쳐 온 용사이자 부족의 장로였다.
패왕도 앞에 선 십이궁주가 유난히 작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십이궁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빙궁의 소궁주인 것은 북해의 율법이 정한 것입니다.”
십이궁주는 패왕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패왕도의 기세는 십이궁주로서는 감히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그녀는 결코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장군께서도 북해의 율법을 따라 제게 예를 표하세요.”
사뭇 도도한 표정으로 십이궁주가 말했다.
패왕도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리고 잠시후, 패왕도가 말에서 내렸다.
저벅.
쿠툴라와 에센, 카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패왕도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소궁주께.”
묵직한 목소리로 패왕도가 말했다.
“패왕도 바얀투가 예를 올리오.”
“감사해요.”
십이궁주 역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십이궁주가 패왕도 바얀투 장군을 뵈어요.”
제법 거리를 두고 선 두 사람이 예를 나누었다.
그러나 팽팽한 긴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슥.
패왕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십이궁주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십이궁주께서는 잠시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어떠시오?”
패왕도가 말했다.
그것은 그의 호의였다.
그러나 십이궁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오히려 궁금하군요. 천하의 패왕도께서 한낱 십이궁주의 눈을 피하시려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피하려는 것이 아니오.”
십이궁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패왕도가 말했다.
“다만 십이궁주의 안위를 생각해서 드린 제안일 뿐이오.”
“고맙군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십이궁주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 있겠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미소를 짓는 그녀의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십이궁주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패왕도 바얀투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 버티고 선 독고랑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도.
‘음.’
문제는 없었다.
기개 있는 젊은이들을 적대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울 뿐, 그것이 다였다.
패왕도는 이번 일의 결과를 의심치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십이궁주가 제갈기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물러나지 말아요. 우리 여기 있으면 저들은 못 움직여요. 여기 금지이고, 나 소궁주니까요.”
그녀의 눈빛은 단호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