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97화 (197/530)
  • 197화. 만년빙정

    운현은 살짝 몸을 떨었다.

    연공실이라더니 마치 맹수라도 튀어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동굴 안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야명주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빙궁 지척에 이런 지하 동굴이라니.’

    운현은 고개를 내밀어 동굴 안쪽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야명주만이 아니라 돌계단도 있었다.

    제대로 다듬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계단으로 보이는 구조물이 아랫쪽으로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우우웅.

    ‘윽.’

    문득 들리는 소리에 운현은 오싹함을 느꼈다.

    아마도 동굴 안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탓이겠지만,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돌문을 닫고 돌아서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후우.”

    운현은 심호흡을 했다.

    이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낙일검의 비밀은 영원히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소궁주나 독고랑에게는 무어라 말하랴?

    운현은 결심했다.

    그리고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후욱.

    차가운 바람이 운현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오싹함을 느끼며 운현은 안쪽으로 들어섰다.

    사박, 사박.

    한 걸음을 내딛고 나니 다음은 쉬웠다.

    운현은 조심스럽게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왔을까?

    ‘생각보다 밝은데?’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운현은 동굴 안이 생각보다 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명주의 불빛은 가파른 돌계단을 분명히 비춰 주었다.

    오히려 동굴 벽에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에 운현이 가끔 놀랄 정도였다.

    차가운 바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오싹하던 한기도 이제는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다만 숨 쉴 때마다 흐릿하게 입김이 보이는 것을 보면 여전히 차가운 것은 분명했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가 끝이야?’

    한참을 내려왔는데도 아직 돌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운현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들어왔던 입구는 이미 보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돌계단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쪽 방향이 아니라 때로은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꺾여 있기도 했다.

    아래를 쳐다보아도 점점이 박힌 야명주가 그리는 빛의 곡선이 보일 뿐, 끝이 가까워진 느낌은 어디에도 없다.

    ‘설마 이대로 끝없이 내려가는 건 아니겠지?’

    막연한 두려움이 운현을 엄습했다.

    이러다 바닥이 없다는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지.’

    이곳은 역대 빙제의 연공실이다.

    들어오고 나간 사람이 있으니 분명히 바닥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아.’

    문득 운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나올 때도 똑같이 걸어 올라와야 하는 거잖아?’

    내려간 만큼 올라와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운현은 갑자기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

    한숨을 쉬어 보지만 어차피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빨리 가자. 그래야 빨리 오지.”

    저 멀리 이어지는 야명주의 불빛과 가파른 돌계단을 보며 운현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저벅, 저벅.

    그렇게 운현이 마음을 비우고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 지도 한참.

    이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던 운현은 문득 무언가 바뀐 것을 깨달았다.

    ‘어?’

    계단의 경사가 완만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좌우로 휘어지던 통로도 이제는 거의 직선으로 변해 있었다.

    ‘드디어 다 온 건가?’

    마지막 계단을 내려설 때는 운현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통로를 조금 걷자 곧 또 다른 돌문이 운현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운현은 돌문에 가까이 다가섰다.

    ‘오호라.’

    그 돌문을 보고 운현은 입구에 있던 돌 문양이 어디서 왔는지 알았다.

    바로 여기 이곳의 문양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운현은 아까 잡았던 것과 같은 조각을 쥐었다.

    ‘윽.’

    돌문은 매우 차가웠다.

    입구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운현은 꾹 참고 힘을 주어 옆으로 밀었다.

    그러나 돌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라?’

    운현은 조금 당황했다.

    ‘이게 아닌가?’

    혹시나 싶어서 운현은 당겼다.

    그래도 꿈쩍도 않는다.

    ‘아니, 이러면 어떻게…….’

    운현이 당황하던 바로 그때였다.

    슥.

    돌문이 안쪽으로 살짝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싸늘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운현이 깜짝 놀라던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운현의 내기가 움직이는 듯싶더니 단번에 차가운 느낌이 사라졌다.

    조금 전 느꼈던 한기가 거짓말 같을 정도였다.

    ‘어?’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보이는 하얀 입김도 여전했다.

    ‘아하, 내공이 쌓이면 추위나 더위의 해를 받지 않는다더니…….’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력이 강한 고수는 추운 곳에서도, 열사의 사막에서도 능히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어느새 자신이 그런 정도가 되었나 싶어 운현은 내심 뿌듯했다.

    동시에 왜 지금까지 내력을 운용할 생각을 못 했나 한심하기도 했다.

    “후우우.”

    운현은 아예 본격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력을 운용하자 확실히 추위가 가셨다.

    운현은 반쯤 열린 돌문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차가운 느낌도 아까보다 훨씬 덜했다.

    스륵.

    가볍게 밀자 돌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운현의 시야에 쏟아져 들어왔다.

    “오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다.

    지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높고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전각 하나 둘 정도는 들어서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운현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공동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무엇인가였다.

    마치 거대한 수정 같은 형상의 그것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이 만년빙정이로구나.’

    처음 보는 것이지만 운현은 확신했다.

    이 거대한 푸른 수정 같은 것이 바로 북해의 만년빙정, 빙혼이다.

    저벅.

    운현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 공동은 생각보다 더 크고 넓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이 천장과 벽 사방에 가득하다.

    덕분에 야명주가 없어도 주변이 제법 잘 보였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 작은 것들도 빙정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운현은 다시 만년빙정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만년빙정의 모습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기이하고 경외로운 신물.

    빙제가 말했던 그 표현에 운현은 공감했다.

    이 모습 앞에 그 누가 놀라지 않으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야말로 초월적인 신비라 할 만했다.

    ‘대단하네.’

    운현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거대한 수정 같은 모습의 만년빙정은 마치 천장에 거꾸로 박힌 것처럼 아래로 내려오며 점차 뾰족해졌다.

    그 뾰족한 부분이 마침 사람 눈 높이 정도에 위치해서, 언뜻 보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도 들 정도였다.

    ‘정말 대단해.’

    운현은 혀를 내둘렀다.

    가까이서 보니 만년빙정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거대한 것이 지하 깊은 곳에 있는 거지?’

    과연 태고로부터 북해를 지켜 온 신물이라 여겨질 만했다.

    빙궁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만년빈정의 모습 앞에 운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다가 이게 전부가 아닐 테니.’

    눈앞의 모습이 만년빙정의 전부가 아니다.

    천장 속에 숨겨진 부분까지 생각하면 그 크기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바로 그때였다.

    웅.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두 자루의 검, 미명과 목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어느 검도 울고 있지는 않았다.

    ‘어?’

    운현이 의아하게 생각하던 때였다.

    우웅.

    순간 운현의 마음속에 한 자루의 검이 그 선명한 심상을 드러냈다.

    운현은 경악했다.

    그 검의 모습은 바로 빛 속으로 사라졌던 낙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익숙한 목검도, 늘 떠올리던 자신의 검도 아니었다.

    새로운 검 미명은 더더욱 아니었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낙일의 형상이 운현의 마음 한가운데 또렷하게 나타난 것이다.

    마치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웅.

    나지막한 검명은 바로 그 낙일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운현의 놀라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웅.

    귓가에 들리는 묵직한 울림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거대한 만년빙정이 푸른 빛을 발하며 나지막이 울음을 흘리고 있는 것을.

    ‘……맙소사.’

    운현은 경악했다.

    우웅, 우우웅.

    눈앞의 모습을 운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만년빙정이 울고 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는데, 낙일의 검명에 동조하듯 만년빙정은 묵직한 소리를 흘려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년빙정의 희미한 푸른 빛마저 그 울림을 따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심상에 불과한 낙일과 거대한 만년빙정이 공명하고 있는 것이다.

    쿵.

    ‘윽.’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쿠웅, 쿠우웅.

    묵직하던 울림은 어느새 지하 공동 가득 울려 펴지고 있었다.

    심지어 심상일 뿐인 낙일의 검명마저 그랬다.

    귀가 멀 듯한, 아니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소리가 안과 밖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쿠우우웅.

    “크으윽.”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운현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온몸을, 아니 존재 그 자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소리에 묻혀 당장이라도 의식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 이게 무슨…….’

    무슨 상황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힘을 다스리게.

    의형 일충현의 부드러운 음성이 운현의 가슴속에 퍼져 나갔다.

    ―그리하지 못하면 힘이 자네를 다스리게 될 터이니.

    늙은 와불 선사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럼 결국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게다. 아니면 잡아먹히거나. 클클클.

    ‘아!’

    운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즉시 깨달았다.

    이를 악물고 운현은 귀에서 손을 거두었다.

    가능하면 호흡을 가다듬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이미 없었다.

    쿵, 쿠우웅.

    온몸이 터져 나갈 것 같은 소리 속에서 운현은 손을 내밀었다.

    앞에 무엇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운현이 손을 뻗은 대상은 바로 낙일이었다.

    빛을 뿜으며 도도하게 서 있는 심상의 검, 낙일을 향해 운현은 손을 뻗었다.

    사락.

    낙일검이 운현의 손에 쥐어졌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쉬익.

    자신도 모르게 운현은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운현이 설령 꿈에서라도 재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검법, 바로 백호수련검이었다.

    쿠우우웅, 쿵.

    거대한 울림이 지하 공동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운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았다.

    후웅.

    다만 빛나는 낙일이 그려 내는 백호수련검의 검로만이 도도하게 운현의 손끝에서 펼쳐지고 있을 뿐이었다.

    콰과과과곽.

    이제 만년빙정은 엄청난 빛과 함께 거대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눈이 멀 듯 강렬한 빛과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것 같은 거대한 기운이 지하 공동에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운현의 검무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낙일은 본래 그러했던 것처럼 만년빙정과 공명하며 그 거대한 흐름을 따라 검로를 이어 가고 있었다.

    후우우우.

    도도히 흐르는 검로 속에서 운현은 모든 것을 잊었다.

    아니,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지하 공동을 휘몰아지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운현의 검무는 영원을 흐르는 꿈처럼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후우욱.

    운현의 눈앞에 낯선 환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현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러나 더없이 경이롭고 지극히 놀라운 검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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