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빙제의 연공실
북해 빙궁, 빙제의 처소.
침상에 걸터앉은 빙제는 굵은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역대 빙제의 연공실? 만년빙정이 있는 곳 말이오?”
“네.”
운현은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음.”
빙제는 잠시 수염을 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네?”
그 대답에 오히려 운현이 놀랐다.
역대 빙제의 연공실에 들어가고 싶다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요청에 너무나 가볍게 대답이 나온 탓이다.
내심 긴장하던 것이 그만 맥이 빠질 정도로 말이다.
“정말 괜찮습니까?”
“괜찮소.”
빙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그곳은 빙혼이 있을 뿐인 텅 빈 공간이니까. 신비스러운 곳이기는 하지만 그저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실제 연공실로 사용되는 장소는 따로 있다오. 아, 빙혼은 그 만년빙정의 이름이오.”
‘아, 상징적인…….’
운현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예상과 달리 빙제의 연공실은 기이한 영약이나 비급이 있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빙제가 순순히 허락한 것도 납득이 간다.
‘그러고 보니 빙혼이 그런 유래를 가진 이름이었군.’
만년빙정은 북해를 지켜 온 신물이라고 소궁주가 말하더니, 아마 그래서 호위를 빙혼이라 칭하는 듯했다.
“빙혼은 참으로 기이하고 경외로운 신물이오. 지금도 빙혼을 처음 본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을 정도니까.”
빙제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허나 그리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이오.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기이하고 경외롭기까지 한 신물인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니?
운현은 의아한 눈빛을 했다.
빙제는 웃으며 말했다.
“본래 모든 신물이 그러한 것 아니겠소? 초월적인 신비로움과 놀라운 경외로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운현은 빙제의 말에 동의했다.
초월적인 정통성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왕조들이 신화와 전설에 기대고 있는가?
그러니 만년빙정이 북해에서 가지는 중요성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그러니 그곳에 드는 것을 가벼이 여기지는 마시오. 당신이 푸른 늑대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어떤 의미로는 빙궁의 비고를 보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가시겠소?”
“지금이라도 좋습니다.”
주저하거나 미룰 이유는 없었다.
독고랑에게도 이미 혼자 다녀오겠다고 말을 해 놓은 다음이다.
“그렇소?”
빙제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침상 옆 탁자에 놓인 작은 종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시비가 들어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빙제가 북해의 말로 시녀에게 무언가 명하자 시녀는 공손히 예를 올린 후 물러갔다.
“나가면 말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오. 그리 멀지는 않지만 걸어가기엔 조금 거리가 있으니까. 저 시녀를 따라가면 되오.”
빙제의 연공실은 아마도 빙궁 외부에 있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운현이 예를 표하자 빙제 역시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아, 참.”
빙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가면 전대 장로들이 지키고 있을 거요. 북해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여생을 건 괴팍한 노인네들이지. 혹시 무어라 하거든 낙일을 보여 주도록 하시오. 아마 기뻐할 거요.”
웃으며 빙제가 말했다.
“푸른 늑대가 그곳을 찾는다는 건 북해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뜻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운현은 대답했다.
푸른 늑대라는 이름이 어쩐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졌다.
***
운현은 말을 타고 시녀를 따라 빙제의 연공실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와 운현은 곧 연공실 부근에 도착했다.
따각.
앞서 가던 시녀가 말을 멈췄다.
운현 역시 그녀를 따라 말을 멈추고 내려섰다.
탁.
발밑에서 살짝 흙먼지가 일었다.
‘여기가?’
운현은 의아했다.
주변은 매우 황량하고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그럴듯한 사당이라도 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나무나 풀조차도 없었다.
보이는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돌무덤들 뿐이었다.
“이곳인가요?”
운현이 물었지만 시녀는 조용히 웃을 뿐이다.
그때였다.
“누구냐?”
메마른 목소리가 돌무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흰 수염에 백발이 가득한 세 사람의 노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시녀는 즉시 그 노인들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북해의 언어로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했다.
‘저분들이신가?’
운현은 노인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빛과 주름진 얼굴, 범상치 않은 기세는 그들이 바로 전대 장로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비록 위엄 가득한 옷이나 고풍스러운 장식은 없었지만 거친 북해를 살아가는 투박한 용사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마도 저것이 북해의 전통적인 모습이리라.
저벅.
그사이 세 노인 중 한 명이 운현에게 다가왔다.
“낙일을 보여 주시겠소?”
“낙일을 보여 주세요.”
시녀가 통역해 주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져온 낙일을 꺼냈다.
물론 검을 뽑지는 않았다.
뽑았다간 검신이 없는 것이 들킬 테니까.
“으음.”
낙일을 보는 노인, 전대 장로의 표정은 사뭇 굳어 있었다.
“안내하겠소. 따라오시오.”
시녀가 다시 그의 말을 통역하고 운현은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전대 장로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 전부였다.
저벅.
전대 장로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운현은 낙일을 갈무리하고 그를 뒤따랐다.
‘기뻐할 거라더니.’
빙제의 말을 떠올리며 운현은 내심 의아했다.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은데?’
노인들이라 감정 표현이 서투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들의 눈빛은 기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거나 역대 빙제의 연공실에 들어가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운현에겐 충분하다.
운현은 얌전히 전대 장로의 뒤를 따랐다.
저벅, 저벅.
두 사람이 돌무덤 사이로 사라지자 남아 있던 두 노인 중 한 명이 시녀에게 말했다.
“너는 이만 돌아가라.”
시녀는 공손히 예를 표하고는 말했다.
“빙제께서 기다리라 명하셨…….”
“네가.”
사뭇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인이 말했다.
“언제부터 내 말을 거역하게 되었더냐?”
이 노인 역시 전대 장로다.
그의 기세는 시녀가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그러나 시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명을 받았으니 물러날 수는 없어요.”
전대 장로가 빙제의 시녀를 압박하는 건 결코 보통 상황이 아니다.
아무리 상대가 성격 괴팍한 전대 장로라 하더라도 말이다.
“뭐라? 네가 정녕…….”
“그만하게.”
뒤에 서 있던 다른 노인이 나섰다.
그는 시녀에게 말했다.
“빙제께는 내가 말씀드리겠다. 그러니 너는 이만 돌아가도록 해라.”
전대 장로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시녀는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시녀는 예를 표한후 말에 올라 빙궁을 향해 떠났다.
따각, 따각.
멀어지는 시녀의 뒷모습을 보며 노인이 중얼거렸다.
“이제 빙제께서도 아시겠군. 우리가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한 일!”
옆에 서 있던 노인이 분노를 터트리며 말했다.
“어찌 저런 새파란 외지인에게 감히 푸른 늑대의 이름을 줄 수 있단 말이냐?”
듣고 있던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그는 검성의 후계자일세. 과거 검성이 북해에 왔을 때도 비슷한 나이였고.”
운현이 사라진 돌무덤 쪽을 바라보며 노인은 중얼거렸다.
“그때는 젊고 어리석었지. 우리 모두가 말일세.”
듣고 있던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자네는 그를 푸른 늑대로 인정하겠다는 말인가?”
“아니.”
단호한 어조로 노인이 말했다.
“푸른 늑대의 이름은 결코 정치적 목적으로 주어져서는 안 되네. 이 일은 빙제께서 분명 잘못 판단하신 것이야. 그러니 패왕도가 그에게 도전하는 것은 북해의 전통에 따른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다.”
“그럼, 그렇고말고.”
다른 노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바로 패왕도에게 알리겠네.”
패왕도 바얀투는 이미 그들에게 밝힌 바 있었다.
푸른 늑대의 이름을 받은 자를 자신이 직접 시험하겠다고 말이다.
“잠깐.”
막 떠나려는 그를 다른 노인이 멈춰 세웠다.
“패왕도에게 협력하는 것은 여기까지일세. 이제 와서 소궁주들의 세력 다툼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
“걱정 말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리 말하고 노인은 곧 몸을 날렸다.
전령이 근처에서 이미 대기하고 있으니 패왕도는 곧 이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후우.”
남아 있는 노인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하건만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본의 아니게 운현을, 검성의 후계이자 푸른 늑대의 이름을 받은 자를 속인 것에 기인할 것이다.
아니면 과거 검성에게 무참히 꺾여 버린 공포가 아직도 가슴 한편에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거나.
노인은 운현이 사라진 돌무덤 사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돌무덤은 아무런 말이 없고 그저 서늘한 북해의 바람만이 불고 있을 뿐이었다.
***
전대 장로를 따라간 운현이 도착한 곳은 오래된 석재 고분 같은 곳이었다.
거친 돌들을 쌓아 만든 그곳은 연공실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오래된 돌무덤 같았다.
게다가 커다란 돌문까지 버티고 서 있으니 아무리 봐도 연공실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입니까?”
운현이 물었다.
그러나 전대 장로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어, 저기…….”
운현이 감사를 표할 사이도 없이 전대 장로는 왔던 길로 사라졌다.
남은 사람은 운현뿐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운현은 고개를 돌려 돌문을 살펴보았다.
‘진짜 여기가 역대 빙제의 연공실인가?’
또한 북해의 만년빙정, 빙혼이 있는 곳이다.
‘어째 좀…….’
커다란 돌을 견고하게 쌓아 올린 고분은 제법 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안에 넓은 공간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한 상황은 하나뿐이다.
역대 빙제의 연공실은 지하에 있는 것이다.
‘후우.’
운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니 높이 솟은 빙궁이 사뭇 가까이 보였다.
북해의 해변을 따라 돌아와서 멀게 느껴졌지만 직선거리는 그보다 훨씬 가까운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문은 어떻게 열지?’
눈앞에 버티고 있는 커다란 돌문을 보며 운현은 잠시 고민했다.
돌문에는 처음보는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비바람에 닳아 제대로 식별할 수도 없었지만 적어도 오래된 것은 분명했다.
‘어디.’
일단 한번 만져나 보자 싶어서 손을 대려던 운현은 흠칫했다.
돌문은 마치 얼음인 양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슥.
운현은 문양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거, 열리긴 하려나?’
크기만 봐도 쉽게 움직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운현은 일단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
‘음. 우선은 이쪽 문으로 하고.’
좌우 돌문 중 하나를 택한 후 적당한 조각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힘을 주었다.
그르르르.
‘엇!’
뜻밖에도 돌문은 쉽게 열렸다.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돌문이 옆으로 비켜선다.
“허, 이거 신기하군.”
운현은 열린 돌문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문 안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후우우웅.
깊은 동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짐작했던 대로 아래로 가파르게 뚫린 그 동굴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돌문이 차가웠던 것은 아마 이 바람 때문인 듯했다.
‘제법 섬뜩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