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95화 (195/530)

195화. 별들의 바다

운현은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소궁주님은 어째서 제게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신 겁니까?”

“글쎄요? 어쩌면 죄책감을 덜고 싶었나 봐요. 아니면 어떤 사람처럼은 절대 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고요.”

말하는 그녀의 입가엔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운현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소궁주를 바라보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소궁주님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게 모든 것을 다 말해 주신 것입니다. 설령 제가 분노하더라도, 그것을 오직 홀로 감당하려고요.”

운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소궁주님의 선택을 믿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하니까요.”

문득 운현이 웃었다.

“아니면 그저 미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얄팍한 아첨일 수도 있겠지만요. 하하.”

그건 농담이었다.

하지만 소궁주는 웃지 않았다.

쏴아아아.

북해의 바람에 소궁주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운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요. 그렇군요.”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달콤한 말이네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깊은 울림을 담고 있었다.

덕분에 운현은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소궁주의 이런 반응은 상상도 못 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운현이 어쩔 줄 몰라 하던 바로 그때였다.

“빙제의 연공실에 들어가세요.”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곳에는 만년빙정이 있어요. 태고로부터 이 땅을 지키고 있다는 신물이지요. 그곳이라면 낙일검의 진짜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운현의 눈이 단번에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을 소궁주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 하지만 연공실이라면…….”

타인의 수련을 보는 것은 강호무림에서는 금기에 속한다.

북해 빙제의 연공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운현이 주저한 것도 당연했다.

“괜찮아요. 빙제께 청하면 아마 허락해 주실 거예요. 당신은 푸른 늑대니까요.”

어쩐지 타인의 비밀을 억지로 넘보는 것 같아 불편했지만 운현은 일단 빙제에게 말을 해 보기로 했다.

낙일의 검신이 사라진 것은 운현에겐 여전히 중요한 문제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지요.”

운현은 소궁주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 그리고 이 검 말입니다만.”

운현은 흘깃 시선을 내려 허리에 찬 미명검을 보았다.

“혹시 무슨 전설이나 사연 같은 것이 있는 검입니까?”

“전설이나 사연요?”

소궁주 역시 운현의 미명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무언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어딘가 독특한 느낌이 들어서요. 어쩐지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

생전 처음 보는 검에 친근감을 느낀다니, 자신이 말하고도 이상하다.

운현이 말끝을 흐리는데 소궁주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군요. 빙제께서 제게 주실때도 그저 대대로 빙궁에 전해 내려온 검이라고만 말씀하셨어요.”

“빙제께서 주신 검이라고요?”

운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 제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 받은 것이지요.”

“아니, 그런 소중한 것을…….”

운현은 당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빙제가 어린 소궁주에게 주었다면 그 의미가 어찌 작다 할 수 있으랴?

심지어 놀이용 검이었어도 소중한 것일 텐데 말이다.

“괜찮아요.”

소궁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게는 과분한 검이에요. 감히 푸른 늑대께 어울린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제 나름의 사죄이기도 해요.”

‘아.’

운현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녀에게 미명을 받은 것은 빙후가 운현의 정체를 폭로한 다음이다.

방심했다며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던 소궁주는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검을 운현에게 내어 준 것이다.

그녀 나름의 사죄이자 책임을 지는 방법으로 말이다.

“안 됩니다.”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아니, 받아 주세요.”

소궁주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검을 볼 때면 저를 생각해 주세요. 그것으로 저는 충분해요.”

그것은 결코 달콤한 속삭임이 아니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의 마지막 유언처럼 들렸다.

그래서 운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슥.

운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요?”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운현이 어둠 속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독고랑이었다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텐데, 운현은 이런 쪽으로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하…….”

“괜찮아요.”

소궁주가 조용히 말했다.

“저를 만나러 오시는 분일 테니까요.”

“……아, 그러시군요.”

운현은 내심 당혹했다.

그녀의 말에 크게 실망하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소궁주가 운현만 만나란 법은 없다.

하지만 이 순간이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어째서 이다지도 실망스러운 것일까?

저벅.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역시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표정이 좋지 못했다.

운현은 의아했다.

‘누구지?’

그는 강인한 인상의 젊은 청년이었다.

은실로 수를 놓은 화려한 옷을 입었고, 걸음 하나에도 고귀함이 넘쳐 흘렀다.

슥.

먼저 예를 표한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다.

“검성의 후계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창한 남쪽 언어로 그가 말했다.

대단히 예의 바른 태도였지만 그의 눈빛은 도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는 빙궁의 일궁주입니다.”

‘일궁주!’

운현은 그제야 그를 기억해 냈다.

분명 연회에 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일궁주라면, 황궁으로 치면 사실상 태자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운현입니다.”

운현도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하지만 일궁주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왔다.

운현 역시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삼궁주와 정치적 경쟁 관계인가 보군.’

그렇다면 그가 운현을 불편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일궁주는 불편해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삼궁주와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운현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 자리의 주인은 일궁주가 아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오누이 사이라 해도, 어쩌면 배다른 오누이일 수도 있지만, 손님인 운현에게 대놓고 할 말은 아니다.

명백히 감정이 담긴 축객령이었다.

슥.

운현은 소궁주를 돌아보았다.

“괜찮겠습니까?”

어쩐지 두 사람만 놔두기가 불안한 운현이 물었다.

만일 소궁주가 원한다면 억지로라도 머물러 있을 셈이었다.

그러나 소궁주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괜찮아요.”

운현은 내심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일궁주의 표정에 득의의 미소가 피어오르는 순간, 소궁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이 제 이름을 기억하는 한, 저는 괜찮을 거예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운현은 몰랐다.

그러나 그 순간 일궁주의 잘생긴 얼굴은 무참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비록 운현은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제 가세요.”

“……알겠습니다.”

소궁주까지 그리 말하니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명분은 없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소궁주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섰다.

저벅.

운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소궁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궁주 역시 운현이 사라진 방향을 말없이 노려보고 서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따라랑.

부드러운 비파 소리에 일궁주는 고개를 돌렸다.

바위 위에 앉은 삼궁주가 북해를 바라보며 비파를 탄주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여 주려고.”

일궁주가 내뱉듯 말을 이었다.

“나를 부른 것이었더냐?”

“글쎄요?”

삼궁주는 여전히 북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상관없다는 말투였지만 일궁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영리한 삼궁주가 아무런 생각 없이 이 일을 벌였을 리가 없다.

일궁주는 이를 악물었다.

“너는, 결국 빙후의 자리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구나.”

따라라랑.

부드러운 음률이 흘러나왔다.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채 삼궁주가 말했다.

“빙후요? 빙제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목숨을 빼앗길 수 있는 자리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내 빙후는 오직 너뿐이리라고 약속한다 해도?”

“후후.”

작은 웃음소리가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건 오라버니가 여동생에게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삼궁주와 일궁주의 어머니는 다르다.

빙제에게 오직 빙후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배다른 오누이 사이다.

“하!”

일궁주는 조소를 흘렸다.

“네가 아바마마의 친딸이 아니라는 건 너도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

그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빙궁에 떠돌고 있었다.

삼궁주가 빙제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린 그녀 역시 그 소문으로 인해 얼마나 울고 방황했던가?

“그런가요?”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삼궁주는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런 헛소문을 진심으로 믿을 만큼 바보는 아니라서요.”

모든 소문이 그렇듯 증거는 없다.

오히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삼궁주를 임신할 당시에 빙후는 빙궁 밖으로 나간 적조차 없다.

하지만 소문은 여전히 살아서 유령처럼 빙궁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빙후시라면 다르지.”

일궁주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분은 북해, 아니 온 천하를 속일 수 있는 여인이니까.”

일찍이 검성과 빙제의 화해를 주선하고 북해의 피바람을 잠재운 여인.

북해제일지이자 빙궁의 빙후이며, 때로는 빙제마저 뜻대로 움직인다고 말해지는 숨은 실세.

그래서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증거가 없듯이 아니라고 증명할 방법도 없으니까.

“설령 그렇다 해도 제게 아바마마는 오직 빙제님뿐이에요.”

어린 그녀에게 유일한 믿음을 준 사람은 오히려 빙제였다.

빙제는 단 한 번도 의심의 말을 하지 않았고,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녀에게 소궁주의 위를 내렸다.

그것이야말로 삼궁주를 지탱해 준 유일한 위안이었다.

비록 어머니인 빙후에 의해 시시때때로 흔들리긴 했어도 말이다.

“그러니 아쉽게도 저는 오라버니의 빙후가 될 수는 없겠네요.”

따라라랑.

그녀의 마음을 말해 주듯, 흔들림 없는 비파의 선율이 북해의 밤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너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일궁주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삼궁주의 입가에 조소가 피어올랐다.

“마치 절 죽이시기라도 할 것 같은 말씀이네요. 오라버니.”

“글쎄?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일궁주는 말했다.

“네 이름을 아는 자가 내가 아니라면, 그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으득.

일궁주는 이를 갈았다.

“자신이 선택한 자의 죽음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너의 운명이다.”

“후후.”

삼궁주는 웃었다.

따랑.

비파의 음률이 멈췄다.

일궁주를 돌아보며 삼궁주는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저 역시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지요. 제가 선택한, 제 이름을 아는 그분과 함께 말예요.”

삼궁주의 눈빛은 서늘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단 한 조각의 온기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쏴아아.

북해의 밤바람에 삼궁주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오늘은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군요.”

삼궁주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북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푸른 달빛 아래 반짝이는 광대한 북해는 마치 끝없이 펼쳐진 별들의 바다 같았다.

“혼자 있고 싶으니 돌아가세요.”

그것은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대답도 듣기 전에 삼궁주는 이미 비파의 현에 손을 얹고 있었다.

따라랑.

은빛 가조각이 그녀의 손끝에서 아름답게 반짝였다.

“나를 화나게 하려 한 것이라면.”

일궁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불길처럼 어둠 속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너는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지나칠 정도로.”

그러나 삼궁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궁주는 몸을 돌렸다.

쏴아아.

밤바람 사이로 북해의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삼궁주의 비파가 음률을 흘렸다.

그러나 일궁주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저벅, 저벅.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일궁주의 얼굴은 무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