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한밤의 초청
독고랑을 향해 한번 웃어 주고 운현은 시녀에게 말했다.
“가시지요.”
시녀는 마치 알아들은 것처럼 미소를 짓고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운현은 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시녀는 운현을 제법 복잡한 곳으로 안내했다.
복잡한 빙궁의 복도와 계단을 오르내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운현이 시녀를 따라 막 복도를 벗어난 순간이었다.
찰싹, 찰싹.
짙은 물 내음이 코끝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물살이 부서지는 소리가 서늘한 밤공기 속으로 은은히 들려왔다.
밖으로 나온 것이다.
“여기는 어디지요?”
운현이 시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녀는 대답 대신 정중히 예를 표해 보이고는 뒤로 돌아 총총히 걸어가 버렸다.
자신이 할 일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런.”
갑자기 안내자를 잃어버린 운현은 난감한 심정이 되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운현이 서 있는 곳은 작은 정원이었다.
빙궁의 뒷쪽, 자그마한 비밀의 정원 같은 그곳에 드넓은 북해의 밤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찰싹.
‘아.’
운현은 잠시 모든 것을 잊고 감탄했다.
푸른 달빛 아래 부서지는 북해의 밤물결이 마치 무수한 보석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빙궁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북해의 밤 풍경은 숙소에서도 익히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 감동의 크기가 남달랐다.
차가운 밤바람과 나지막한 물소리 역시 북해의 정취를 더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을 부른 소궁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북해의 밤 풍경에 취해 있던 운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따라랑.
물소리 사이로 들려온 그 작은 음률은 분명 비파였다.
운현은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계단이 있네?’
나무 사이로 가린 곳에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돌계단이 있었다.
자연석을 이용해서 만든, 작지만 제법 정취가 느껴지는 계단이었다.
운현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따랑, 따라랑.
비파 소리를 따라 조금 긴 계단을 내려가자 운현의 눈앞에 북해가 펼쳐졌다.
어느새 물가로 내려온 것이다.
찰싹, 찰싹.
북해의 밤물결을 잠시 바라보던 운현은 비파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물가를 따라 걷던 운현은 큰 바위 위에 앉은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파의 음률은 바로 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라라랑.
그녀는 짐작대로 소궁주였다.
화려한 옷 대신 수수한 백의를 입은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밤바람에 일렁이며 바위 위에 앉아 북해를 바라보며 작은 비파를 연주하고 있었다.
‘소궁주.’
운현은 순간 숨이 막혔다.
반쯤 감은 단아한 속눈썹과 푸르게 반짝이는 콧날, 그리고 달빛이 부서지는 붉은 입술.
소궁주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따라랑.
그녀의 손끝에서 은빛 가조각이 빛나고 매혹적인 선율이 흘러나왔다.
차가운 밤바람마저 그녀의 음률에 취한 듯 부드럽게 그녀를 휘감고 지났다.
전설에 나오는 북해의 여신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쏴아아아.
차가운 북해의 바람이 운현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러나 운현은 춥지 않았다.
푸른 달빛 아래 북해의 파도 소리와 차가운 밤바람 그리고 그녀의 비파가 운현을 감싸 안고 있었다.
마치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꿈처럼.
따랑.
그러나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비파는 결국 멈추고 말았다.
운현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비파를 품에 안은 소궁주가 어느새 운현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기다리게 해 드렸군요.”
“아닙니다.”
운현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제가 방해가 된 것 같습니다.”
소궁주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소궁주의 머리카락을 흩날렸지만 소궁주는 그저 조용히 북해를 바라볼 뿐이었다.
끝 없는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아름답고도 처연한 눈빛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이곳은.”
소궁주가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운현은 무작정 말을 이었다.
어쩌면 소궁주가 그대로 북해로 사라질 것만 같아서였다.
“저기, 그러니까, 자주 오시는 곳입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눈을 반짝이며 소궁주가 묻는다.
역시 이전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기 있는 반응이다.
“그게…….”
운현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자신을 향한 소궁주의 모습이, 제갈기호의 표현을 빌자면 그야말로 바라보기가 황송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운현은 여인에 대해, 특히 소궁주 같은 미녀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지금처럼 편안한 표정은 처음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런가요?”
운현의 대답은 어쩐지 그녀의 마음에 든 듯했다.
달빛 아래 부서지는 북해의 파도를 바라보며 소궁주는 나지막이 말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촤아아, 철썩.
“전 혼자 이곳을 찾아오곤 했어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가볍게 매만지며 소궁주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북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리 힘든 일도, 슬프고 괴로운 일도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거든요.”
사락.
소궁주는 품에 안은 작은 비파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이 비파를 켜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곤 했지요.”
그 비파는 운현에게도 익숙했다.
십이궁주가 지니고 있던, 본래 소궁주의 것이라던 바로 그 비파였다.
소궁주는 운현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그렇게 보였나 봐요.”
말하는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슬퍼 보이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북해 빙궁의 소궁주라는, 고귀한 신분의 그녀가 어린 나이에 홀로 쓸쓸히 마음을 달래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운현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마도 그건 결코 평범한 이유는 아니리라.
운현은 문득 가슴이 아팠다.
작은 비파 하나만이 유일한 친구인 어린 여자아이가 북해를 바라보며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고아가 되어 버린 어린 자신이, 모두가 돌아간 서원에서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운 학사님은.”
문득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운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언제나 진실 되게 저를 대해 주셨지요. 북해 사람이라고 편견을 갖지도 않았고, 탐욕스러운 눈으로 저를 본 적도 없었어요.”
운현은 조금 양심이 찔렸다.
탐욕은 잘 모르겠지만 넋을 잃고 바라본 적은 확실히 있었다.
“하지만 저는.”
비파를 두 팔로 감싸 안으며 소궁주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아주 많은 거짓말을 해요. 때로는 작고, 혹은 커다란, 그러나 어느 것이나 아주 치명적인 것들을요.”
운현은 의아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운현은 단언했다.
“후후.”
하지만 소궁주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데 꼭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랍니다. 침묵으로도 얼마든지 상대를 속일 수 있지요.”
소궁주의 눈빛이 도발적으로 반짝였다.
“예를 들어 운 학사님은 빙제께서 암습을 당하셨다는 것도, 그리고 자신이 빙제님의 호위가 될 줄도 전혀 알지 못하셨지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어요.”
사락.
“하지만 말하지 않았지요. 그건…….”
“괜찮습니다.”
운현이 소궁주의 말을 끊었다.
“어차피 알았더라도 저는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다.
사실 운현은 북해의 보검인 낙일을 잃었다는 커다란 약점을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지자면 속인 사람은 오히려 운현 자신이다.
그러니 운현이 한 점의 주저함도 없이 괜찮다고 말한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소궁주에겐 그렇지 않았다.
소궁주는 사뭇 놀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무인은, 특히 고수들은 대단히 자존심이 강하다.
자존심 하나에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때로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검성의 후계자이자 낙일의 주인인 운현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고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소궁주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운현은 그런 소궁주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정말인데요?”
그 모습에 소궁주는 그만 웃고 말았다.
“풋, 후후후.”
운현은 당황했다.
나름 진지하게 말했는데 저렇듯 웃으니 뭔가 잘못 말했나 싶은 것이다.
“저기…….”
“고마워요.”
운현의 말은 소궁주의 목소리에 끊어졌다.
소궁주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역시 좋은 사람이네요.”
운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살짝 촉촉했다.
이런 일을 겪어 본 적 없는 운현은 소궁주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당황하는 모습조차 소궁주는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보았다.
조금은 어설퍼 보이기까지 하는 이 사람이 북해십이비의 빙설을 꺾은 사람이라고 누가 믿을까?
그가 북해의 푸른 늑대라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잠시 미소를 머금던 소궁주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무제는.”
순간 운현이 흠칫했다.
소궁주는 가만히 말을 이었다.
“상인의 검이에요. 그들은 북해를 찾아와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였어요. 그리고 상인은 손을 내밀었지요. 아무런 대가 없이 그들의 무공을 전해 줄 테니, 자신이 일으킬 거사에 북해가 호응해 달라고요.”
듣고 있는 운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거사, 호응, 모두가 의미심장한 단어였다.
“그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저 자신의 말대로 무공을 전해 주고 그대로 돌아갔지요. 그 결과 북해는 이 기회에 남쪽을 치자는 정남론과, 아직 이르다는 남린파로 나뉘게 되었어요. 심지어 소궁주들조차 뜻이 달랐으니까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소궁주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온 지혜로운 푸른 늑대께서 계시니 이제 그 혼란도 끝나겠지요.”
“저요?”
운현의 반문에 소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빙제께서 말씀하셨듯 푸른 늑대의 뜻을 거스를 사람은 북해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살아 있는 한 정남론은 끝이에요.”
그건 정말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운현이 채 안도하기도 전에 소궁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는 각오하셔야 해요.”
운현의 얼굴이 굳었다.
“……무엇입니까?”
“정남론을 이끌던 자들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반드시 당신에게 도전하겠지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빙제가 해 주었던 말이다.
“또 하나는 일대상인(一大上人)의 분노예요. 자신의 계획을 무너뜨린 당신을 그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의 이름이 일대상인입니까?”
“네. 스스로 그렇게 칭하더군요.”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인(上人)’은 보통 도가의 높은 도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 앞에 붙은 단어가 심상치 않았다.
“소궁주님은 남린파인가요?”
운현의 물음에 소궁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저야 물론.”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제게 이득이 되는 쪽이지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녀는 거짓말을 한다.
“그런가요? 제게는 북해에 이득이 되는 쪽이라는 말로 들리는데요?”
소궁주가 다만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었다면 목숨을 걸고 빙제를 치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해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을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럴 수도 있지요.”
소궁주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다만 이득에 대한 기준은 조금 다르겠지만요.”
운현도 웃었다.
“어차피 사람의 생각은 다 다릅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소궁주님의 선택을 지지하겠습니다.”
사실 그건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서원에서 논쟁을 할 때면 항상 벌어지는 문제였고,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소궁주에겐 달랐다.
“……왜.”
살짝 떨리는 눈동자로 그녀가 말했다.
“제게 잘해 주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