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93화 (193/530)

193화. 과거의 망령

패왕도 바얀투의 말에 일궁주전에 있던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검성에게 패배한 이후 패왕도 바얀투의 유일한 삶의 목적은 바로 검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푸른 늑대를 시험하겠다는 그의 말은 곧 검성의 후계자와 목숨을 걸고 대결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패왕도 님.”

일궁주가 조용히 말했다.

“저로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북해십이비의 빙설을 꺾은 자니까요.”

패왕도 바얀투의 굵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나를 믿지 못하시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바얀투를 바라보며 일궁주는 진지하게 말했다.

“패왕도 님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백년대계는 패왕도 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일궁주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패왕도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일궁주는 그의 주군이지만 동시에 그의 손자이기도 하다.

그 정을 그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내가 어찌하길 바라시오?”

일궁주는 카불을 돌아보았다.

카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패왕도 님의 말씀처럼 결국 문제는 푸른 늑대입니다. 북해의 율법은 푸른 늑대에게 경의를 표하라 명하였으나 그에게 도전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습니다.”

푸른 늑대는 북해의 수호자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져서는 안 되며 질 수도 없다.

패배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푸른 늑대가 아닌 것이다.

패왕도가 푸른 늑대를 시험하겠다고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그러니 먼저 저희가 그를 시험하겠습니다.”

“바라던 바다!”

쿠툴라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러나 카툴은 패왕도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만일 우리가 전부 패배한다면, 그때는 패왕도 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패왕도 님께서 나설 필요도 없지!”

쿠툴라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검성의 후계자 따위는 나 쿠툴라가 박살 내 주마! 으하하하.”

그 목소리에 에센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에센 역시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검성의 후계자, 낙일의 주인, 북해십이비의 빙설을 꺾은 자이자 푸른 늑대의 칭호를 가진 자와 맞서는 것이 어찌 흥분되지 않으랴?

“음.”

패왕도 바얀투는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일궁주의 염려도, 카불의 배려도 이해가 갔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고집을 부려 봤자 소용 없으리라.

“알았네.”

패왕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가지.”

카불을 똑바로 바라보며 패왕도는 말했다.

“그는 푸른 늑대의 이름을 가진 자일세. 그러니 결코 무례를 행치 않도록 하게.”

그 말에 카불은 쓴웃음을 흘렸다.

패왕도 바얀투는 여전히 북해의 율법에 얽매여 있다.

하지만 그 심정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노인들에게 푸른 늑대는 그야말로 전설의 재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카불이 예를 표하고 그것으로 회합은 끝났다.

혈기가 넘치는 쿠툴라는 즉시 결투를 준비하기 위해 뛰쳐나가고, 에센과 패왕도 바얀투도 자리를 떴다.

남은 사람은 일궁주와 카불뿐이었다.

“카불.”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 카불을 일궁주가 불렀다.

“네.”

“이 일은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카불을 쳐다보며 일궁주는 말했다.

“만일 그리되면 일대상인과 암천무제로 인해 힘을 얻은 정남론 역시 사그라들 것이며, 북해를 위한 우리의 백년대계도 실패하고 말테니까요.”

충격적인 이름들이 나왔지만 카불은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정남론이 북해에서 기세를 얻게 된 것은 일대상인과 암천무제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니까.

빙제 역시 그것을 알고 있으며 지금은 아마 무림맹에서 온 자들도 알게 되었으리라.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할아버지께서 칼을 뽑으시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설령 후에 할아버지께서 분노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일궁주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의 할아버지, 패왕도 바얀투는 전형적인 북해의 용사다.

그가 분노하는 건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했을 때 뿐이다.

“물론입니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카불은 말했다.

“패왕도께서 칼을 뽑기 전에 푸른 늑대는 반드시 쓰러질 것입니다.”

그 대답에 일궁주는 만족했다.

“좋습니다. 나가 보세요.”

카불은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드넓은 일궁주전에 남은 사람은 오직 일궁주뿐이었다.

그러나 일궁주의 눈앞에는 다른 남자를 향해 미소짓는 한 여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있었다.

“……네가 언제까지 나를 무시하는지.”

아득.

아무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일궁주는 이를 갈았다.

“어디 두고 보자.”

그 얼굴에 평소의 근엄하고 준수한 모습은 없었다.

오직 비틀린 욕망과 질투로 가득찬 일그러진 미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는 일궁주, 다음 빙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자이자 정남론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었다.

***

사락.

뒤에서 들린 인기척에 삼궁주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 사실은 돌아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허락도 없이 이곳 삼궁주 전에 들어오는 사람은 사실상 한 명뿐이니까.

“잠깐 괜찮니?”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빙후가 말했다.

“제가 괜찮지 않더라도.”

삼궁주는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어차피 상관하지 않으실 테지요. 빙후 마마.”

고개를 든 삼궁주의 입가엔 차가운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빙후는 오히려 웃었다.

“후후. 그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내보이면 상대가 경계한단다. 그럴수록 미소를 지어야지.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상관없어요.”

삼궁주 역시 싸늘한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런다고 방심할 어머니가 아니시니까요.”

빙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드러낸 뽀얀 어깨가 불빛 아래 반짝였다.

“그야 그렇지.”

사박, 사박.

빙후는 삼궁주를 지나쳐 커다란 창 앞에 섰다.

끝없이 펼쳐진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빙후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무슨 일이지요?”

말없는 빙후에게 삼궁주가 물었다.

빙후는 몸을 돌렸다.

“실은 네 정인(情人)께 전할 말이 있단다.”

정인이란 곧 연인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낯 뜨거운 의미도 있는지라 삼궁주가 동요한 것도 당연했다.

“그는 내 정인이 아니에요.”

“어머, 나는 누구라고는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빙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창가에 기댔다.

“내 딸은 과연 누구를 생각한 걸까?”

“절 놀리기 위해 오신거라면.”

삼궁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 나가 주시지요.”

“후후.”

빙후는 웃었다.

그 모습에 삼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빙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보통이라면 날 선 반응이 돌아왔을 텐데 말이다.

“상인과 무제에 대한 이야기는 했니?”

빙후의 물음에 삼궁주는 경계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에요.”

“그래? 난 벌써 했을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이 말도 같이 전해 주렴.”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빙후는 말했다.

“역대 빙제의 연공실에 들면, 낙일의 비밀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삼궁주의 눈동자가 빛났다.

“역대 빙제의 연공실이라면…….”

“그래.”

빙후는 삼궁주를 보며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바로 만년빙정이 있는 곳이지. 오직 빙제 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곳이지만, 푸른 늑대께는 이것조차 예외거든.”

삼궁주는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빙후가 왜 만년빙정의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총명한 그녀는 곧 답을 유추해 냈다.

“설마 낙일의 검신이 만년빙정과 연관이 있다는 뜻인가요?”

“글쎄?”

빙후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모르지. 이제는 알 수도 없고. 하지만 낙일의 검신을 빛 속으로 사라지게 한 그라면.”

빙후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알아낼 수도 있지 않겠어?”

삼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대 빙제의 연공실.’

그곳은 만년빙정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허나 빙제 외에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땅 깊은 곳에 위치한 그곳은 오직 빙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때? 이 정도면 그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네가 하기에 따라서는 제법 무리한 부탁을 하더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을걸?”

빙후의 눈빛은 마치 유혹하기라도 하듯 은은한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삼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하지만 빙후의 말은 옳았다.

이 말을 듣고 눈을 빛낼 운현의 모습이 벌써부터 생생하다.

“왜 직접 하시지 않는 거지요?”

“내가 했으면 좋겠니?”

결코 그렇지 않다.

빙후가 운현에게 무언가 요구하고, 그가 들어주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릴 정도다.

“걱정하지 마렴.”

사뭇 은근한 목소리로 빙후가 말했다.

“이건 검성의 후계자에게 주는 내 선물이란다. 빙후로서 푸른 늑대께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빙후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빙제께서도 친히 명하셨거든. 그의 분노를 살 만한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후후후,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빙후는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사락.

그리고 빙후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삼궁주를 지나쳐 갔다.

아니, 지나치려 했다.

“어머니는.”

자박.

빙후가 걸음을 멈췄다.

삼궁주의 시선이 빙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맹세했다고 했지요? 그 어느때라도, 북해의 빙후로서 빙제님의 곁에 있겠다고.”

“그래. 그런데?”

빙후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맹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삼궁주는 물었다.

“언제, 누구에게 한 건가요?”

침묵이 흘렀다.

빙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웃었다. 지극히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비록 내 딸이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빙후가 말했다.

“너처럼 눈치 빠른 아이는 정말 질색이야.”

그것은 대답이 아니었지만 삼궁주에겐 충분한 답이 되어 주었다.

빙후는 절반의 진실만 말한 것이다.

그때 그 급박한 순간에서도 말이다.

사락.

빙후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우아한 자세로 삼궁주 전을 떠났다.

사박, 사박.

대답은 끝까지 없었다.

빙후가 떠나고 홀로 남은 삼궁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슬픈 눈빛으로 삼궁주는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까지, 지나간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을 건가요? 어머니.”

그것은 그녀의 진심 어린 독백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어 줄 빙후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

그날 저녁, 운현은 의외의 초대를 받았다.

“소궁주께서요? 지금요?”

서찰을 읽던 운현이 시녀에게 물었다.

그러나 서찰을 가져온 시녀는 운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재촉하듯 공손히 예를 올릴 뿐이다.

“지금 가셔야 합니까?”

옆에 선 독고랑이 물었다.

운현은 서찰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시비를 따라오라고 한 것을 보면 그런 것 같군.”

“제가 동행할까요?”

독고랑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긴히 할 말이 있다니 혼자 가는 게 좋을 것 같네. 독고 제는 방에서 기다려 주게.”

“……알겠습니다.”

조금 불만스러워보이긴 했지만 독고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시녀에게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시녀는 공손히 기다릴 뿐이었다.

운현은 의복을 가볍게 정돈하고 미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 있습니다. 대인.”

독고랑이 건네는 북해의 검, 미명을 운현이 받아 들었다.

“고맙네.”

웃으며 운현이 말했지만 독고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빙제를 치료한 그날 이후, 운현은 목검보다 미명을 가지고 다녔다.

이 검 덕분에 빙제와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한 셈인 데다가, 어쩐지 보면 볼수록 막연한 친근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락.

미명을 갈무리하고 운현은 독고랑에게 말했다.

“다녀오겠네, 독고 제.”

“다녀오십시오.”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독고랑은 말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