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91화 (191/530)

191화. 고마워요

빙제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만년빙정과 함께 전해지는 신물이 또 하나 있소. 바로 낙일검, 정확하게는 낙일의 검신이오.”

“무슨 뜻이지요? 설마…….”

빙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영리한 그녀의 눈동자는 곧 놀라움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설마 낙일이 만년빙정으로 되어 있다는 말인가요?”

“글쎄? 그거야 모르지. 이제는 알 수도 없게 되었고.”

빙제는 담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선대께서는 내게 말씀하셨소. 낙일이 빛 속으로 사라질 때, 비로소 북해의 이름이 천하를 뒤덮게 될 것이라고 말이오.”

빙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낙일이 빛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조금 전 운현이 한 말이 아니던가?

선대 빙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그녀도 처음 들었다.

“나는 그 말씀이 그저 나를 채찍질하시기 위한 것이라 여겼소. 아무리 경지가 올라가도 낙일의 검신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오.”

빙제는 빙후를 보고 있지 않았다.

침상에 걸터앉은 빙제는 두 손을 강하게 마주 쥐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선조들 중에서도 낙일의 색을 변하게 했던 분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라 하시더군. 그것도 깊은 물처럼 푸른 색이 한계였소. 그런데 아예 빛 속으로 사라지게 했다고? 허허허.”

빙제의 웃음은 허탈했다.

“내게는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요.”

그건 빙후로서도 처음 듣는 고백이었다.

빙제는 단 한 번도, 심지어 검성 앞에서도 그의 아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빙후가 되어야만 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빙제의 그 자존심 때문이었다.

슥.

경악으로 흔들리는 빙후의 눈동자를 뒤로하고 빙제는 눈을 들었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북해를 바라보며 빙제는 말했다.

“그러니 그를 북해와 무관한 자로 놔둘 수는 없었소. 어쩌면 푸른 늑대라는 칭호조차 부족할지 모르지. 그는 낙일을 빛 속으로 사라지게 한 자니까.”

빙후는 그제야 빙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북해의 전설을 외지인이 이룬 것은 분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아니, 극렬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빙제는 북해를 다스리는 자로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

과거 검성에게 그러했듯이 운현을 북해의 품으로 끌어안은 것이다.

푸른 늑대의 칭호를 하사함으로써 말이다.

동요 속에서도 빙후는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낙일이 빛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지요?”

“모르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빙제가 말했다.

“녹아 버렸는지 아니면 흩어져 버렸는지 혹은 그가 먹어 버렸는지……. 어찌 되었건 그가 살아 있는 한 이제 정남론은 힘을 잃게 될 것이오.”

남쪽을 정벌하자는 정남론은 더 이상 누구의 공감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낙일의 주인이자 검성의 후계자이며 푸른 늑대인 운현이 살아 있는 한 말이다.

“그러니 당신도.”

빙후를 돌아보며 빙제가 말했다.

“혹여 푸른 늑대의 분노를 살 만한 짓은 하지 마시오. 아무리 나라도 당신이 그의 칼에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빙후는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말했다.

“제가 언제 당신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던가요? 기꺼이 말씀대로 하지요. 나의 빙제님.”

빙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빙후의 목소리는 달콤하기 그지없지만 사실 그녀는 단 한번도 빙제의 뜻을 따른 적이 없다.

아니, 따르기는 한다.

빙후 그녀만의 기준과 정의로 재해석 한 후에 말이다.

과연 그걸 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빙제의 충고는 사실상 헛수고인 셈이다.

빙제는 묵묵히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과거에는 당신이,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딸이…….”

검성을 막아선 사람은 빙후였다.

그리고 그녀의 딸, 삼궁주는 운현을 북해로 이끌었다.

“이 땅의 혼란을 잠재우는군.”

빙제의 말대로였다.

이제 북해의 혼란은 끝날 것이다.

남쪽을 정벌하자는 정남론도, 친구로 지내야 한다는 남린파도 더 이상은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온 푸른 늑대가 북해에 그 모습을 나타냈으니까.

빙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쓸쓸한 눈빛으로 빙제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저는.”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빙후가 말했다.

“이만 물러가겠어요.”

“그러시오.”

빙제는 빙후를 돌아보지 않았다.

빙후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몸을 돌렸다.

사박, 사박.

멀어져 가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으며 빙제는 물끄러미 북해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광대하게 펼쳐진 그 장엄한 풍경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저 자신이 늙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의미한 집착에서 벗어나 조금은 현명해진 것일까?

“후우.”

빙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스륵.

빙제는 몸을 돌려 침상에 누웠다.

혼자뿐인 빙제의 처소엔 다시금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

빙제의 방을 나온 운현은 조용히 소궁주의 뒤를 따랐다.

사박, 사박.

소궁주는 아무 말도 없었다.

분위기로 보아 화가 난 것 같은데, 왜 화가 났는지 운현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운현의 방에 도착할 때까지 소궁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탁.

문 앞에 멈춰선 소궁주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운현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사락.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졌다.

“어, 저기…….”

운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소궁주는 대꾸조차 없었다.

슥.

소궁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렇게 그녀가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화나셨습니까?”

운현의 말이 그녀를 붙잡았다.

소궁주가 몸을 돌렸다.

빙제의 방을 나온 이후 처음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가 왜 화를 내야 하지요?”

소궁주가 말했다.

“누구도 쉽게 풀 수 없다던 북해와 무림맹의 관계를,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오신 지혜로운 푸른 늑대께서 단번에 해결하셨는데 제가 왜 화를 내겠어요? 안 그런가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지금 소궁주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것은 화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아, 그래요?”

소궁주가 방긋 웃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저 우연히 낙일의 검신을 빛 속에 사라지게 했고, 어쩌다 보니 북해 빙제의 목숨을 구했으며, 자신도 모르게 그만 푸른 늑대의 이름을 갖게 된 거군요.”

그녀의 말은 비꼬는 것이었지만 운현의 입장에선 사실 그대로이기도 했다.

“어……, 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궁주의 눈초리가 단번에 위로 솟았다.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대체 당신은 언제나, 왜!”

외치듯 말하던 소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하얀 치아 아래 일그러졌다.

소궁주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힘들게 세운 계책들을, 어째서 그토록 간단히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대체 당신은 왜 언제나 그렇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말의 내용이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휙.

소궁주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뛰어가려 했다.

탁.

그러나 소궁주는 움직이지 못했다.

운현이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놀라 뒤돌아보는 소궁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이 말했다.

“저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건 난데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소궁주님은 너무나 많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추적자들을 따돌리며 이곳까지 우리를 데려왔고, 빙제님과 우리의 목숨이 걸린 막중한 일을 오직 홀로 감당해 왔습니다.”

소궁주를 향한 운현의 눈동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그 눈빛에 가득한 것은 바로 소궁주를 향한 염려의 마음이었다.

“그러니 저는 괜찮습니다. 소궁주님이 무사하시다면, 그리고 소궁주님의 짐이 조금이라도 덜어졌다면요.”

어쩌면 그건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까부터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데다가, 무엇보다 그것이 운현의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궁주는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말했다.

“……놔주세요.”

‘아!’

운현은 아차 싶었다.

과년한 아가씨의 손목을, 그것도 떠나려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세우다니 무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운현은 얼른 손을 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이건, 그러니까…….”

뭔가 변명을 하려고 운현이 쩔쩔매는 사이 소궁주는 잡혔던 손목을 가만히 감싸쥐었다.

“……괜찮으십니까?”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소궁주에게 다가서려 했다.

그러자 소궁주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자 소궁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니에요. 이건…….”

말하려던 소궁주는 스스로도 깜짝 놀란 듯 말을 멈췄다.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운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 탓에 운현은 보지 못했다.

손목을 감싸쥔 소궁주가 이를 악물고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는 모습을.

“……고마워요.”

“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미 소궁주는 몸을 돌리고 있었다.

사박, 사박.

언제나처럼 냉정하게 소궁주는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어쩐지 보통 때보다 조금 빠르게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운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화르륵, 쿠릉, 쿵.

마을이 불길 속에 무너지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눈물로 얼룩진 눈가, 그리고 얼굴 여기저기에 묻어 있는 검붉은 핏자국은 그녀의 빛나는 미모마저 가리고 있었다.

“똑똑히 보았느냐?”

사내의 묵직한 목소리가 여인의 귓가에 들렸다.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왜 이런 짓을…….”

힘겹게 말하는 여인의 입술에는 한 줄기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악업의 대가다.”

이미 눈물마저 메마른 여인의 눈동자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만 죽이면 되잖아.”

마치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힘없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만 죽였으면 되는 거잖아. 왜, 왜 마을 사람들까지 전부…….”

“더럽고 추악하다.”

한 올의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사내는 말했다.

“너도, 그놈도, 네가 만났던 사람들과 네가 살던 이 땅, 그리고 네가 숨쉬던 모든 것들이, 다.”

서늘한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사내는 말을 이었다.

“전부 더럽다. 그래서 태웠다.”

여인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당신이 이들을 죽일 권한은 없어. 그럴 수는…….”

“아니. 할 수 있다.”

사내는 말했다.

“나는 천인(天人)이다. 비천무서(飛天武書)의 주인이자 대역천(大逆天)의 괘(卦)가 선택한 새로운 하늘의 주인이 바로 나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 담담했다.

그래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사내의 행동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슥.

사내가 가볍게 손을 젓자 작은 사내아이가 여인 앞에 내던져졌다.

털썩.

신음 소리를 낼 기력마저 없는 듯, 사내아이는 바들바들 떨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네 악업의 씨앗이다.”

사내가 말했다.

“이 아이가 죽는 것을 네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라.”

사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두 번도 필요 없었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도 이 아이의 목숨을 빼앗기에는 충분했다.

공포에 질린 아이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지만 사내의 눈빛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후후.”

메마른 웃음소리에 사내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후후, 후하하하.”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여인은 마치 신음 소리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당신이 천인이라고?”

여인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희미한 미소에는 연민과 조소가 뒤섞여 있었다.

“자기 아이조차 알아보지 못하면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