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북해의 푸른 늑대
“사라져?”
빙제의 한쪽 눈썹이 일그러졌다.
“도난을 당했다는 뜻인가?”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빙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저도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라졌습니다.”
“……음.”
낮은 신음을 흘린 빙제는 손잡이만 남은 낙일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빙후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소궁주는 아예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운현은 최악의 경우를 각오했다.
‘어쩔 수 없지.’
북해의 상징과도 같은 검, 낙일의 검신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곧 터져 나올 빙제의, 아니 북해의 분노를 운현은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슥.
빙제는 손을 뻗어 낙일의 손잡이를 들었다.
가볍게 손잡이를 살펴본 빙제는 본래 검신이 있어야 할 부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운현을 바라보았다.
“이게 질 나쁜 장난이 아니라면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지 않겠나?”
빙제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빙후와 소궁주가 놀란 표정을 짓고,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소궁주님과 함께 이곳 북해로 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수련 중에 문득…….”
운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
지금부터 할 말은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낙일에서 빛이 나더니……, 그만 사라졌습니다.”
“빛?”
빙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운현의 말을 확인하려는 듯 소궁주를 돌아보았다.
소궁주는 고개를 숙였다.
“네, 저도 보았어요.”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북해십이비의 첫째인 빙설마저 전율에 떨게 했던 그 새벽의 일을.
“아주 밝은 빛이었습니다. 하지만 설마 그때 낙일이 이리되었을 줄은…….”
소궁주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빛이라.”
빙제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빙제는 눈을 떴다.
“혹시 그 전에 낙일에 어떤 변화가 있지 않던가?”
“그 전요?”
“낙일의 검신이 빛 속에 사라지기 전에 말일세.”
운현은 잠시 주저했다.
스스로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알지만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랴?
“제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어쩐지……, 검신의 색이 변하는 듯 보였습니다.”
빙제는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변했다고?”
“네. 처음에는 깊은 물처럼 푸른 빛이었다가 그 후엔 아예 투명하게 변했습니다.”
운현의 말을 듣는 빙제의 눈빛은 복잡하게 변해 갔다.
“그러고는 아예 빛 속에 사라졌나?”
“네.”
순순히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빙제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눈썹 사이에 잡힌 굵은 주름이 그의 고뇌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사이, 운현은 흘깃 소궁주를 쳐다보았다.
‘윽.’
아니나 다를까 소궁주는 매서운 눈빛으로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왜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하는 것이리라.
총명한 그녀라면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운현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낙일은 검성과 빙제의 맹약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 먼저 빙제에게 알려야 마땅했다.
슥.
운현은 고개를 돌려 빙후를 쳐다보았다.
빙후는 텅 빈 낙일의 손잡이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우.”
빙제의 긴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뜬 빙제는 낙일의 손잡이를 다시 탁자에 올려놓았다.
탁.
낙일의 손잡이가 거꾸로 탁자에 섰다.
검신이 있었다면 탁자에 박혔을 법한 모양새였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낙일의 손잡이를 바라보며 빙제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운현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은 의외로 대단히 온화했다.
‘응?’
운현이 살짝 당황해하는데 빙제가 입을 열었다.
“혹시 자네는……. 아니, 아닐세.”
무언가 물어보려던 빙제가 다시 말했다.
“자네가 내 목숨을 구했다고 하더군. 그러한가?”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북해십이비와 소궁주님을 도와 드렸을 뿐입니다.”
대답하면서도 운현은 빙제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꼈다.
갑자기 빙제가 왜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오는 것일까?
극렬한 분노를 각오하던 운현으로서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겸손해 할 것 없네.”
빙제는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와 북해십이비, 그리고 삼궁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걸세. 빙후의 처지도 아주 곤란해졌을 테고.”
그의 목소리는 대단히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낙일에 대한 것은 이미 완전히 잊은 듯, 빙제의 얼굴엔 시종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
탁자에 서 있는 낙일의 손잡이가 여전히 신경 쓰이는 운현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비록 맹약에 따랐을 뿐이라 하나 그 또한 진정한 용사의 덕목이니, 빙제의 목숨을 구한 자네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겠지. 그래서 말인데.”
흐뭇한 미소로 운현을 바라보며 빙제가 말했다.
“자네, 북해의 친우가 되어 주지 않겠나?”
“네?”
운현이 반문했다.
북해의 친우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빙제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자네 쪽 말로 하자면 아마 명예 태상장로나, 혹은 태상호법쯤 될 걸세. 아, 물론 실권은 전혀 없는 이름뿐인 자리지만…….”
운현은 도무지 빙제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빙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북해의 푸른 늑대라는 이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네.”
‘푸른 늑대?’
운현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 호칭의 무게가 범상치 않을 거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빙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건 물론이고, 소궁주의 표정은 아예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아무것도 없네. 번거로운 절차에서 벗어나는 특권이 몇 가지 있지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운현은 빙제의 말을 대강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실권은 없지만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직위는 어디에나 있다.
지금 빙제가 제안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호칭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이름뿐인 자리라 해도 태상장로나 태상호법이라면 최고위직이다.
운현으로선 과분하기 이를 데 없는 명예였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허나…….”
운현은 사양하려 했다.
빙제의 치료를 돕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런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순간, 운현은 소궁주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깨달았다.
‘윽!’
목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미쳤어요?’라는 소궁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것도 말해야겠군.”
빙제가 느긋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온 지혜로운 푸른 늑대가 된다면 북해와 무림맹의 관계도 크게 변하게 될 걸세.”
운현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이야말로 운현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숙제다.
신승 불영이 떠맡긴, ‘북해분들은 북해에서 잘 먹고 잘 사시라’는 숙제 말이다.
그런 운현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빙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친구의 어려움을 틈타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건 북해의 그 누구라도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
이름뿐인 호칭이라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명분이다.
실권이 없기에 오히려 명분은 더욱 선명해진다.
비록 현실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그 명분이 종종 묻혀 버린다 해도 말이다.
운현은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운현의 가슴속에 양심이 살아 있는 까닭이다.
“낙일에 대해서는, 괜찮으시겠습니까?”
빙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뿐, 빙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푸른 늑대가 한 일이라면 그 누구도 이의를 말하지 못할 걸세.”
빙제는 잠시 말을 끊었다.
“허나 검성과 무위를 겨루고 싶은 자들은 아직도 북해에 많이 있다네. 그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해결할 수밖에 없겠지.”
그건 이미 각오한 일이다.
게다가 비무라면, 생사결만 아니면 오히려 운현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운현이 말했다.
빙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소궁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문득 운현이 물었다.
“아, 그런데.”
진지한 표정으로 운현이 물었다.
“혹시 그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에 특별한 의무가 따르는 것은 아닌지 알고 싶습니다.”
운현을 쳐다보던 빙제가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없네.”
빙제는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저 단 하나, 푸른 늑대는 북해의 영원한 친구라는 의미뿐일세.”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친구’라는 단어는 너무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분명했다.
마음을 정한 운현은 손을 모았다.
슥.
정중하게 빙제에게 예를 표하며 운현은 말했다.
“비록 주제넘으나 그 이름을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사락.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빙제가 일어섰다.
빙후와 소궁주가 부축하려 했지만 빙제는 손을 내밀어 거절했다.
자신의 발로 일어선 빙제는 운현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북해의 푸른 늑대여.”
그 목소리는 어쩐지 운현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북해를 다스리는 빙제가 예를 표하는 것이다.
그 의미가 결코 작을 리가 없었다.
운현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운현이 고개를 들었을 때, 빙제는 온화한 미소로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오늘은 이만해야 할 것 같소.”
어느새 말투까지 친근하게 변했다.
빙제는 소궁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삼궁주가 숙소까지 모시도록 하거라.”
소궁주는 고개를 숙여 빙제의 명을 받들었다.
사박.
그녀는 운현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푸른 늑대께서는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건 대단히 낯선 어조였다.
늘 날카롭던 그녀의 시선이 고분고분한 것도 그렇고,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도 그랬다.
무엇보다 뭘 안내한단 말인가?
숙소가 어딘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데.
운현은 빙제를 쳐다보았다.
“저, 이 낙일은…….”
빙제는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물론 그대의 것이오. 푸른 늑대여.”
“감사합니다.”
예를 표한 운현은 낙일의 손잡이를 다시 검집과 맞추고 천으로 쌌다.
그리고 소궁주를 따라 빙제의 방에서 물러났다.
사락.
휘장이 내려지고 운현과 소궁주의 모습이 사라졌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빙후가 빙제를 돌아보았다.
“푸른 늑대라면.”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빙후가 물었다.
“이제껏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가졌던 칭호가 아니던가요? 전설 속의 그…….”
“알고 있소.”
빙제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 빙제가 말해 주지 않을 것을 알아차린 빙후는 다시 물었다.
“낙일의 검신이 빛 속으로 사라졌다는 건 무슨 의미지요?”
빙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하던 빙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 아니 이 땅 깊은 곳에 만년빙정이 있는 것은 알고 있소?”
“알아요.”
빙후는 대답했다.
“빙궁을 지탱하는 힘이자 태고로부터 이 땅을 지키고 있다는 신물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역대 빙제의 연공에 도움을 주는 정도일 뿐,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한 것이 아니던가요?”
빙제는 피식 웃었다.
“역시 자네는 아직도 젊군. 나처럼 나이가 들면 바로 그 상징적인 의미에 더 집착하게 되는데 말이오.”
“어머나, 칭찬의 말씀 고마워요.”
한 조각 미소조차 없이 빙후가 말했다.
“그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