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사라졌습니다
독고랑의 폭풍 같은 검세가 만들어 낸 결과는 처참했다.
암기는 모조리 힘을 잃고 나뒹굴었고 돌로 된 벽에는 짐승의 발톱에 긁힌 듯한 상흔이 가득했다.
그러니 암습해 왔던 백의 무사들이라고 온전할 리 없었다.
피할 곳도 없었던 백의 무사들은 독고랑의 그 엄청난 검세를 전부 받아 내야 했다.
지하 통로라는 상황이 오히려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결과, 백의 무사들은 아무도 무사하지 못했다.
스릉.
독고랑은 검을 갈무리했다.
쓰러진 백의 무사들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독고랑은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크크크.”
백의 무사중 한 명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장 앞서 나왔던 바로 그 사내였다.
얼굴을 가렸던 흰 천은 이미 사라지고 강렬한 인상을 지닌 중년 무사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마 소궁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그는 바로 빙제의 호위대 대장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하구나.”
호위대장이 말했다.
독고랑을 향한 그의 눈빛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독고랑은 검을 뽑지 않았다.
호위대장의 온몸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어선 것조차 대단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남쪽의 고수는, 쿨럭.”
호위대장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피를 닦지도, 입을 가리지도 않았다.
“……다 너와 같으냐?”
하지만 호위대장은 곧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너와 같은 자가 또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으니까.”
호위대장은 허탈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독고랑을 노려보았다.
“혹시 네가 검성의 후계자였던 것은 아니냐? 대체 어떻게 그런 검을 펼쳐 낼 수 있단 말이냐?”
저벅.
독고랑이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길을 잃었을 때.”
그는 호위대장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대인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내게 보이셨다.”
호위대장은 보았다.
냉막한 독고랑의 그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그러니 나 비록 무능한 종복일지라도 어찌 그 길을 가지 아니하겠느냐?”
호위대장은 독고랑을 올려다보았다.
미소는 사라졌지만 독고랑의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후, 후후.”
호위대장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냐? 검성의 후계자가 네게는 그러한 의미였구나.”
호위대장의 눈동자에 생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웃으며 독고랑에게 말했다.
“허나 안타깝구나. 네 충정도 여기서 끝이니까. 너는…….”
“시간을 끄는 것은 여기까지다.”
독고랑의 서늘한 목소리가 호위대장의 말을 끊었다.
완연한 조소를 머금으며 독고랑은 말했다.
“아까부터 네게서 화약 냄새가 진동을 하거든.”
호위대장의 안색이 변했다.
독고랑의 예민한 감각은 호위대장의 심계를 완전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크크, 역시……. 하지만 늦었다.”
슥.
호위대장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 순간이었다.
훅.
독고랑의 검이 호위대장과 함께 그가 들고 있던 무엇인가를 갈랐다.
그것이 굵고 긴 원통형의 물체라는 것과, 그 끝에서 이미 불씨가 타들어가고 있음을 깨닫기도 전이었다.
호위대장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와 동시에 폭음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콰앙―!
쿠르르르.
폭음과 불길한 울림이 터져 나가고 복도는 순식간에 연기로 뒤덮였다.
하지만 호위대장이 지니고 있던 화탄은 본래 위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했다.
터지기 전에 이미 반으로 갈라진 데다가, 독고랑이 검을 뽑은 채 버티고 서서 그 충격을 막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웅.
그 폭풍 속에서도 독고랑의 검은 나직한 검명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통로를 채웠던 연기는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독고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옷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는 무사했다.
칼날에 일렁이는 검기 역시 건재했다.
스릉.
독고랑은 검기를 거두고 검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가히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호위대장과 백의 무사들은 잔해조차 거의 남지 않았고, 복도는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안색이 변할 정도로 처참한 광경.
하지만 독고랑은 눈썹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화탄이 여럿이었다면 위험했겠군.’
만일 다른 백의 무사들도 화탄을 가지고 있었다면 독고랑도 위험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연쇄 폭발로 통로가 무너졌을 수도 있었다.
화탄 자체가 구하기 어려웠는지, 아니면 기회를 놓쳤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독고랑에겐 요행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위험이 없음을 확인한 독고랑은 몸을 돌렸다.
이제 운현에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저벅, 저벅.
정적이 깔린 복도를 독고랑은 묵묵히 홀로 걸었다.
그러다 문득 독고랑이 멈춰 섰다.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탁탁탁.
앞에서 운현이 달려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심각한 표정으로 달려오던 운현은 독고랑을 발견하자 곧 환한 얼굴이 되었다.
“아! 독고…….”
하지만 곧 운현의 얼굴은 다시 일그러졌다.
“독고 제!”
독고랑은 아차 싶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졌고 옷은 엉망이다.
운현의 안색이 변한 것도 당연했다.
타닥.
“괘, 괜찮나, 독고 제?”
어느새 다가온 운현이 독고랑을 이리저리 살핀다.
자칫 울기라도 할 것 같은 운현을 보며 독고랑은 말했다.
“괜찮습니다, 대인.”
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담담하기만 했다.
어찌 보면 쌀쌀맞을 정도로 말이다.
“정말인가?”
못 믿겠다는 듯 운현이 물었다.
독고랑은 답했다.
“네, 대인.”
그 목소리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운현은 그제야 안심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상도 있기 때문이다.
“빙제의 치료도 끝나 가니, 나가면 독고 제도 의원에게 보이도록 하세.”
필요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운현은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독고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그제야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독고랑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
사락.
휘장이 열리고 운현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빙제의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 생사의 기로를 헤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장한 모습이었지만, 아직 가시지 않은 눈 밑의 어두운 기운은 그의 상태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저벅.
침상 옆에 있던 빙후와 소궁주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북해의 빙제가 눈을 들었다.
슥.
그 눈빛은 북해의 제왕다운 위엄과 강렬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운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천천히 예를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운현은 빙제와 빙후, 그리고 소궁주의 시선을 동시에 마주했다.
빙후의 눈빛은 온화했지만 소궁주의 시선은 언제나 그렇듯 조금 냉랭하기까지 했다.
“그대가.”
빙제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남쪽의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검성의 이름을 이은 자인가?”
“아닙니다.”
운현은 조용히 답했다.
“저는 다만 낙일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건 운현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빙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대답의 의미를 빙제가 모를 리 없었다.
검성이 낙일을 건넸다는 것은 뒷일을 맡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그도 이제는 늙었나 보군.”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빙제가 말했다.
“내가 이렇게 늙었듯이 말이야.”
빙제가 느끼는 감회가 어떨지 운현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무게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검성과 북해의 빙제, 그 전설 같은 이름들 앞에 운현은 서 있는 것이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빙제가 운현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낙일을 잇기 원한다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네.”
빙제의 눈빛은 강렬하고 그 목소리는 진중했다.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빙제는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검을 되돌려 받으려 할 테고.”
검성과 빙제의 맹약은 북해로서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상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북해가 낙일을 되돌려 받으려는 것은 당연했다.
과거의 상처와 족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네는…….”
“아, 저기.”
운현이 빙제의 말을 끊었다.
빙후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소궁주의 고운 눈썹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무례라는 것을 알지만 운현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전에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보여 줄 것이라고?”
빙제는 운현의 무례를 책망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빙제 앞에 운현은 가지고 온 것을 꺼냈다.
슥.
빙제는 물론 빙후와 소궁주의 눈빛도 변했다.
깨끗한 천에 싸여 있었지만 그것이 한자루의 검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운현이 지금 꺼낼 검이라면 단 하나뿐이다.
사락.
운현은 천천히 천을 풀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해의 검, 낙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빙제가 신음을 흘렸다.
빙후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고 소궁주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참으로 오랜만이로군.”
감회에 젖은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빙제가 말했다.
“그런데 왜…….”
슥.
운현은 낙일에 손을 가져갔다.
잠시 망설였지만 운현은 곧 힘을 주어 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무슨……!”
소궁주가 즉시 운현을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소궁주는 팔을 뻗지도 못하고 멈춰 버렸다.
“아!”
빙후는 놀란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빙제 역시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낙일의 검신이 보이지 않았다.
있는 것은 검집과 짧은 손잡이뿐, 검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소궁주였다.
그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물었다.
달칵.
운현은 옆에 있는 탁자에 낙일의 칼집과 손잡이를 놓았다.
빙후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낙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뜻인가?”
빙제가 운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낙일의 검신은 어디에 있나?”
침묵하던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