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침입자들
혼자가 좋다는 독고랑의 말에 운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독고랑은 고독객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의 인물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운현이 그의 발목을 잡을 경우도 생각해야만 했다.
“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조심하게. 다치지 말고.”
운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조금 버겁다 싶으면 흉수들 한둘쯤은 보내도 되네. 이래 봬도 비무는 조금 자신 있거든. 하하하.”
농담이었지만 독고랑은 웃지 않았다.
독고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저벅, 저벅.
묵묵히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운현은 염려를 감추지 못했다.
‘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독고랑이다.
검기발현의 고수인 데다 홀로 적을 맞서는 것은 그 누구보다 익숙한 고독한 검객이 바로 그다.
어쩌면 운현이 그의 걱정을 한다는 게 어불성설이겠지만, 운현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고랑은 운현에게 단 한 명뿐인 의제이자, 창룡검주에 대한 진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후우.”
운현은 한숨을 쉬고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고색창연한 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저 너머에 북해십이비와 소궁주가 있다.
그리고 빙후와 의식을 잃은 빙제도.
“책임이 막중한데?”
북해에 올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운현은 허리에 찬 검을 매만졌다.
소궁주에게 부탁해서 따로 받은 북해의 검이었다.
낙일은 검신이 없고, 목검은 아무래도 호위에는 아닌 것 같아서 요청한 것이다.
물론 목검도 같이 들고 있다.
익숙한 것이 때로는 더 좋을 경우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완전 외길에 복도 하나뿐이던데, 혹시 연기 같은 걸로 질식된다거나 그러진 않겠지?’
소궁주는 염려할 필요 없다고 했다.
과연 환기는 확실히 잘되고 있는 듯했다.
깊은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바람이 느껴졌고, 기분 탓인지 몰라도 숨 쉬기는 오히려 더 좋았다.
슥.
운현은 다시 한번 오래된 문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희미한 비파 소리가 운현의 귀에 울렸다.
띠리링.
‘시작했구나.’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북해 빙제의 목숨이, 그리고 운현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될 순간이.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손에 쥔 북해의 검이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이름이, 미명이라 했던가?’
소궁주가 전해 준 그 검의 이름은 미명(未明)이었다.
아직 어둠이 밝지 않은 때, 그러나 곧 밝아올 날에 대한 간절한 기원이 담긴 이름, 미명.
‘어쩐지.’
지금 상황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
저벅, 저벅.
넓고 긴 복도를 독고랑은 묵묵히 걸었다.
깊은 지하지만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복도는 넓었다.
세심하게 관리하는 듯 더러움은 전혀 없었지만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 버겁다 싶으면 흉수들 한둘쯤은 보내도 되네.
독고랑은 조금전 운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웃던 운현의 표정도.
―이래 봬도 비무는 조금 자신 있거든.
독고랑은 피식 웃었다.
조금 자신 있다니, 그런 어마어마한 검을 보여 준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운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저 조금 자신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독고랑으로선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흉수들을 대인께 보내다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벅.
나지막이 중얼거린 독고랑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운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그저 희미한 불빛 속에 흔들리는 복도의 모습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하지만 그 음산한 모습조차 독고랑에겐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대인께 받은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지극히 큰 가르침을 받았으니 그를 스승으로 섬기기로 결정했다.
은혜를 갚기 위해 그의 종복마저 자처했다.
그러나 갚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독고랑은 가르침이나 은혜보다 더욱 큰 것을 받았다.
그것은 깊은 신뢰와 따뜻한 정이었다.
어쩌면 운현도 그저 외로웠을 뿐인지도 모른다.
독고랑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운현은 똑같이 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고랑이 그로부터 신뢰와 온정을 받은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어찌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으랴?
혹여 자신 때문에 그가 위급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어찌 용납할 수 있으랴?
독고랑이 홀로 이곳을 지킬 것을 결정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만의 하나라도 자신이 운현의 발목을 잡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했으니까.
슥.
어둠 속을 바라보던 독고랑이 고개를 돌렸다.
입구 쪽에서 범상치 않은 기세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역시 오는군.’
암습이 있을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흉수들에겐 이번이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빙제가 의식을 되찾으면 상황은 흉수들에게 대단히 불리해진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이곳으로 쳐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령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 검성의 후계자라 해도 말이다.
‘교전의 기척조차 없다니.’
독고랑은 조소를 머금었다.
북해빙궁에 지키는 자들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저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생각보다 더 큰 세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하나.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뜻인가?’
검성의 후계자가 지키고 있음을 알면서도 북해 빙제의 목숨을 노리고 침입하는 자들이다.
그 무위는 물론이고 각오 또한 범상치 않을 것이다.
목숨 같은 건 이미 내려놓았을 것이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선택도 불사하리라.
슥.
아니나 다를까?
흉흉하게 빛나는 눈동자들이 복도 저편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가 마치 수많은 바늘처럼 독고랑의 피부를 찔렀다.
‘열 둘.’
독고랑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살폈다.
숫자는 모두 열두 명, 모두가 하얀 무복을 입고 흰 천으로 눈 아래를 가렸으며 손에는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저벅.
백의 무사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흥, 삼궁주의 개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더냐?”
그건 서툴지만 분명 남쪽의 언어였다.
독고랑은 나직이 대답했다.
“언제나 그렇더군.”
스릉.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독고랑의 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비루한 개들일수록 시끄럽게 짖어대지.”
웅.
백의 무사들의 시선이 단번에 변했다.
독고랑의 검에서 울리는 나지막한 검명.
시퍼런 칼날에 일렁이는 기운은 바로 검기였다.
“와라.”
독고랑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아까우니까.”
나지막한 독고랑의 목소리엔 살기도, 흉포한 기세도 없었다.
오직 나지막이 울고 있는 검명만이 독고랑의 결의를 알려 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웅.
앞에 선 백의 무사는 이를 악물었다.
‘한낱 호위조차…….’
검성의 후계자는커녕 그의 호위가 보이는 무위가 이 정도다.
아마도 오늘 밤은 좋은 결과를 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돌이킬 수는 없다.
이 정도는 이미 예상한 데다가, 그들에겐 아직 숨겨 둔 한 수가 있기 때문이다.
슥.
백의 무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열한 명의 눈동자가 결의로 빛났다.
고개를 작게 숙이며 백의 무사는 말했다.
“쳐라.”
팟.
짧은 그 목소리와 함께 세 명의 무사가 독고랑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들의 뒤를 네 명의 무사가, 그리고 또 다른 다섯의 무사가 쇄도해 들었다.
그러나 더욱 치명적인 것들은 그들 사이로 쏘아진 수많은 암기들이었다.
파바밧.
독고랑을 향해 쏘아지는 죽음의 기운들.
그러나 독고랑은 여전히 서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귓가에 울리는 것은 바로 운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조심하게. 다치지 말고.
우웅.
“네, 대인.”
나지막한 검명 속에 독고랑은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독고랑의 검이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검명을 흘리던 칼날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빛을 뿜기 시작했다.
백열하는 그 칼날을, 독고랑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대로 그어 내렸다.
콰과과곽.
빛나는 독고랑의 검은 허공을 베었을 뿐이었다.
백의 무사들은 물론 그들이 쏘아낸 암기 하나조차도 베지 않았다.
그러나 곧, 폭풍 같은 기세가 백의 무사들과 그들의 암기 그리고 통로 전부를 집어삼켰다.
그 기세 앞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응?’
문 앞에 서서 비파의 음률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운현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복도 저편, 독고랑이 사라져 간 쪽에서 무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벌써 시작했나?’
멀어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독고랑이 적과 조우한 듯싶었다.
‘억지로 무리할 필요는 없는데.’
독고랑이 어떤 사람인지 운현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변명하지 않으며 절대로 책임을 미루지 않는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고 묵묵히 걷는 사람, 그가 바로 독고랑이다.
운현이 굳이 ‘흉수 한둘쯤은 보내도 된다’고 말한 건 독고랑을 잘 알고 있기에 한 말이었다.
그는 반드시 무리를 할 사람이니까 말이다.
‘괜찮을까?’
운현은 지금이라도 가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간다고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없다.
오히려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으음.’
운현은 복도 저편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바로 그때였다.
따라라랑, 따랑.
희미한 비파 소리가 운현의 주의를 끌었다.
커다란 문 저편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분명 소궁주의 비파였다.
문제는 그 음률이 지금까지와 달리 대단히 불안하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지?’
저벅.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문으로 다가섰다.
크고 고색창연한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지만 운현은 그 너머에서 들리는 비파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뭔가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도.
잠시 주저했지만 길지는 않았다. 운현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슥.
커다란 문은 의외로 부드럽고 조용하게 열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운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그곳은 방이라기 보다는 커다란 대전 같은 곳이었다.
특히 사방 벽은 장식 같은 것도 하나 없이 맨 벽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는데, 불빛에 일렁이는 모습은 분명 얼음 같았다.
하지만 그걸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후우우웅.
대전 중앙, 휘장으로 가린 침상에서 커다란 기운이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따랑, 따라랑.
그 기운을 제어하려는 듯 비파의 선율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침상에서 일렁이는 기운은 당장이라도 제어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