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빙궁의 가장 깊은 곳, 빙제의 처소.
침상에 누워 있는 빙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빙후는 고개를 들었다.
사락.
두꺼운 장막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리고 삼궁주가 들어섰다.
“어머, 어서 오렴.”
빙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모습은 온화한 어머니의 자태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소궁주의 표정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이지요?”
삼궁주는 화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빙후는 웃었다.
“그야 당연히 나와 너, 그리고 북해를 위한 일이지.”
“하!”
삼궁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곧 날카로운 시선으로 말했다.
“그런 거짓말을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삼궁주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왜 그의 정체를 밝힌 거예요? 어째서 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운 거죠? 대체 왜!”
아득.
붉은 입술을 깨물고 삼궁주는 말했다.
“왜, 그인 거예요?”
원독이 가득한 삼궁주의 시선 앞에서도 빙후는 담담했다.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정체를 밝힌 것은 그래야 모두가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무림맹의 사람을 빙제님의 호위로 세운 것이 나중에 어떤 의미로 되돌아올지 네가 모르진 않겠지?”
북해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다.
무림맹의 사람을 빙제의 호위로 세우는 것은,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검성의 후계자, 낙일의 주인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락.
앉아 있던 빙후가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뒤집어씌우지 않았어. 높은 산이 하늘을 이고 선 것이 당연하듯, 그건 지극히 높은 자리에 선 그의 운명일 뿐이야.”
그건 궤변이지만 옳은 지적이었다.
운현이 검성의 후계자나 낙일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어째서 그여야 했느냐고 묻는다면.”
사박, 사박.
빙후는 조용히 걸어왔다.
그리고 삼궁주를 향해 가만히 손을 뻗었다.
하얀 빙후의 손이 삼궁주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바로 그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삼궁주는 순간 움찔했다.
빙후를 바라보는 삼궁주의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지요?”
눈살을 찌푸리며 삼궁주가 말했다.
동요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목소리에 떨림은 없었고 놀란 표정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빙후는 요염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모를 것 같니?”
하얀 손을 내리며 빙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서호에서 그가 빙설을 꺾은 이후 너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더구나. 설영대를 통해 그의 배경을 조사하고, 행적을 따라가고, 그가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하는지, 아주 세심하게 관찰했었지?”
빙후가 그걸 아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설영대는 소궁주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집단이 아니니까.
“너는 아주 깊이 생각했을 거야. 그가 나눈 대화, 그가 내린 결정, 그리고 여러가지 상황들 속에서 그가 보여 준 반응들을. 아무리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그 의미를 깨달으려 했겠지. 때로는 네가 그가 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
소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제 일이었으니까요.”
“그래, 그렇지.”
사박.
빙후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그 사람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그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너는 어땠니?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가 친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어?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마저 잊고, 낯설게 대하는 그에게 오히려 화가 나지는 않던?”
“하!”
소궁주가 조소를 흘렸다.
“아무 근거도 없는 억측이군요. 그게 전부라면 너무 실망이에요. 나는 결코…….”
“그래?”
빙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런데도 너는 그를 북해까지 데려온 것이로구나. 빙제님의 목숨이 위험한 급박한 상황에서, 네가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으로 그를 정하고, 머나먼 이곳까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말이야.”
소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변명할 말은 있었다.
빙제가 암습을 당하고 북해십이비가 치료에 집중해야 할 이 시점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검성의 후계자인 운현뿐이다.
그러나 과연 운현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을까?
다른 방법은 정말 없었을까?
소궁주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침묵해야만 했다.
“아아,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내 딸아. 너는 어쩌면 이리도 나와 같은지.”
빙후는 더 없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소궁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슥.
하얀 손이 삼궁주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지만 삼궁주는 피하지 못했다.
“정말로 감추고 싶었다면 너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몰랐어야 해. 심지어 그 사람마저도 말이야. 그래야 지킬 수 있으니까. 그래야 감출 수 있으니까.”
안타까운 표정으로 빙후는 소궁주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소궁주의 앞까지 다가온 빙후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단다. 네가 원하는 건 내가 이루어 줄 테니.”
소궁주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그게 무슨 말이지요?”
사락.
그녀는 소궁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속삭이듯 빙후가 말했다.
“너는 그냥 있으면 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그 사람 곁에만 있으면 된단다. 그러면 그 사람은 네 것이 될 거야. 오직 너밖에 모르는, 너만을 바라보는 너만의 사람이.”
소궁주의 귓가에서 빙후의 음성이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마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은밀한 속삭임처럼.
“내가 그렇게 해 줄게. 날 믿으렴. 내 사랑하는 딸아.”
그것은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소궁주의 눈앞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러나 더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한 사람의 미소가.
―소궁주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테니까요.
탁.
소궁주는 거칠게 빙후의 손을 내쳤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빙후의 깜짝 놀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궁주는 말했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북해를 위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 말에 빙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런데 왜.”
이를 악물고 소궁주가 말했다.
“그와 빙제님을 위한 거라고는 하지 않았나요?”
빙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와 빙제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
“거짓말.”
소궁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와 빙제님을 위한 것이라고요? 물론 그렇겠지요.”
가벼운 조소를 지으며 소궁주가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관점에서요.”
빙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후우.”
소궁주를 보던 빙후가 한숨을 흘렸다.
“네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날 믿으렴. 나는…….”
“당신은.”
빙후의 말을 끊으며 소궁주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북해 전부는 물론이고 자신의 과거도, 사랑도, 그리고 진실마저도 말예요.”
아득.
소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딸을 이용해서 모든 것을 가지려 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야. 나는…….”
빙후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거절하겠어요.”
더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소궁주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겠어요. 그리고 당신의 뜻대로 되도록 두고 보지도 않겠어요.”
소궁주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나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아요.”
빙후와 소궁주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미소는 이미 사라지고 두 사람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졌다.
소궁주는 빙후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훗.”
소궁주의 붉은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밤이 깊었으니 이만 물러가지요.”
사락.
소궁주가 고개를 숙여 과장된 예를 표했다.
“부디 편안한 밤 되시길. 빙후 마마.”
빙후의 고운 눈썹이 일그러졌지만 소궁주는 상관하지 않았다.
소궁주는 몸을 돌렸다.
사박, 사박.
그대로 소궁주는 방을 나갔다.
휘장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소궁주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아.”
빙후는 작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저 아이는.”
사락.
침상에 앉으며 빙후는 말했다.
“어째서 내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는 걸까요?”
빙후는 고개를 돌렸다.
의식을 잃은 노년의 빙제가 침상에 누워 있었다.
흰 수염과 허연 머리카락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만은 여전한 빙제를 내려다보며 빙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뜻을 이루고 고귀한 자리에 올라 세상 모든 것을 누리는 것보다, 비참하게 실패하더라도 단 한 사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훨씬 더 행복한데도 말예요.”
사락.
빙후는 빙제의 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북해 전역을 다스리는 빙궁의 주인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손 아래 무방비하게 놓여 있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진심도 도무지 알아 주려 하질 않아요. 들었죠? 마치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잖아요? 후후후.”
빙제를 내려다보며 빙후는 빙긋 웃었다.
“물론 당신은 이렇게 있을 때가 가장 귀엽다고 생각하지만요.”
빙후는 킥킥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곧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잠시 침묵하던 빙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저 아이는 내 딸이지만 동시에 당신의 딸이기도 하군요.”
빙후의 하얀 손가락은 빙제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창밖 너머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았던 위대한 당신의 딸.”
속삭이듯 빙후가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검성의 후계자에 대한 소식은 삽시간에 북해 전역을 휩쓸었다.
과거 북해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던 검성, 그의 후계자가 찾아온 것이다.
그 충격적인 소식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노년의 부족장들은 이를 갈며 무기를 들었고 혈기 가득한 용사들은 호승심에 불타 자리를 박찼다.
검성의 후계자이자 낙일의 새로운 주인은 단번에 폭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빙제 암습의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빙궁의 의도와 맞물려, 그에 대한 소문은 거대한 폭풍처럼 북해 전역을 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운현 주위는 조용했다.
아니, 조용한 것을 넘어 무료하기까지 했다.
연회 이후 아무도 운현에게 다가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빙제의 치료가 시작되는 지금까지도 말이다.
“괜찮겠나?”
운현이 독고랑에게 말했다.
한 자루 칼날 같은 날카로운 기세를 지닌 독고랑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아니 그래도 어찌 독고 제 혼자…….”
“괜찮습니다.”
독고랑은 운현의 말을 끊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독고랑은 운현보다 앞쪽에서 경계를 하겠다고 했다.
운현이 빙제의 방문을 지킨다면, 독고랑은 그보다 한참 앞쪽인 입구에 있겠다는 것이다.
사실 문제는 없었다.
빙제의 치료가 이뤄지는 곳은 빙궁의 지하 깊은 곳이었다.
방부터 입구까지는 넓은 복도와 계단으로 된 외길이라 설령 독고랑이 암습자를 놓친다 해도 운현이 막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함께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만일의 경우 서로 도와줄 수도 있고…….”
“저는.”
독고랑이 나지막이 말했다.
“혼자인 편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