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85화 (185/530)

185화. 빙후의 예(禮)

“서기이신 운현운현 공자십니다. 아, 죄송해요. 운현운현이 아니라 운현이라 하셨지요?”

빙후가 웃으며 말했다.

북해의 말은 몰라도 이름을 두 번 말한 건 운현도 알아들었다.

운현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예를 표했다.

통역조차 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 삼궁주의 의심스러운 시선도 짐짓 못 본 척했다.

연회장의 사람들은 곧 운현으로부터 관심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아, 그리고.”

깜빡했다는 듯 빙후가 덧붙였다.

“운 공자께서 호위를 서 주실 거예요. 북해십이비와 삼궁주가 빙제님의 회복을 돕는 동안에요.”

연회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충격 때문이 아니라, 난데없는 선언이 만들어 낸 정적이었다.

“뭐?”

그리고 곧 분노가 연회장을 휩쓸었다.

“불가하다!”

“말도 안 되오!”

연회장은 분노와 고함으로 들끓었다.

부족장과 소궁주 들, 그리고 각 부족의 용사들마저 화를 내고 있었다.

“북해에는 용사가 없는가? 어찌 외인에게 빙제님의 호위를 맡긴단 말인가?”

“이는 수치요! 빙후께서는 당장 그 결정을 거두시오!”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흉흉했다.

그때였다.

“빙제께서 암습을 당하신 것은.”

빙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해에 용사가 없기 때문이던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연회장을 내려다보며 빙후는 조소를 머금었다.

“지금은 아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그렇다면!”

팔궁주가 소리쳤다.

아까의 실책을 만회하려는 그에게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저자는 믿을 수 있단 말이오?”

그건 모두가 똑같이 품고 있던 질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빙후로 향했다.

“네.”

빙후의 대답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팔궁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왜냐하면.”

단호하게 빙후는 말했다.

“저분은 검성의 후계자시니까요.”

쿵.

충격이 연회장 가운데 퍼져 나갔다.

빙제의 암습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경악이 사람들을 휩쓸었다.

내내 굳은 표정이던 일궁주마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어…….”

제갈기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우리, 아주 큰일 난 것 같은데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빙후와 삼궁주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운현을 향해 엄청난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증오였다.

어떤 이는 분노였고, 또 누군가는 공포와 경악이었다.

온갖 강렬한 감정이 담긴 시선들이 운현을 향해 쏟아졌다.

슥.

독고랑이 운현의 앞을 가리듯 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담대한 독고랑의 표정도 이 순간만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피의 강을 건너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궁주의 경고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입을 연 사람은 일궁주였다.

그는 운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정말로 검성의 후계자입니까?”

일궁주는 목소리에 묻어나는 혼란과 의구심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빙후는 태연했다.

“제 말이 진실인지는 빙설에게 물어보시지요.”

휙.

일궁주와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빙설에게 집중되었다.

빙설은 북해십이비의 첫째다.

그녀에게 물어보라는 것은 곧 빙설과 운현이 일전을 겨루었다는 것을 뜻했다.

북해십이비의 첫째와 검성의 후계자가 이미 격돌한 것이다.

“운 공자님께서는.”

빙후는 그 시선들을 사뭇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낙일의 새로운 주인이며 빙설을 꺾은 자입니다.”

사람들의 혼란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은 폭풍에 휘말린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본래 검성은 빙제께서 인정한 유일한 용사십니다. 그러니 저분이야말로.”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빙후가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빙제님의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오직 단 한 분이시겠지요.”

빙후는 운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사락.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그것은 예(禮)였다.

북해의 빙후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빙제 외의 사람에게 예를 표한 것이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것은 빙궁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짓에 다름없었다.

그러나 검성의 후계자이자 낙일의 주인에게 한 예라면 다르다.

일찌기 빙제가 허락한 일이니 이 일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회장에 경악과 함께 무거운 정적이 내려 앉았다.

그리고 정작 어리둥절한 사람은 운현이었다.

갑자기 엄청난 분노와 증오의 시선들이 쏟아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모두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의는 확실히 줄어들었지만, 대체 왜 자신을 이렇게 주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북해 빙후의 예(禮)예요.”

삼궁주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슥.

그녀가 눈을 돌려 운현을 향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 물음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운현은 알아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예를 표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지금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것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음.’

운현은 잠시 주저했다.

빙후의 예에는 답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하지만 자신의 의례적인 인사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운현은 모른다.

그러니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슥.

운현은 허리를 굽혔다.

최대한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그리고 그 결과는 운현의 예상을 또다시 뛰어넘었다.

“오오.”

“거, 검성의 후계자가…….”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검성의 후계자이자 새로운 낙일의 주인이 빙후의 예를 받았다.

오래전 검성이 빙제의 후의를 받아들인 것처럼, 빙후의 예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로 나지막한 수근거림이 번져 나가고 팽팽하던 긴장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적의와 경악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제는 호기심과 놀라움, 그리고 의구심이 섞인 시선들이 운현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뭔진 모르겠지만요.”

제갈기호가 운현을 툭 치며 말했다.

운현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긴장이 풀어진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낙일의 새로운 주인에 대한 것은.”

빙후의 낭랑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빙후에게 향하고, 꼿꼿하게 몸을 세운 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빙제께서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감히 빙제께 암습을 시도한 참람한 역도들에 대한 처분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싸늘한 공기가 연회장에 번져갔다.

빙후는 빙긋 웃었다.

“그러니 그때까지, 모두들 경거망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예요.”

웃으며 말했지만 그것은 경고였다.

북해에 곧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더없이 서늘한 경고.

소궁주와 부족장 들은 얼굴을 굳혔다.

남쪽에서 찾아온 낙일의 주인과 빙제의 암습.

앞으로 북해빙궁에 어떤 폭풍이, 그리고 피바람이 불게 될 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사락.

빙후는 우아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이제야 비로소 연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들뜬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말을 나눴다.

그들의 표정과 눈빛에는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대단하네.’

운현은 빙후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치명적인 매력만큼이나 빙후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북해빙궁의 소궁주들, 부족장과 역전의 용사들이 그녀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놀아났으니 말이다.

빙후의 한마디에 시시각각 뒤바뀌던 사람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희극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당사자들에게는 공포가 따로 없겠지만 말이다.

‘소궁주도 나중에 저렇게 되는 건가?’

운현은 문득 빙후와 시선이 마주쳤다.

도도한 눈빛으로 연회장을 지켜보던 빙후가 운현을 향해 방긋 웃는다.

순수하기까지한 표정이었지만 운현은 어색한 미소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미안해요.”

문득 들린 삼궁주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붉은 입술을 깨물며 삼궁주가 말했다.

“……내가 방심했어요.”

빙제의 암습과 운현의 정체를 밝히는 것, 그리고 빙후의 예까지 모두가 예정에 없던 일이다.

갑작스러운 일에 경악한 것은 삼궁주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빙후의 예와 운현의 선택, 그 어느 것도 그녀가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삼궁주는 변명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이 책임은 반드시…….”

삼궁주는 고개를 숙여 운현에게 사과하려 했다.

“아닙니다.”

운현은 얼른 손을 내저어 그녀를 막았다.

“소궁주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무슨 일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웃으며 운현은 말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된 것 같으니까요.”

그 말에 삼궁주는 그만 헛웃음을 흘렸다.

“잘되었다고요?”

과연 잘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제 북해의 시선은 온통 운현에게 쏠리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빙제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빙제를 잃은 북해의 분노는 필연적으로 검성의 후계자이자 낙일의 새로운 주인인 운현을 향하게 될 것이다.

빙후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반면 운현에게 분노하는 것은 단순하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운현은 본질적으로 외인이고 검성에 대한 원한은 아직도 깊고 크다.

결과적으로 운현은 모든 위험부담을 홀로 감당하게 된 것이다.

바로 빙후의 계략에 의해서 말이다.

‘완전히 당했어.’

아득.

삼궁주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빙후의 계략이 가져올 결과를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에 대한 자책과 빙후에 대한 분노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삼궁주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그녀는 자신을 향한 운현의 부드러운 시선을 마주했다.

“괜찮습니다.”

운현이 그녀를 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소궁주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렇지요?”

빙후의 예에 갈등하던 운현이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 소궁주 때문이었다.

설령 자신의 선택이 실수라 하더라도 그녀라면 반드시 어떻게든 해 줄 것이다.

바로 그 믿음이 운현으로 하여금 빙후의 예를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운현의 말은 소궁주를 혼란에서 깨어나게 했다.

‘아!’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빙후는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빙후에게 지금껏 굴하지 않고 싸워 오지 않았던가?

그 무수한 패배를 경험하면서도 말이다.

소궁주는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무력한 자신에게 대한 자책이 아니었다.

패배감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위는 이제 없으니까.

“그래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궁주가 말했다.

“나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아름답고 찬란하게.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운현의 모습에 소궁주는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고 하지만 운현은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조금 전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의 의미도,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 해 준 말의 무게도 말이다.

그는 아마 짐작도 하지 못하리라.

자신이 소궁주의 마음을 수렁에서 건져 주었다는 사실을.

‘훗.’

소궁주는 피식 웃었다.

운현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이 무척이나 편안해서, 소궁주는 운현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탓에 소궁주는 알지 못했다.

자신과 운현을 빙후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과, 일궁주가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으득.

일궁주는 나지막이 이를 갈았다.

평정을 잃지 않던 일궁주의 눈빛이, 지금 이 순간만은 질시와 증오로 걷잡을 수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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