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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84화 (184/530)
  • 184화. 혼란

    오궁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일궁주와 삼궁주가 크게 싸워 줬으면 좋겠다니, 아무리 진심이라 해도 이 자리에서 내뱉을 말은 아니다.

    허세 심한 팔궁주와 적의를 숨기지 못하는 칠궁주.

    본래라면 이런 자들과 손을 잡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들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그래. 그러니 결코 함부로 건드리거나 도발하지 마라. 괜히 삼궁주의 계략에 말려들어 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칠궁주와 팔궁주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저 질시와 적의가 담긴 시선으로 독고랑을 노려볼 뿐이었다.

    “후.”

    나지막이 한숨을 쉰 오궁주는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 중심에 일궁주가 서 있었다.

    훤칠한 외모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일궁주는 그를 추종하는 자들 사이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다음 빙제의 좌에 가장 가깝다고 평해지는 일궁주는 지금도 차가운 눈빛으로 연회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관심을 가질 만한데도, 그의 냉막한 시선이 남쪽에서 온 사절단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음.’

    오궁주는 살짝 몸을 떨었다.

    일궁주의 냉막한 눈빛만 봐도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듯했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일궁주도, 그에게 감히 도전장을 던진 삼궁주도 그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존재들이다.

    오궁주는 가만히 잔을 들어 올렸다.

    이 연회가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며.

    ***

    “아, 이제 시작되려나 봅니다.”

    제갈기호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주최자가 나오는가 본데, 누굴까요?”

    제갈기호처럼 운현도 그것이 궁금했다.

    본래라면 빙제가 나오는 것이 옳지만 현재 그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다면 누가 빙제를 대신할까?

    누가 현재 북해의 실질적인 이인자일까?

    운현은 물론 제갈기호도 흥미를 감추지 못했다.

    사락.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모두 운현이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엇?’

    “오우.”

    옆에서 제갈기호가 감탄하는 소리를 들으며 운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옷을 입은 매력적인 미모의 귀부인, 그녀는 아까 운현의 방에 들어왔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사락, 사락.

    중년의 귀부인은 긴 옷자락을 끌며 당당하게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귀부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어깨를 드러낸 과감한 복식이 그녀의 자신감을 더욱 드러내고 있었다.

    “와, 이거 북해에 미녀가 많다더니 정말 장난이 아닌데요?”

    제갈기호는 입을 떡 벌린 채 혀를 내둘렀다.

    사박.

    그 귀부인 뒤에 함께 들어오는 사람은 바로 삼궁주였다.

    삼궁주는 여전히 아름답고 차가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니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너무 닮아 보이네요. 설마 혈연인가요?”

    제갈기호의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요. 아마 저 귀부인께서 바로 북해의 빙후신 것 같으니까요.”

    “네?”

    곧 알게 될 것이라는 두 여인의 말은 옳았다.

    빙제의 자리를 대신한 사람은 북해제일지이자 삼궁주의 어머니, 빙후였다.

    그녀가 눈부신 아름다움을 뽐내며 연회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의 딸 삼궁주와 함께.

    “후후.”

    부드럽게 손을 들어 인사하던 빙후가 문득 웃었다.

    “우릴 맞이하는 시선들이 아주 뜨겁구나.”

    “그런가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소궁주와 부족장 들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삼궁주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건 대부분 어머니 덕분인 것 같군요.”

    “어머, 고마워.”

    빙후는 가볍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박.

    두 사람은 연회장 전면, 커다란 휘장이 드리운 곳에 섰다.

    그곳에 있는 자리는 둘뿐이었다.

    바로 빙제와 빙후를 위한 것이다.

    슥.

    삼궁주는 빙후에게 예를 표하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빙후는 빙제의 텅 빈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사락.

    연회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들을 음미하듯 바라보며 빙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 빙제께서는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도 있겠지만, 빙제께서 암습을 당하셨기 때문이에요.”

    쿵.

    충격이 연회장에 떨어져 내렸다.

    그저 의례적인 이유가 나올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은 암습이라는 말에 충격과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뭐라고? 빙제께서?”

    “암습이라니! 그 무슨…….”

    “맙소사! 대체 누가!”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용하던 연회장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지고, 몇몇 소궁주와 부족장 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삼궁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빙후가 여기서 그 사실을 터트릴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빙후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빙제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연회장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침묵 속에 빙후의 말을 기다렸다.

    빙후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주 약간의 치료는 필요하지만 말예요.”

    사람들의 표정은 심각했다.

    빙후는 아주 약간이라 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빙제가 건재하다면 이 자리에 안 나올 리가 없을 테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빙후가 다시 말했다.

    “북해십이비와.”

    연회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빙후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삼궁주가 빙제께서 회복하시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먼 길을 달려와 준 삼궁주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삼궁주가?”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북해십이비가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왜 하필 삼궁주인가?

    “어째서 삼궁주입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그는 바로 나서기 좋아하는 팔궁주였다.

    자신에게 집중된 사람들의 관심을 내심 기뻐하며 팔궁주는 사뭇 거만하게 말했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대체 누가 무슨 권한으로 이 중대한 일을…….”

    “나예요.”

    빙후가 팔 궁주의 말을 끊었다.

    “바로 내가 결정했어요. 문제가 있나요?”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얼굴로 빙후가 말했다.

    팔궁주는 발끈했다.

    “왜 없습니까? 빙제님의 안위가 달린 일을 어째서…….”

    “내가 빙후니까.”

    단호한 목소리로 빙후가 말했다.

    “북해의 빙후는 나예요. 만일 빙제께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그 모든 책임을 질 것입니다.”

    팔궁주를 내려다보는 빙후의 시선엔 한기마저 흘렀다.

    “아니면, 당신이 책임을 질 건가요?”

    “웃.”

    빙후의 시선 앞에 팔궁주는 움찔했다.

    빙제의 목숨에 책임을 지라니, 그런 일은 못 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빙후다.

    팔궁주로서는 그녀의 처사에 항의할 명분이 부족했다.

    하지만 전혀 예상못한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었다.

    “책임을 지겠다 하셨습니까?”

    말한 사람은 바로 일궁주였다.

    젊고 강인한 일궁주는 빙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빙제님의 목숨은 그 무엇도 대신하지 못합니다. 대체 어떻게, 무엇으로 빙후께서 책임을 지시겠다는 말입니까?”

    설령 빙후의 목숨이라 해도 빙제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일궁주의 말은 지극히 옳았다.

    그러나 빙후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래요. 빙제의 목숨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지요.”

    요염하기까지 한 미소를 지으며 빙후가 답했다.

    “그러니 만일 일궁주가 저 대신 상황을 수습하겠다면 그 또한 기꺼이 바라는 바예요.”

    일궁주의 눈이 번득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전권을 쥐는 건 그 의미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아쉽군요. 일궁주께서 흉수의 배후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일궁주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그 옆에 서 있던 노년의 부족장이 즉시 소리쳤다.

    “지금 빙후께서는 일궁주님을 의심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빙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결백하다는 증거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요. 안 그런가요?”

    노년의 부족장은 움찔했다.

    그건 맞받아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빙후의 얼음 같은 시선이, 수많은 싸움을 거쳐 온 부족장마저 한순간 주춤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락.

    빙후는 고개를 들어 연회장을 보았다.

    그녀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들을 차갑게 응시하며 빙후는 말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저도 그렇지요.”

    조용한 연회장에 빙후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므로 모든 시시비비는 빙제께서 돌아오신 후에 논의할 일입니다. 지금은 빙제님을 치료하는 것이 최우선이에요.”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전권을 쥔 사람이 바로 빙후라는 걸 명확히 하는 선언이기도 했다.

    지금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빙후뿐이니까 말이다.

    물론 나중에 이것조차 계략이라고 밝혀질지는 몰라도 말이다.

    “빙제님의 회복은,이미 말한 대로 북해십이비와 삼궁주가 주관할 것입니다. 이 모든 책임은 당연히 제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슥.

    일궁주를 돌아보며 빙후가 요염하게 미소를 지었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저와 삼궁주를 마음대로 하셔도 되겠군요.”

    그건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나이 든 부족장들조차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일궁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못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겠지요.”

    “후후.”

    빙후는 웃었다.

    “기꺼이.”

    일궁주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지켜보던 삼궁주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지만 빙후는 짐짓 못 본 척했다.

    슥.

    빙후는 고개를 돌려 연회장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의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빙후의 결정을 뒤집을 명분도 없는 데다가, 일이 어찌 되든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빙후가 말했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들을 아직 소개하지 않았군요.”

    빙후는 운현과 제갈기호, 독고랑이 서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평정을 되찾은 사람들도 일제히 운현 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한 제갈기호가 슬쩍 운현에게 말했다.

    “우릴 소개하려나 봅니다.”

    제갈기호의 짐작대로였다.

    그사이, 삼궁주가 사람들의 시선을 헤치고 운현에게 다가왔다.

    아마도 통역을 해 주려는 것이리라.

    사락.

    빙후는 하얀 손을 들어 제갈기호를 향하며 말했다.

    “먼저, 무림맹 사절이신 제갈 공자님입니다.”

    삼궁주가 빙후의 말을 통역하고 제갈기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좋을 리가 없었다.

    북해와 무림맹은 기본적으로 적대 관계인 데다가, 빙제 암습 사건으로 분위기는 이미 최악이다.

    쫓겨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할 정도였다.

    “호위로 오신 독고 대협입니다. 남쪽에서는 상당한 고수시라 하더군요.”

    사람들의 시선이 독고랑에게로 향했다.

    몇몇 무사들과 부족장들의 도전적인 눈빛이 날아들었으나 독고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 것이 다였다.

    “그리고.”

    빙후가 운현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까지와 사뭇 다른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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