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북해의 연회
운현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금실로 수놓은 하얀 비단 옷을 입고, 귀부인이신데…….”
중간에 말이 이상하게 된 건 ‘어깨를 드러낸’이라는 말을 급히 뺐기 때문이다.
소궁주의 표정이 단숨에 구겨졌다.
“혹시 낙일을 보여 주었나요?”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꺼내지도 않았고요.”
보여 달라 했어도 보여 줄 리가 없다.
아니, 사실은 보여 줄 수가 없다.
낙일의 검신은 없어졌으니까.
“그래요?”
소궁주는 손가락을 턱에 대고 생각에 잠겼다.
사뭇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귀여워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소궁주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왜 웃어요?”
“아닙니다. 그냥…….”
얼버무리려던 운현은 슬쩍 용기를 내 보았다.
“소궁주님의 모습이 조금 귀여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소궁주는 단박에 잘라버렸다.
운현은 머쓱해졌다.
“내가 귀엽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아니…….”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요.”
운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소궁주가 말을 이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소궁주의 표정은 진지했다.
운현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무슨 일입니까?”
소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머뭇거림은 길지 않았다.
“……얼마 전 빙제께서 암습을 당하셨어요.”
운현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북해 빙제가 암습을 당하다니, 황실이라면 천하가 발칵 뒤집힐 일이다.
“외부에는 알리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운현의 말에 소궁주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곧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나.’
운현의 짐작대로였다.
북해빙궁은 처음이지만 결코 비상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제일 먼저 확인할 것은 따로 있었다.
“빙제께서는 어떠십니까?”
“무사하세요. 다만, 치료가 필요해요.”
“치료요?”
“네.”
소궁주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열두 개의 빙정을 가진 열두 명의 북해십이비가 빙제께 기운을 불어넣을 거예요.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내가 제어해요.”
“소궁주께서요?”
소궁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신음을 흘렸다.
설명은 간단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열두 명의 북해십이비와 빙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빙제의 상태가 위중함을 말해 준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빙제의 목숨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막중한 책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에요. 설령…….”
“그게 아니라.”
운현이 소궁주의 말을 끊었다.
“소궁주님이 괜찮으시냐는 말입니다.”
소궁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을 보았다.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북해십이비들의 내력을 제어하는 일입니다. 그 여파나 충격이 결코 작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소궁주는 그제야 깨달았다.
운현은 그녀를 걱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훗.”
소궁주는 실소를 흘렸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비파로 북해십이비를 제어할 생각이니까요.”
“비파요? 아!”
운현은 그제야 십이궁주의 말을 떠올렸다.
십이궁주는 소궁주의 비파 연주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음률을 통해 치료 과정을 총괄하는 것이리라.
“그렇군요.”
“네, 그래요.”
운현은 또 다시 머쓱해졌다.
“당신께 부탁할 것은 따로 있어요.”
소궁주가 말했다.
비록 그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소궁주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저희가 치료를 하는 동안 호위를 해 주세요.”
운현은 잠시 생각했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암습을 한 자가 여전히 빙궁 내부에 있다는 뜻입니까?”
“그래요.”
소궁주는 이를 악물었다.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
오죽하면 빙후가 십이궁주를 홀로 그녀에게로 보내야 했을 정도로 말이다.
북해십이비도 치료 중에는 움직이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오로지 북해를 위한 힘이니, 소궁주나 빙후의 권력 다툼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북해십이비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를 호위하는 건 처음이지만 저와 독고 제라면 괜찮겠지요. 아, 혹시 다른 곳으로 쳐들어온다든가 하는 일은.”
“없어요. 치료가 이루어지는 곳은 철저히 폐쇄된 곳이니 설령 당신 혼자라도 가능할 거예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궁주는 잠깐 주저하다가 말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늘 차갑고 날카롭던 소궁주의 이런 모습은 어쩐지 귀엽고 신선했다.
하지만 그 탓일까?
소궁주의 눈초리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크흠.”
운현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소궁주가 말했다.
“그럼 연회에서 봐요.”
“네? 연회요?”
“아, 말하지 않았던가요?”
깜빡했다는 듯 소궁주가 말했다.
“잠시 후 연회가 있어요. 무림맹에서 온 사절을 환영하는 북해빙궁의 공식 연회지요.”
운현은 당황했다.
연회라니 듣지도 못했다.
“잠시 후요?”
“네.”
소궁주가 빙긋 웃었다.
“빙궁의 소궁주와 부족장 들이 참석하는 아주 중요한 연회예요. 무림맹에서 대체 무슨 말을 가지고 왔을지, 다들 기대하고 있답니다.”
소궁주의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며 운현은 그녀가 일부러 전언을 빼먹었음을 확신했다.
“으음.”
운현은 신음을 흘렸다.
연회는 익숙하지 않은 데다 좋은 일이 있었던 기억도 없다.
무엇보다 그런 공식적인 자리는 영 불편하기만 하다.
“그럼, 잠시 후에 연회장에서 봬요.”
소궁주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사락.
“잠깐만요.”
운현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돌아보는 소궁주에게 운현이 물었다.
“아까 그 귀부인은 누구십니까?”
소궁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건 금방 알게 될 거예요.”
사박.
소궁주는 몸을 돌려 그대로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갑자기 소궁주의 표정이 싸늘해진 것을 보니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히 짚이는 곳은 없다.
‘어, 혹시 몰라봐선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하지만 소궁주의 태도를 볼 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운현은 문득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똑같이 말하네.’
조금 전의 귀부인도, 소궁주도 같은 말을 했다.
금방 알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말을 할 바엔 차라리 그냥 알려 주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하던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곧 연회가 있다.
그것도 북해빙궁의 정식 연회가.
당장 사절단의 정사인 제갈기호를 찾아야 했다.
운현은 급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기심 많은 제갈기호가 얌전히 방에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
북해에서도 연회는 비슷했다.
비록 사람도 음식도 겉모습도 달랐지만 어딘가 들뜬 듯한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방에서 드리운 크고 긴 휘장들이, 비록 남쪽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지만, 화려하면서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도 똑같았다.
“아닙니다. 아주 달라요.”
체격이 크고 후덕해 보이는 제갈기호가 연회장을 보며 말했다.
“일단 여자들이 더 예쁘잖습니까? 노출도 과감하고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제갈기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근처 복도에서 빙궁의 시녀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대화가 되는지 신기했지만, 제갈기호와 시녀들의 분위기는 사뭇 화기애애하기까지 했었다.
물론 운현에 의해 끊기긴 했지만 말이다.
“북해가 춥다더니 여름엔 아주 눈이 즐겁네요. 뭐,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바람직합니다. 하하하.”
제갈기호는 연신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짧은 여름을 즐기려는 것인지, 혹은 길고 어두운 겨울에 대한 반발인지 몰라도 북해 여인들의 옷은 노출이 많았다.
운현이 보았던, 어깨를 노출한 귀부인의 복식이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오우야. 저분은 가슴이 아주…….”
“크흠.”
자신도 모르게 제갈기호의 시선을 따라갔던 운현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지금 빙궁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하니까요.”
빙제가 암습당한 사실은 제갈기호도 안다.
운현이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갈기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네. 그렇겠지요. 지금도 저희를 노려보는 눈들이 아주 많아 보이네요.”
연회장은 화려하고 들뜨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강렬한 인상을 지닌 사내들은 운현과 제갈기호를 향한 경계의 시선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북해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이들 같은데, 그중에는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움츠러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갈기호는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모르는 척, 상관없는 척, 자연스러운 척하는 게 좋아요.”
홀짝.
“컥!”
손에 든 잔을 무심코 들이키던 제갈기호는 기침을 했다.
“아니, 이렇게 센 술을 대체 무슨 생각으로…….”
눈을 찌푸리고 잔을 보던 제갈기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야, 저분은 몸매가 아주 예술이네요.”
강한 술에 대한 불평은 금방 잊어버리고 제갈기호는 흐뭇한 미소까지 지었다.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고 안심해서인지 생각이 그대로 말로 나오고 있었다.
‘끄응.’
운현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제갈기호의 말은 어떤 면에선 옳았다.
구태여 굳어 있을 이유도, 먼저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 필요도 없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운현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하긴, 독고 제보다는 나을지도.’
운현의 옆, 독고랑이 날카로운 살기를 풍기며 서 있었다.
덕분에 연회장에서 오직 운현 일행의 주위에만 아무도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다른 자들이 경계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대부분 독고랑 탓이었다.
다가오면 누구든지 가만두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독고랑은 팍팍 풍기고 있었으니까.
“후우.”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연회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
“저자들이 삼궁주가 데려온 자들입니까?”
빙궁의 팔궁주가 제갈기호와 운현, 독고랑을 보며 말했다.
“대단할 것 없군요. 저런 정도의 기세라면 우리 부족의 용사중에도 많아요.”
그건 허세였다.
독고랑의 기세는 북해에서도 보기 드문 것인 데다, 팔궁주의 부족은 중소 부족에 불과하니까.
무엇보다 독고랑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팔궁주가 할 말은 아니다.
“경솔히 판단해서는 안 되지.”
오궁주는 천천히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 삼궁주가 데려온 자다. 실력 이전에 무슨 계략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어.”
독고랑의 기세는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큰 위협은 아니다.
현재 빙궁에서 제일 유력한 세력을 형성한 일궁주에게도 저 정도의 용사들은 있으니까.
문제는 저자를 데려온 삼궁주다.
그녀의 심계를 생각할 때, 어쩌면 저자는 빙궁의 후계 구도를 뒤집을 회심의 한 수가 될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 기회에 일궁주와 삼궁주가 크게 싸워 줬으면 좋겠군요.”
맞은편에 서 있던 칠궁주가 원독이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