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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82화 (182/530)
  • 182화. 금방 알게 될 거예요

    “그만두세요.”

    소궁주가 한 발 물러섰다.

    빙후를 똑바로 노려보며 소궁주가 말했다.

    “당신은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슥.

    시선을 피하듯 소궁주는 빙제를 바라보았다.

    “치료는 언제지요?”

    “내일 밤.”

    빙후는 순순히 화제의 전환을 받아들였다.

    “가장 음기가 강할 때 시작할 거야. 너의 비파와 북해십이비 전부, 그리고 열두 개의 빙정이 필요해.”

    소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빙제님의 직속 호위대가 널 지켜 줄 거다.”

    치료 중에 북해십이비와 소궁주는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가 된다.

    호위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소궁주는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맡길 사람은 따로 있어요. 호위대는 외곽을 경계하도록 하세요.”

    빙후가 다시 눈을 빛냈다.

    “네가 동행한 그 손님들 말이니?”

    소궁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빙후는 다시 물었다.

    “흐음, 네가 목숨을 맡기는 사람이라니, 만나 보지 않을 수가 없…….”

    휙.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세요.”

    소궁주는 고개를 돌려 빙후를 노려보았다.

    “내가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지 않도록 말예요.”

    대답을 요구하듯 소궁주의 시선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하. 알았어.”

    빙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가슴 위쪽까지 드러낸 그녀의 하얀 어깨가 등불 아래 요염하게 움직였다.

    “그만둘게.”

    그제서야 소궁주의 시선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소궁주는 누워 있는 빙제를 쳐다보았다.

    얇은 휘장 안의 빙제는 그녀가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지만,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돌아가겠어요.”

    빙제를 쳐다보던 소궁주가 말했다.

    빙후의 인사나 배웅은 바라지도 않은 듯, 그녀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사박.

    소궁주가 떠나고, 남은 빙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누가 제 딸 아니랄까 봐 저런 것까지 저와 똑같네요.”

    누워 있는 빙제를 돌아보며 빙후가 말했다.

    “아마 저 아이와 저는 평생 화해하지 못하려나 봐요. 하긴 저 아이는 저보다 당신을 항상 더 좋아했으니까요.”

    슥.

    빙후는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빙제의 얼굴을 살짝 매만졌다.

    그리고 붉은 입술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 어차피 미움받을 거라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편이 낫겠죠?”

    빙후는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침없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락, 사락.

    금실로 수놓은 그녀의 하얀 비단옷이 바닥에 쓸리며 나지막이 소리를 냈다.

    ***

    운현에게 주어진 방은 크고 화려했다.

    층도 제법 높아서,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북해의 절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비록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지러울 정도였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누가 밖에서 오진 못하겠는데?”

    “그래도 모르는 일입니다.”

    독고랑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곳은 낯선 땅이니까요.”

    운현은 웃었다.

    설마 그러랴 싶었지만 독고랑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어서 반박은 하지 않았다.

    “독고 제의 방은 어떻소?”

    “좋습니다.”

    그건 의외의 반응이었다.

    보통 독고랑은 모른다고 하거나 상관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금방 나왔다.

    “언제라도 대인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농담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그리 안 되길 바라지만, 어쩌면 그리될 수도 있겠소.”

    독고랑의 눈빛이 변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실은.”

    독고랑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다.

    운현이 천천히 입을 열던 그 순간이었다.

    슥.

    독고랑이 고개를 돌렸다.

    그 이유를 운현도 바로 알아차렸다.

    누군가 방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사락.

    들어온 사람은 운현이 처음 보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금실로 수놓은 하얀 비단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귀부인은 거침없이 들어오다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운현을 보았다.

    “아.”

    그녀는 놀란 듯 멈춰 섰다.

    운현도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구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누가 올 거라는 말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들어왔다.

    ‘방을 잘못 찾아왔나?’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빙궁은 크고 방도 많으니까.

    툭.

    운현은 우선 독고랑의 팔을 가볍게 쳐서 기세를 누그러뜨리도록 했다.

    자칫 저 여인이 놀라서 소리라도 지를지 모르니까.

    그리고 운현은 한껏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정확히는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북해의 말은 모르기 때문이다.

    “어, 저는, 오늘, 여기, 왔습니다.”

    운현은 자신의 언어를 과장된 손짓과 몸짓을 섞어 말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바로 벽에 부딪혔다.

    자신을 무어라 표현해야 하나?

    무림맹이니 사절이니 하는 말은 손짓으로 표현하기엔 너무 추상적이다.

    “저는 운현, 운현입니다. 이 사람은 독고랑, 독고랑입니다.”

    운현은 천천히 자신과 독고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특별히 두 번씩 말했다.

    “풋.”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중년의 여인이 웃음을 흘린다.

    살짝 입술을 가리고 웃는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휴우, 다행이다.’

    운현은 내심 안도했다.

    적어도 적의가 없다는 건 전해진 듯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지라, 그녀가 비명이라도 질렀다면 꽤나 난처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소궁주를 닮았는데?’

    귀부인의 붉은 입술과 강렬한 눈동자는 소궁주와 비슷했다.

    어쩌면 운현이 북해 여인들을 잘 몰라서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지만.

    “저기, 부인께서는, 방을, 잘못, 찾으신 것, 같습니다.”

    운현이 다시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엔 잘되지 않았는지 귀부인은 운현을 보며 웃고만 있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운현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어, 이게 아닌데?’

    재미있게 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 나가게 하고 싶은 것이다.

    가능한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말이다.

    운현이 난감해 하는데 문득 독고랑이 말했다.

    “저는 제 방에 있겠습니다.”

    “어? 아, 그러시게.”

    독고랑은 운현에게 가볍게 예를 표하고는 나갔다.

    귀부인을 슬쩍 쳐다보는 독고랑의 눈빛에 가벼운 경계심이 스쳤지만 의사소통에 열중한 운현은 보지 못했다.

    탁.

    독고랑이 나가고 운현은 최대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열심히 손과 고개를 흔드는데 문득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네요.”

    ‘어?’

    그 목소리는 분명 귀부인의 고운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귀부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전 방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니에요. 공자님을 뵈러 왔어요.”

    운현은 멍하니 귀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남쪽 말은, 비록 발음은 조금 어색했지만 상당히 유창했다.

    그럼 지금까지 자신이 한 노력들은 뭐란 말인가?

    운현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할 때였다.

    사락.

    “죄송합니다.”

    귀부인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드러난 옷차림 탓에 잘못하면 속살이 보일 것 같아 운현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손님을 당황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운현운현 님.”

    이름을 두 번 말한 건 분명 장난이리라.

    그녀의 하얀 어깨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운현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운현운현이 아니라 운현입니다. 그리고 저야말로 추한 꼴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그녀가 남쪽 말을 모르리라 단정한 건 자신이다.

    따지고 보면 억울할 건 없다. 딱히 큰 결례를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매우 부끄럽긴 하지만.

    슥.

    운현이 고개를 들자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귀부인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운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비슷하네.’

    이렇게 가까이 보니 소궁주와 정말 닮았다.

    아마도 소궁주가 몇 년만 지나 원숙한 분위기를 풍기게 되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귀부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

    그녀는 분명 운현을 만나러 말했다.

    귀부인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삼궁주가 모시고 온 손님이 있다고 해서요. 당신 맞지요?”

    그녀는 운현을 대함에 전혀 스스럼이 없었다.

    아마도 높은 지위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밴 습관이 분명했다.

    황궁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까.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다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무림맹 사절단 부사로 온 서기, 운현이라 합니다.”

    “서기요?”

    “네.”

    “흐음.”

    귀부인은 손가락을 입술에 살짝 대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검보다는 학문에 뛰어난 분이시겠군요.”

    “학문도 그리 뛰어나진 못합니다.”

    “후후후.”

    운현의 말에 귀부인이 우아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아까부터 그녀는 계속 웃고 있었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재미있다는 듯 말이다.

    “저기, 실례지만 누구신지 여쭤 봐도 되겠…….”

    사락.

    귀부인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운현이 흠칫하는데 그녀는 운현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당신의 눈은 그와 참 많이 닮았군요. 정말 이상하네요. 외모도, 분위기도 전혀 다른데.”

    “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귀부인이 말했다.

    “그는 이미 위대한 사람이었지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처녀에 불과했고요. 그의 눈에는 내가 정말 하찮게 보였을텐데도, 그는 나를…….”

    귀부인의 눈동자에 눈물이 어렸다.

    ‘윽.’

    운현은 여인에게 익숙하지 못하다.

    눈물에는 더더욱 약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비치는 사람은 결코 운현이 아니다.

    “……저기.”

    운현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사락.

    “아쉽지만 이제 시간이 없네요.”

    귀부인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자신의 것에 손대는 걸 그 아이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거든요. 아, 그리고.”

    그녀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제가 누군지는 금방 알게 될 거예요.”

    그 눈웃음은 한순간 멍해질 정도로 매력적이었지만 찰나지간에 사라졌다.

    사박, 사박.

    귀부인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탁.

    운현은 정신이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자신이 뭔가 헛것을 봤나 생각하던 바로 그때였다.

    쾅.

    거칠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미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어…….”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운현이 아는 사람이었다.

    “소궁주님?”

    소궁주는 대답 대신 날카로운 시선으로 방을 휙 돌아보았다.

    “방금 누군가 오지 않았나요?”

    “아, 그게…….”

    운현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지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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