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빙후와 소궁주
“우와.”
빙궁의 성문을 지나며 제갈기호는 고개를 들고 감탄을 흘렸다.
바로 눈앞에서 본 빙궁은 마치 하늘까지 닿을 듯 높았다.
게다가 눈처럼 하얀 외벽은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보일 정도였다.
제갈기호가 일견 어이없는 질문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빙궁(氷宮)이라지만, 설마 진짜 얼음은 아니지요?”
“맞아요.”
십이궁주의 대답에 제갈기호는 당황했다.
“네? 이게 얼음이라고요?”
“얼음이 아니다지만, 얼음이다예요.”
“네에?”
“네?”
운현과 제갈기호가 동시에 십이궁주를 돌아보았다.
십이궁주는 짐짓 으쓱대며 말을 이었다.
“이건 다른 얼음과는 달라요. 튼튼하고 녹지도 않아요.”
“어, 불을 가져다 대어도요?”
제갈기호의 말은 운현이 물으려던 것이었다.
십이궁주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안 녹아요. 그 정도는 나도 해 봤다예요.”
“호오. 특이한 얼음이라는 건가요?”
제갈기호는 새삼 감탄을 흘리며 고개를 들어 빙궁을 올려다보았다.
“하긴 애초에 이런 건축물이 평범한 얼음이라는 게 말이 안 되니…….”
얼음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어느 정도 이상의 크기가 되면 아무리 혹한이라 해도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런 건축물이 평범한 얼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것도 지금처럼 따뜻한 날씨에 말이다.
‘그럼 뭐지? 뭔가 북해의 특이한 신물 같은 건가?’
운현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제갈기호가 다시 물었다.
“그럼 빙궁 전체가 얼음인가요?”
역시나 제갈세가답게 호기심이 왕성하다.
덕분에 운현은 따로 물어보는 수고를 덜었다.
궁금한 건 운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야예요. 본래 신들이 만들었다, 이 모습이 아니었다예요. 하지만 지금도 토대는 확실히 얼음이다요.”
“신들요?”
제갈기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갑자기 신화가 튀어나오니 미덥지가 않은 것이다.
“어? 정말이다예요. 빙궁 근처는 아무것도 안 자라요. 풀도 없고, 나무도 없고, 동물도 없고, 벌레도 없다예요.”
십이궁주는 울컥한 듯 열심히 말했지만 제갈기호는 심드렁했다.
하지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였나.’
빙궁 주위는 유독 을씨년스러웠다.
심지어 궁 주변에 있을 법한 마을도 없었다.
아마도 종교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다.
“네, 네. 권력자들은 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하지요. 자신들의 기원이 신적인 것에서 비롯한다고 말입니다.”
그건 십이궁주에겐 어려운 말이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마차를 타고 빙궁에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제갈기호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십이궁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차 안 타면 어떻게 들어가요? 뛰면 오래 걸려요.”
제갈기호는 쓴웃음을 흘렸다.
황궁에 말이나 마차를 타고 들어가는 건 오로지 군주, 혹은 특별한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하지만 북해에 그런 관례는 없는 듯했다.
따각.
빙궁에 들어선 마차는 작은 광장 같은 곳에 멈췄다.
달칵.
소궁주와 십이궁주, 운현과 제갈기호는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석에 있던 빙설과 독고랑도 훌쩍 내려섰다.
하얀 빙궁 안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계단이 일행의 눈앞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탁탁탁.
수십 명이 넘는 시녀들이 일제히 빙궁 안에서 나왔다.
빠르고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온 그녀들은 소궁주의 좌우에 늘어서더니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북해의 언어로 말한 건 분명 소궁주에게 올리는 예법이리라.
슥.
소궁주는 꼿꼿이 서서 그들의 예를 받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지금 그녀의 눈동자에는 군왕의 위엄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호오.”
제갈기호가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시녀들이 예를 표하는 사이로 삼궁주는 천천히 하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사박, 사박.
그 모습은 더없이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먼 길을 떠났던 북해빙궁의 삼궁주가 빙궁에 돌아온 것이다.
***
사박.
소궁주는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시녀들이 두껍고 화려한 장막을 좌우로 걷고, 소궁주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뒤로 가만히 장막이 닫혔다.
뒤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서 오렴.”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소궁주는 고개를 들었다.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백색 비단옷을 입은 귀부인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매혹적인 눈웃음과 요염한 붉은 미소, 어깨를 드러낸 화려하고 퇴폐적인 모습은 누구라도 단번에 매료시킬 듯했다.
“손님들은 같이 오지 않았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귀부인이 말했다.
가벼운 몸짓이었지만 퇴폐적인 분위기가 단번에 사라지고 마치 아이 같은 순진함이 묻어났다.
“아쉽구나. 나도 보고 싶었는데.”
살짝 한숨을 쉬는 귀부인의 모습은 누구라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당장이라도 돌아가 손님을 데려오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소궁주에겐 통하지 않았다.
“어째서.”
굳은 표정으로 소궁주가 말했다.
“이렇게 되도록 놔두신 건가요? 빙후 마마.”
소궁주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녀의 시선 만큼이나.
“그냥 놔두다니, 너무하는구나.”
빙후라 불린 귀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다고 말하는 거니?”
그건 보는 이의 가슴마저 녹일 듯한 안타까운 눈빛이었다.
하지만 소궁주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볍게 조소를 흘렸다.
“글쎄요, 어떨까요?”
빙후를 똑바로 쳐다보며 소궁주가 말했다.
“자신의 손을 벗어난 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일이 일어나게 놔둘 분이 아니잖아요? 어머니는요.”
“물론 그렇지.”
사락.
빙후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얇은 휘장으로 가린 화려한 침상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지아비의 목숨까지 걸고 그리하지는 않는단다.”
침상에는 초로의 노인이 누워 있었다.
머리와 수염은 비록 희었으나 체구가 장대하고, 눈을 감고 있음에도 강렬한 풍모를 잃지 않은 거구의 사내.
“더구나 북해의 주인이신 빙제님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그는 바로 빙제였다.
빙궁의 주인이자 북해의 지배자인 그가 지금은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슥.
빙후는 얇은 휘장 사이로 손을 뻗었다.
가늘고 흰 그녀의 손가락이 빙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소궁주의 표정은 더욱 싸늘하게 굳고 있었다.
빙제를 내려다보는 빙후의 시선에는 조금의 온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흉수는 누구지요?”
“몰라.”
빙제를 내려다보며 빙후가 말했다.
그녀는 신기한 물건을 보듯 빙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빙궁에서 빙제의 암습을 사주할 수 있는 자라면 결국 열두 소궁주와 아홉 부족장 중에 한 사람이겠지.”
“혹은 그들 중 여럿이거나요.”
그 말에 빙후는 소궁주를 돌아보았다.
“현재 빙제께서 이리 되신 걸 아는 사람은 나와 너, 그리고 십이궁주 그 아이뿐이란다.”
“그래요.”
소궁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도박이었어요.”
빙제가 암습을 당했다.
일반적이라면 당장 비상 상황이 선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흉수들은 오히려 그 혼란과 동시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빙후는 빙제의 상태를 숨겨 버렸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덕분에 흉수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암습의 결과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빙제께서 건재하시다면 빙궁의 침묵은 분명 함정이겠지요. 진짜 흉수를 색출해 내기 위한.”
이 시점에서 빙궁을 떠나 반란을 일으키는 건 자신이 흉수라는 걸 자인하는 것과 같다.
빙제가 건재하다면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그러니 잠시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을 거예요. 빙제께서 승하하셨거나 위중한 상황이라면 그때 움직여도 문제는 없으니까.”
“그래. 그 여유가 바로 나와 너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였고 말이야.”
흉수들이 몸을 낮춘 채 사태를 지켜보는 그 잠깐.
그것이 바로 빙후가 노리던 것이었으며 소궁주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어머니다워요.”
“어머, 고마워.”
빙후는 빙긋 웃었다.
“네게 칭찬을 듣다니 정말로 기쁜걸?”
그녀의 웃음은 사람의 혼을 빼놓을 듯 매력적이었다.
빙후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들 여기 모여 있단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속으로는 오들오들 떨면서 말이야. 하지만 이젠 모두 알아차렸겠지.”
소궁주를 바라보며 빙후가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돌아왔으니까.”
이제 사태는 완전히 변해 버렸다.
흉수들도 지금은 자신들의 실책을 알아차렸으리라.
머나먼 남쪽에 있어야 했을 소궁주가 돌아왔으니까.
“사건 이후 빙궁을 떠난 사람은요?”
“없어.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닌가 봐.”
사락.
빙후는 빙제의 침상에서 물러났다.
더 이상 흥미가 없다는 듯 그녀는 빙제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다시 한번 암습을 시도할지도 몰라. 그 아이들은 나보다 널 더 무서워하거든.”
소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빙후의 지적은 옳았다.
아무리 빙후라지만 가질 수 있는 권력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소궁주는 다르다.
소궁주의 직위 자체는 비록 아무것도 아니지만, 다음 빙제의 권좌에 앉을 수도 있는 사람이 바로 소궁주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소궁주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어째서…….”
“십이궁주를 네게 보낸 것 말이니?”
빙후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가 먼저 원한 일이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우리에겐 적이 많아. 믿을 사람이라고는…….”
“우리라고 하지 마세요.”
소궁주가 차갑게 말했다.
“어떻게 그 아이를 혼자 보낼 생각을 할 수 있지요? 아무리 저와 빙설이 필요했다고 해도…….”
“혼자여야 했어. 아무도 몰라야 했으니까.”
빙후의 말에 소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빙궁에선 그 어떤 비정상적인 움직임도 없어야 했다.
십이궁주에게 호위를 동행시키면 필연적으로 일이 새어 나갈 것이다.
게다가 호위가 암습자로 돌변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위험하다 해도 십이궁주를 홀로 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아이는 네 생각보다 강해. 그리고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빙제님을 살리기 위해서는 북해십이비 전부와, 너와 네 비파가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소궁주는 반박하지 못했다.
십이궁주의 눈물에 소궁주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소궁주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서는 더 나은 선택이라 해도 말이다.
“덕분에 제가 여기 오게 되었지요. 어머니의 뜻대로 말예요.”
그 말은 결코 경의나 호의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그 말에 빙후는 오히려 빙긋 웃었다.
“내가 네 어미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네 이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 주렴.”
소궁주는 침묵했다.
빙후의 눈동자가 단번에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어머.”
사락.
빙후는 소궁주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매혹적인 빙후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너, 혹시 네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