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북해빙궁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운현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 마차가 보였다.
그리고 운현을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도 보였다.
운현이 가까이 갈 때까지 그들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벅.
멈춰선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늦은 것에다 낙일검을 잃어버린 죄책감이 더해져서 운현은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빙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 것을 운현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소궁주가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도.
슥.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크흠.”
제갈기호가 헛기침을 하고 빙설이 즉시 시선을 피했다.
독고랑은 언제나처럼 묵묵히 서 있었지만 십이궁주는 유난히 눈을 빛내며 운현을 쳐다본다.
‘응?’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이제 끝나신 건가요?”
십이궁주가 무언가 말하려는데 소궁주가 먼저 물었다.
운현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아, 네. 그런데, 저기…….”
어렵게 운현은 말을 이었다.
“여기서 하루만 더 머무르면 안 되겠습니까?”
소궁주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운현도 어쩔 수 없었다.
낙일을 잃어버렸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떠날 수도 없다.
어떻게든 하루라도 더 머물며 주변을 뒤져 봐야 했다.
비록 그것이 헛된 희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뭐라고 이유를 대야 하나?
운현이 온갖 핑계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하아.”
소궁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의외로 그녀는 순순히 말했다.
“그렇게 하길 원하시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우리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당신의 뜻을 거스르겠어요?”
‘엥?’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은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독고랑도 제갈기호도, 심지어 십이궁주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저기, 그게 무슨.”
“아, 그리고.”
소궁주가 고개를 들고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다음부터 수련은 조금 더 먼 곳에서 해 주세요. 갑자기 두려움에 떨며 깨어나는 건, 오늘로 족하니까요.”
사박.
소궁주는 그대로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그리고 십이궁주와 제갈기호가 역시나 동감이라는 듯 운현을 쳐다보았다.
“네?”
운현은 뒤늦게 반문했지만 소궁주는 빙설과 함께 이미 마차로 들어가고 있었다.
탁.
마차 문이 닫히고 운현은 소궁주와 제갈기호를 돌아보았다.
“어이쿠, 이러다 불이 꺼지겠네.”
“내가 땔깜 구해옵니다예요.”
제갈기호가 얼른 모닥불에 달라붙고 십이궁주가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운현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식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해가 이미 중천이었지만 일행은 아직 아침도 먹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일행은 하루가 아니라 이틀을 더 그 자리에 머물렀다.
간신히 또 하루의 말미를 더 얻은 운현은 수련까지 거르고 돌 하나하나 들춰 가며 주변을 뒤졌다.
하지만 낙일검의 검신은 찾지 못했다.
혹시 멀리 날아갔나 싶어 주변을 크게 돌아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결국 운현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검신이 빠졌을 거란 것도 추측이고.’
생각해 보면 손잡이가 멀쩡한데 검신만 달아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신을 손잡이에 고정하는 부분이 부서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결국 검신만 사라진 건가?’
어찌 되었건 낙일검의 검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운현을 보는 소궁주의 시선이 심각할 정도로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도.
결국 운현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하고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따각, 따각.
“드디어 황야가 끝났군요.”
제갈기호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부터 드문드문 푸른 풀들이 보이더니 어느새 주위는 온통 푸른 초원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황야가 끝나고 북해의 대초원이 시작된 것이다.
“곧 있으면 마을도 나오겠지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제갈기호가 말했다.
제대로 된 음식과 따뜻한 잠자리도 그리웠지만 무엇보다 우선 씻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궁주는 그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마을에 머물 시간은 없습니다. 이제 빙궁까지는 멀지 않으니 쉬지 않고 달릴 거예요.”
“네? 아니 왜요? 잠깐 마을에 들르는 정도는…….”
“우리는 이미 이틀을 허비했어요.”
소궁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무언가 말하려던 제갈기호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소궁주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현을 돌아보며 소궁주가 말했다.
“당분간 그 누구에게도 낙일을 보여 주지 마세요.”
그때 이후 부쩍 말이 없어진 운현은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요.”
소궁주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보여 줄 것도 없는데.’
보여 주려고 해도 보여 줄 검이 없다.
있는 것은 낙일의 손잡이와 칼집뿐, 겉은 그럴듯하지만 뽑으면 당장 탄로가 날 것이다.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이 있나요?”
뾰족한 소궁주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소궁주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자신을 도전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맘에 안드는 것이 있다면 똑바로 말을 하라는 듯이.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아니라……. 아!”
문득 운현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소궁주님.”
진지한 눈빛으로 운현이 말했다.
“빙궁에 가면 제일 먼저 빙제님을 뵙게 해 주십시오.”
소궁주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약속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운현은 다시 말했다.
“적어도 낙일검은 제일 먼저 빙제님께 보여 드리게 해 주십시오.”
소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운현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운현은 빙제를 만나야 한다.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소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한 말예요.”
“네?”
자신도 모르게 운현이 반문했지만 소궁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운현은 더 묻지 못했다.
창밖을 바라보는 소궁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
제갈기호는 불만이 많았다.
그는 내내 비스듬히 앉은 채 입술을 비죽 내밀어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어른인 데다 덩치까지 큰 제갈기호가 그러는 모습이 운현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도대체 북해까지 와서 도시에 가 보지도 못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요.”
제갈기호가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자고로 낯선 도시의 하룻밤만큼 풍류를 자극하는 환경이 또 어디 있다고. 아니, 북해의 미녀들이 기다리는데 그걸,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치다니요!”
신세타령은 이제 억울한 탄원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안 기다려요.”
십이궁주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기다리는 여자는 없다예요. 아예 몰라요.”
제갈기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십이궁주를 보았다.
“아저씨 아니고 오빠입니다. 아니면 오라버니요.”
“우엑.”
십이궁주는 혀를 내밀며 싫은 표정을 했다.
강호 무림에서 추근대는 남자들을 만나 본 그녀로서는 질색할 만도 했다.
제갈기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까짓것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마차를 돌릴 것도 아니고.”
그의 말대로였다.
소궁주의 의지가 단호하니 마차는 북해빙궁에 닿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대체 야영을 하는 그 며칠 동안 어떻게 마을 하나 없는 겁니까?”
제갈기호는 한탄을 했다.
밤에는 아무리 소궁주라도 마차를 세우고 쉬어야 했다.
하지만 하늘이 야속하게도, 일행이 야영하는 곳 근처에는 도시도 마을도 없었다.
있는 것은 그저 끊없이 펼쳐진 대초원 뿐이었다.
아마도 소궁주가 지름길을 택하고 있고, 그래서 마을이 드문 것이겠지만 말이다.
따각, 따각.
제갈기호가 분노와 체념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동안에도 마차는 달리고 있었다.
창밖을 보던 운현은 문득 풍경이 바뀐 것을 깨달았다.
“나무가 많군요.”
희고 가는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제법 빽빽했지만 가지가 별로 우거지지 않아서인지 보기에도 을씨년스러웠다.
“그렇군요.”
제갈기호도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북해도 살 만해 보이네요. 그냥 얼음 벌판만 있는 줄 알았더니 말입니다.”
“있어요.”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 역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나무들 아래 깊은 곳에는 일 년 내내 녹지 않는 땅이 있지요. 그러니 얼음 벌판이라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 추워 보이지는 않는데요?”
제갈기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여름을 대비하지 않아요.”
소궁주가 제갈기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여름은 금방 지나가니까요. 일 년 중 아주 짧은 동안만 찾아오는 여름을 지금 여러분은 보고 계신 거예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울창한 숲조차 스산하게 보인 건 그저 나무의 색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럼 겨울은 어떻습니까?”
운현이 물었다.
“숨을 쉬면 그 기운이 자신의 눈썹에 맺혀 얼어 버리지요.”
소궁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땀을 흘리지 않아도 피부의 호흡만으로 살갗이 얼고,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이 얼어 눈이 멀어요. 그것이 바로 북해의 겨울입니다.”
숨을 쉴 수도 없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건 그저 혹한 때문만이 아니리라.
그 표현이 어쩐지 그녀의 지나온 세월을 말해 주는 것 같아 운현은 가슴이 먹먹했다.
“휘유,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라니, 아주 지긋지긋한 땅이로군요.”
제갈기호가 혀를 내둘렀다.
“은혜의 땅이지요.”
소궁주는 조용하게 말했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이 땅의 고마움을 잊지 않아요.”
그녀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운현도, 제갈기호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따각, 따각.
마차는 천천히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와아!”
제갈기호가 탄성을 내질렀다.
운현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화악.
눈앞이 탁 트이며 드넓은 수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북해였다.
“이, 이곳이 북해…….”
제갈기호는 말을 더듬었다.
엄연히 내륙에 있음에도 ‘바다’라는 이름을 가진 북해는, 그 이름답게 대단히 넓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수면이 저 멀리 수평선을 이루고, 차가운 바람은 가슴이 탁 트일 정도였다.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네. 이곳이 바로 북해예요.”
소궁주는 북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저곳이.”
일행은 소궁주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투명한 바다 저편, 높이 솟은 하얀 건축물이 마치 환상처럼 서 있었다.
“바로 빙궁입니다.”
낮게 가라앉은 소궁주의 목소리에선 착잡한 감정이 묻어났다.
운현은 그녀가 빙궁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이야, 저게 빙궁이라고요?”
제갈기호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궁이라기보다 무슨 성채 같은데요?”
운현이 보기에도 그랬다.
투명한 북해 옆에 솟은 모습은 확실히 경외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그 외관은 궁이라기보다 성채에 가까왔다.
“그러고 보니.”
제갈기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북해빙궁에는 미녀와 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던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놈의 미녀와 보화는 어딜 가나 빠지질 않는가 보다.
“빙궁이라, 이거 기대가 되는군요.”
제갈기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따가닥, 따가닥.
북해의 준마들은 더욱 빠르게 초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북해빙궁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