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큰일 났다
사락.
소궁주는 운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모닥불 너머로 일렁였다.
“천문을 읽고 계셨나요?”
소궁주가 말을 걸었다.
천문은 별자리를 통해 날씨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다.
운현은 잠시 놀랐다가 곧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아쉽군요.”
소궁주가 가늘게 웃으며 말했다.
“천문을 살피셨다면 앞으로의 일이 쉽지 않음을 보셨을 텐데요.”
그건 사뭇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운현은 조용히 소궁주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과거, 검성이 북해에 남긴 상흔은 여전히 깊고 커요. 어쩌면 당사자들에겐 여전히 현재인지도 모르지요.”
운현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은 낙일의 주인이에요.”
타닥, 타닥.
모닥불 너머로 소궁주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운현을 보고 있었다.
“그때처럼 빙제께서 나서지 않으신다면, 어쩌면 당신은 피의 강을 건너야 할지도 몰라요.”
‘피의 강’이라는 표현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과거 검성이 그러했듯 운현이 검으로 북해 전부를 꺾어야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운현은 그녀의 말 속에서 그녀가 말하지 않은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소궁주께선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겠군요.”
소궁주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맞아요.”
그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아요.”
사박.
소궁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아니, 믿어선 안 되는 사람이지요.”
모닥불 너머로 보이는 소궁주의 자태가 신기루처럼 일렁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말이다.
“저기.”
막 돌아서려는 그녀를 운현이 불렀다.
소궁주가 돌아보자 운현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혹시 낙일에 대해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소궁주의 그림 같은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잊으셨나 본데 그 검이 검성께 전해진 건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운현은 그녀가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당시 정황 같은 게 아니라 낙일 그 자체에 대해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소궁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글쎄요? 그 검에 대해서는 오직 빙제님과, 북해제일지이신 제 어머니만 아실 뿐이에요.”
결국 소궁주는 모른다는 뜻이다.
운현은 조금 낙담했다.
“그렇습니까?”
“다만 한 가지.”
소궁주가 말했다.
“제가 듣기로 낙일은, 북해빙궁 그 자체와 함께 아득한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하더군요.”
사락.
그 대답을 끝으로 소궁주는 몸을 돌렸다.
덕분에 운현의 얼굴이 온통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뒤덮이는 것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
‘뭐?’
운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낙일이 북해빙궁과 함께 전해져 온 것이라고?’
방금 들은 말을 운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역시 말도 안 돼.”
다음 날 새벽, 운현은 낙일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렇게까지 오래된 검이 아니야.”
분명히 그랬다.
낙일검의 검집에 새겨진 문양이나 검자루의 형식은 훌륭하고 정교하지만 아주 오래된 고대의 것이라곤 할 수 없었다.
정확하진 않아도 많이 봐주어야 백여 년 정도나 될까?
수백 년 된 고검(古劍)이 즐비한 상황에서는 이름을 내밀지도 못한다.
“북해빙궁이 세워진 때가 백 년 전이라던가 그런 건 아닐 테고…….”
그럴 리는 없다.
북해빙궁은 적어도 수백 년 전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천 년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하지 않던가?
“설마 소궁주가 뭘 잘못 알고 있나?”
중얼거리던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자신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게 이런 뜻은 아닐 것이다.
물론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닐 테지만 말이다.
“으음.”
난감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던 운현은 조금 생각을 달리해 보기로 했다.
“이 검이 정말 그렇게 오래된 검이라고 하면, 왜 이런 모양이 되었을까?”
답은 간단히 나왔다.
“칼집과 손잡이를 새로 만들었다는 뜻이겠군.”
비록 검날은 그 재질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검집과 손잡이는 확실히 근래의 것이다.
아주 오래된 검신에 칼집과 손잡이를 새로 만들었다면 아마도 이런 모양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함부로 손을 대었을까?”
보검이라면, 더구나 북해빙궁의 자존심을 걸 정도로 중요한 검이라면 조금 낡았다고 손잡이를 새로 만들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무슨 사고 같은 것으로 불타거나 해서 어쩔 수 없이 새로 만들었다거나…….”
그랬다면 처음과 똑같은 모양으로 복원했을 터이다.
물론 북해의 관념이 남쪽과 똑같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혹은 처음부터 칼집과 손잡이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는지도…….”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운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쯧, 어차피.”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으로선 어느 것이나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니까.
저벅.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소궁주에게 물어보았다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후우우.”
운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번잡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검 한 자루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낙일에 맺혀야 할 검기는 여전히 흔적조차 없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그저 검을 수련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스르륵.
낙일이 운현의 움직임을 따라 물 흐르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어 사방이 밝아 왔기 때문일까?
문득 낙일의 검신이 시리도록 투명해 보인다고,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백호수련검의 흐름은 운현에게 한눈을 파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후욱.
운현은 어느새 낙일과 하나가 되어 백호수련검을 펼쳐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그때처럼 그것은 갑자기 찾아왔다.
웅.
‘아.’
하늘과 땅 사이에 그것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하늘과 땅이 그 안에 있다 말해야 옳을지 모른다.
그 거대한 흐름은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있었다.
땅도, 하늘도, 그리고 아득한 별들의 흐름마저도.
그것은 운현이 단 한 순간, 무제와의 비무에서 보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아아.’
세계를 휘감고 흐르는 운명과도 같은 거대한 흐름.
그 앞에서 운현은 말을 잊었다.
초식도, 움직임도, 호흡도 잊었다.
검조차도 잊었다.
그렇기에 낙일의 검날이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조차 없었다.
다만 거대한 전율만이 운현을 관통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웅.
‘나는 대체 무엇을 착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흐름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흐름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우웅웅웅.
눈물이 흘렀다.
이제 비로소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찾은 충족감이 운현을 가득 채웠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웅.
아까부터 울고 있던 낙일의 칼날이 시리도록 투명하게 변했다.
그리고 곧 강렬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운현은 깨닫지 못했다.
아니, 상관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운현은 낙일의 빛을 받아들였다.
화아악.
빛이 운현을 삼켰다.
아니, 운현이 빛을 삼켰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휘이잉.
바람이 옷자락을 흔드는 감각에 운현은 눈을 떴다.
아니, 이미 눈은 뜨고 있었다.
다만 그제야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을 뿐이다.
“후.”
나지막이 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직도 전율이 온몸을 흐르고 있었다.
“하하.”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곧 안타까운 한숨으로 변했다.
“후우우.”
가슴이 텅 빈 듯했다.
하지만 공허하지는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운현은 알게 되었으니까.
자신이 그토록 오랜 시간 찾아왔던 것을 말이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문득 운현은 자신이 아직 낙일검을 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낙일의 검신이 깊은 물처럼 푸른색으로 변했던 것을 운현은 기억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빛이 뿜어져 나왔던 것도.
‘낙일검의 비밀이 그런 것이었나?’
운현은 무심코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운현은 놀라운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헉!”
운현은 헛바람을 삼켰다.
“이, 이게 무슨.”
당황한 운현은 급히 낙일을 살폈다.
‘없어!’
없었다.
분명히 있어야 할 검신이 보이지 않았다.
운현의 손에 남은 건 그저 손잡이뿐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다.
갑자기 검신이 사라지다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지.’
운현은 문득 검신이 투명하게 변했던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보이지 않을 뿐, 검신은 그대로 있는지도 몰랐다.
운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혹시 베일까 봐 칼날이 아니라 옆쪽으로, 운현은 천천히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슥.
하지만 무심하게도 운현의 손은 아무것에도 닿지 않았다.
검신이 있어야 할 곳을 그대로 지나간 것이다.
“헉.”
운현은 아예 손을 팔락팔락 저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손은 검신이 있어야 할 부분을 그대로 지나쳤다.
낙일검의 검신은 정말로 사라진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운현의 얼굴이 낭패로 일그러졌다.
“……큰일 났다.”
낙일검, 아니 정확히는 낙일검의 손잡이만을 든 채 운현은 울상이 되었다.
그때 문득 또 다른 생각이 운현의 뇌리를 스쳤다.
‘아, 혹시.’
어쩌면 검신이 빠져서 날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휙.
운현은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검신 같은 건 보이지 않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운현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
“허어어.”
운현은 한숨을 쉬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이미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아침 시간이 지난 건 물론이고 다들 기다리다 지쳐 화가 났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운현도 절박했다.
낙일검의 검신을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정신없이 주변을 뒤졌지만 결국 낙일검의 검신은 발견하지 못했다.
손도 옷도 더러워졌지만 그런건 상관없었다.
‘어떻게 하지?’
낙일검의 검신을 잃어버렸다는 걸 소궁주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그녀가 화를 낼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도 무섭긴 하지만.’
어쩌면 이제 북해와 화평을 맺을 길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낙일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온 북해가 분노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