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낙일검의 비밀
거친 황야에서도 일상은 이어졌다.
해가 지면 일행은 마차를 바람막이 삼아 불을 피우고 추위를 쫓았다.
당연히 좋은 음식은 바랄 수 없었고 말린 곡식과 육포, 한 모금의 물로 식사를 대신했다.
소궁주와 십이궁주, 빙설을 마차에 재우고 운현과 제갈기호는 커다란 털가죽을 두른 채 불 곁에서 잠을 청했다.
그나마 털가죽이 두툼하고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소궁주는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피워 놓은 모닥불이 재 사이에서 붉게 숨쉬고 있을 때, 옆에 누운 제갈기호가 운현에게 말했다.
“예쁜 사람은 질리도록 봤지만 소궁주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볼수록 더 예쁜 걸까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소궁주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다.
날카로운 가시가 심각하게 돋아 있지만 말이다.
“십이궁주도 꽤나 매력적이지요. 약간 멍청해 보이긴 하지만 그것이 제법 귀여운 데다, 의외로 몸매가 아주 좋더라고요.”
그건 또 언제 봤나 싶은데, 제갈기호가 넉살 좋게 말을 이었다.
“의외인 건 바로 저 시녀입니다. 말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제법 분위기도 있고, 어쩐지 뭐든 다 받아 줄 것 같은…….”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빙설은 이 말을 듣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내일도 길을 가야 하니 그만 쉬시지요.”
“아, 네. 편히 주무십시오, 운 서기님.”
제갈기호는 순순히 운현의 말을 따랐다.
제법 피곤했는지 그는 금방 색색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후우.’
운현은 깊은 숨을 내쉬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 가득했고, 뺨을 스치는 밤바람은 오히려 상쾌했다.
“좋은 꿈 꾸시오.”
누구에게랄 것 없이 운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잠을 청했다.
모닥불 옆에 지키듯 앉아 있는 독고랑과, 아마도 자지 않고 있을 마차 안의 빙설만이 황야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
새벽, 별들이 아직 그 빛을 잃기 전에 운현은 눈을 떴다.
“기침하셨습니까?”
불 곁에 앉은 독고랑이 나지막이 인사를 건넨다.
운현은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독고 제는 좀 잤소?”
“네.”
주변을 돌아본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독고랑이 잠들었던 흔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전혀 안 잔 것 아닌가?”
“아닙니다. 충분히 쉬었습니다.”
운현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오늘 밤부터는 자신과 제갈기호도 불침번을 서야겠다고 생각하며 운현은 자리를 정돈했다.
그리고 간밤에 베고 잤던 등짐 속에서 낙일검을 꺼내 들었다.
새벽 수련을 하려는 것이다.
“잠시 다녀오겠네.”
“네.”
독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박, 사박.
운현은 낙일을 들고 천천히 걸었다.
딱히 숨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다른 이들의 단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운현은 멈춰섰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아.”
광활한 대지와 드높은 하늘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 장엄한 광경 앞에서 자신은 그저 티끌 같았다.
“……나는.”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무나 작구나.”
너무나도 작았다.
자신의 그릇도, 스스로의 역량도, 그리고 자신만의 검조차도.
거대한 대자연 앞에서 운현의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하하.”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운현은 손을 들어 낙일검을 내려다보았다.
스릉.
낙일의 칼날이 별빛 아래 반짝였다.
정말이지 대단한 검이다.
그러나 천하의 보검이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굴러다니는 나뭇가지와 똑같았다.
운현이 펼치는 검로를 그려 낸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쉭.
운현은 허공에 몇번 가볍게 검을 그었다.
그리고 자세를 취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바로 백호수련검의 첫 자세였다.
“후우우.”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버렸다.
거대한 흐름을 따라야 한다는 부담감도 내려놓았다.
별것 아니면 어떠랴?
대단치 않은 것이라면 또 어떠랴?
어차피 티끌 같은 인생, 지금은 그저 작고 작은 한 사람으로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을 뿐이다.
후웅.
낙일의 칼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하늘이 천천히 밝아 오는 그 시간 속에서, 낙일은 하늘과 땅이 변하듯 끊임없이 움직여 가고 있었다.
어느새 운현은 모든 것을 잊고 백호수련검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언제나 운현의 목검을 둘러싸던 낯선 기운은, 지금 이 순간 낙일에는 전혀 어리지 않고 있었다.
***
건량과 육포는 금방 질렸다.
이젠 추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자 모두는 따뜻한 음식을 원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소궁주와 십이궁주는 물론이고 빙설과 제갈기호, 독고랑까지 음식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음식은 운현이 하기로 했다.
그마나 서원 시절 직접 밥을 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건 아닐 겁니다.”
운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솥을 열었다.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우와.”
십이궁주가 눈을 반짝였다.
이것저것 넣은, 이름도 없는 탕국 같은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척박한 여정에 따뜻한 국물이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기 때문이다.
“맛있어요! 맛있어요!”
음식을 입에 넣은 십이궁주가 연신 감탄을 했다.
그 맛의 대부분은 북해 일행과 제갈기호가 가지고 있던 향신료겠지만 말이다.
빙설과 소궁주도, 처음에 조금 주저하긴 했지만, 곧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괜찮긴 합니다만 냉정히 평가하자면 구성이 좀 빠지는군요.”
토를 단 사람은 제갈기호였다.
“본래 요리는 주(主), 종(從), 보(補)가 되는 식재료가 있고 본래의 맛을 살리면서도 원만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다 넣고 끓여 버리면 아무래도……”
장황하게 말을 잇던 제갈기호는 문득 십이궁주와 독고랑의 싸늘한 시선을 깨달았다.
“크흠, 그윽한 맛이 우러나기 마련이지요. 하하하.”
후룩.
제갈기호는 소리까지 내며 국물을 싹 비웠다.
이후 음식 만드는 일은 운현의 몫이 되었고, 대신 제갈기호는 독고랑과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
며칠 후, 언제나처럼 새벽 수련을 마친 운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벌써 동편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된 것이다.
“후우.”
운현은 숨을 고르며 그자리에 서서 해가 뜨는 것을 쳐다보았다.
황야의 일출은 장엄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태양앞에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싸늘했던 새벽 바람은 한 밤의 꿈인 듯 자취를 감추고, 황량하고 드넓은 땅에는 어제와 같은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문득 운현은 들고 있던 낙일검을 내려다보았다.
슥.
운현은 낙일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칼날이 시리도록 빛나고 있었다.
‘흐음.’
운현은 햇빛 아래 낙일검의 칼날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다고 뭐가 드러날 리는 없나?’
운현은 검을 내렸다.
지난 며칠간 운현은 낙일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검신은 물론이고 칼집도 살폈다.
고풍스러운 문양을 찬찬히 살펴보고 하나하나 만져 보기도 했다.
혹은 옛이야기처럼 무슨 장보도 같은 것이라도 들어 있나 싶어 칼자루를 꼼꼼히 눌러 보기도 했다.
하지만 발견한 것은 낙일이 대단한 보검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아니, 낙일은 그 이상이었다.
곧게 뻗은 검신과 푸르도록 시린 칼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아름다움에 취해 시간마저 잊곤 했다.
비밀을 찾아보겠다는 생각 같은 건 당연히 저 멀리 날아간 다음이다.
‘정말 아름다운 검이야.’
운현은 내심 감탄하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검신을 쳤다.
따앙.
낙일이 가벼운 울음을 냈다.
운현은 귀를 가져다 대고 그 울음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쇠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청동도 아니고…….”
처음엔 그저 여느 검처럼 쇠로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련을 시작하면서부터 운현은 특이한 점을 느끼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는 느낌이 다른 검과는 어딘지 달랐던 것이다.
대단히 오래된 검이라니 혹시 청동검은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낙일은 쇠도, 청동도 아니었다.
애초에 강도 자체가 다르다.
가장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다.
“검기가 맺히지 않는 재질이라는 게 따로 있는 건가?”
운현은 검날에 손가락을 대어 보며 중얼거렸다.
낙일에는 검기가 맺히지 않았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을 보면 없던 검기도 생길 것 같은데, 정작 전혀 검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와불 선사가 ‘천하에 목검으로 검기를 발현할 놈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감탄했던 운현인데도 말이다.
처음에는 그사이 자신이 퇴보한 것인가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따로 챙겨 온 목검에선 늘 그렇듯 검기가 서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제는 운현이 아니라 바로 이 낙일검이다.
“후우.”
운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 검은 정체가 뭐지?”
눈살을 찌푸린 채 운현은 낙일을 내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을 받은 칼날이 오색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낙일을 쳐다보며 운현은 중얼거렸다.
“혹시 유리로 된 것은 아닐까?”
유리(琉璃)는 고대의 칠보 중 하나라고 알려진 전설의 보석이다.
여러 가지 빛깔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물론 전설의 보석이니 운현이 본 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혹시 낙일이 유리로 된 검이라 해도 확인할 방도는 없다.
하지만 운현이 굳이 유리를 떠올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끔은 깊은 물처럼 푸른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낙일검으로 수련을 하다 보면 때로 검날이 푸른빛으로 물드는 것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때로는 검이 투명해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오늘 수련 때는 무슨 소리가, 마치 깊은 산속의 풍경(風磬)처럼 은은한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수련을 끝낸 후 살펴보면 낙일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풍경 소리를 들은 듯했지만, 그것도 생각해 보면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 막연한 느낌 같은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애매모호한 것이다.
“아서라.”
운현은 한탄하듯 말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련에 진전이 없다고 헛것을 보고 환청을 듣다니 말이다.
스릉.
운현은 낙일을 갈무리하고 몸을 돌렸다.
어느새 주위가 환했다.
따뜻한 아침을 기대하고 있을 일행을 위해 운현은 걸음을 재촉했다.
***
북해의 준마들은 척박한 땅을 박차고 힘차게 달렸다.
천리마도 하루 종일 달리면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린다는데, 북해의 강인한 말들은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이 전부였다.
타닥, 타닥.
저녁 식사가 끝나면 일행은 모닥불 곁에 둘러앉았다.
하지만 이야기꽃이 피거나 흥겨운 노랫가락이 흐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행은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치 대자연의 정적이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듯 말이다.
슥슥.
제갈기호가 바닥에 무엇인가 썼다 지웠다.
하지만 그걸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일행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삼갔다.
그러다 밤이 깊으면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잠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는 모두가 홀로였다.
스륵.
“안 주무십니까?”
누웠던 운현이 몸을 일으키자 독고랑이 물었다.
“잠이 안 오는구려.”
운현은 털가죽을 제치고 모닥불 곁에 앉았다.
나뭇가지를 불에 몇 개 던져 넣고,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황야의 밤하늘은 놀랄 만큼 밝았다.
물론 정말로 해가 뜨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겠지만.
‘이렇게 있으니 모든 것이 꿈만 같군.’
무림맹도, 황궁도, 그리고 자신의 검도 모두가 꿈 같았다.
하룻밤 지나면 사라질, 그리고 해가 뜨면 꺼져 버릴 모닥불의 불빛처럼 말이다.
그때였다.
사박.
문득 들리는 인기척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아.’
나타난 사람은 소궁주였다.
가벼운 외투를 걸친 그녀가 모닥불로 걸어오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독고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궁주를 한번 쳐다본 후 천천히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