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관철훈의 목소리는 처연했다.
한때 금의위에 몸담았던 당당한 무관으로서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초라한 모습을 고백하는 것이 어찌 쉬우랴.
“빙혼.”
마차 안에서 소궁주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헤어지기로 하죠. 뒤를 맡아 주세요.”
“네?”
제갈기호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헤어지다니요? 같이 안 갑니까?”
그러나 설명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탓.
마부석에서 내린 빙혼은 즉시 몸을 날려 성내로 사라졌다.
“아니, 그럼 마차는 누가…….”
제갈기호가 황당한 듯 고개를 내밀었지만 고삐는 이미 독고랑이 쥐고 있었다.
“몰 사람이 있었군요. 운 서기님! 빨리 타시지요.”
태세 전환이 빠른 제갈기호가 운현을 재촉했다.
그러나 운현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서기님이라. 역시 변하지 않으셨군요.”
관철훈이 웃었다.
만난 이후 처음으로 보는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조심하십시오. 학사님.”
관철훈은 나지막이 덧붙였다.
“이 마차를 구금하라는 명령은 생각보다 더 위쪽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운현은 순간 움찔했다.
배후가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집요하고, 게다가 관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을 줄이야.
관철훈은 운현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잠깐.”
운현은 급히 제갈기호에게 손을 뻗었다.
“그 함을 주십시오.”
제갈기호는 순간 당황했지만 급히 함을 건네주었다.
“관 교두, 이걸 받으시오.”
“이건…….”
달칵.
관철훈은 그 자리에서 함을 열었다.
붉은 비단에 싸인 오색 보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
관철훈은 즉시 함을 닫았다.
그리고 그 표정만큼이나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걸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닙니다! 운 학사님께서 어찌 이런…….”
“상관없소.”
관철훈의 말을 운현이 끊었다.
“내게 무어라 말하든 괜찮소. 더러운 뇌물이면 어떻소. 그것으로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욕을 먹겠소. 그러니 이것으로 부디 몸을 보전하시오. 어차피 뒷거래로 내려온 명령, 더러운 재물로 무마할 수 있다면 족한 것 아니겠소?”
턱.
관철훈이 내민 손과 함을 운현이 감싸 쥐었다.
운현의 눈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관철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철의 담력을 가진 무인도 가슴에서 치솟는 감정을 어찌할 수는 없는지라 관철훈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아니오.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하오. 고맙소, 관 교두.”
“운 서기님! 빨리요!”
마차 안에서 제갈기호가 애타는 목소리로 불렀다.
높은 곳에서 명이 내려온 데다 고수들까지 성에 들어왔다고 하니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관철훈도 굳은 표정으로 운현을 향해 말했다.
“어서 가십시오. 운 학사님.”
“그럼, 부디 보중하시오.”
손을 놓는 운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관철훈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탁.
운현은 마차에 올랐다.
독고랑은 즉시 고삐를 쳤다.
“하아!”
그때였다.
관철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급히 말했다.
“운 학사님! 돌아오시면 꼭 한번 북경에 가 보십시오.”
“북경 말이오?”
“네! 황궁에…….”
관철훈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강인한 북해의 준마들은 이미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꼭 가 보셔야 합니다!”
콰과과곽.
마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했다.
사람들과 군병들이 급히 몸을 피하고, 마차는 활짝 열린 성문을 아무런 제지없이 달려나갔다.
따가닥, 따가닥.
마차는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관철훈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운 학사님.”
운현이 휘말린 일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다.
비록 한직이긴 하지만 국경 경비군의 책임자인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관철훈은 작은 목함을 움켜쥐었다.
운현이 꽉 쥐고 있던 목함은 아직 따뜻했다.
그 부드러운 온기가 관철훈의 가슴을 조용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
“빠져나갔다고?”
낭랑한 목소리가 노래하듯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음성의 주인인 문왕의 표정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습니다.”
수하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착.
문왕은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폈다.
용이 수놓아진 붉은 비단이 그의 입을 가렸다.
“현재 추적대가 뒤를 쫓고 있습니다. 허나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부채 너머로 드러난 문왕의 눈썹이 더욱 크게 일그러졌다.
“흥, 그렇겠지. 그녀는 결코 바보가 아니니까.”
실패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문왕 역시 그랬다.
그러나 수하의 간결하고 확실한 보고는 오히려 문왕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변명은 물론이고 과장된 사죄가 없다는 점이 더더욱 그랬다.
“녹림의 채주들은 어떻게 했나?”
“수성채, 북호채, 대도채의 채주들은 이미 처분했습니다.”
문왕은 이미 실패에 대한 대가를 경고했었다.
수하는 충실히 그 경고대로 이행한 것이다.
“쓸모없는 것들. 아예 산 채로 묻어 버렸어야 했을 것을.”
“그렇게 했습니다.”
탁.
문왕은 비단 부채를 접었다.
어느새 그의 분노는 사라져 있었다.
“산채의 녹림도들은 어떻게 할까요?”
“돈을 받은 놈들은 죽여.”
문왕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나머지는 그냥 보내라. 돈을 받지 않았으면 책임도 없지.”
그건 일부 도적들 외에는 사실상 아무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탐욕스러운 채주들이 수하들에게 돈을 나눠 줬을 리는 없으니까.
수하는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소궁주를 통과시킨 국경경비군은 어떻게 했나?”
“윗선을 통해 강력히 항의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저희가 직접 손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흠.”
톡, 톡.
문왕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북해로부터 다른 보고는 없었나?”
“네. 상황은 변화가 없습니다.”
“흥. 아마도 북해제일지 그년이 빙제를 싸고도는 것이겠지. 하지만 어차피 오래 못 갈 거야.”
문왕은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살만큼 살았으면 죽어야지. 빙제든, 그 누구든 말이다.”
그것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수하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문왕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팔락.
문왕의 붉은 비단 부채가 조용히 흔들렸다.
커다란 대전에는 시녀와 수하 들이 서 있었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국경을 통과한 북해의 마차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지나자 주변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산은 낮아지고 수풀이 드물어지더니 지평선이 보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자 사방에 보이는 건 오직 지평선까지 펼쳐진 풀과 야트막한 덤불들 뿐이었다.
드디어 대초원으로 들어선 것이다.
“우와, 정말 대단한 풍경이네요.”
제갈기호는 감탄했다.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은 누구의 말처럼 인생관을 바꿔 놓을 정도였다.
운현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쩐지 답답하던 가슴마저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소궁주의 말에 독고랑은 빙설에게 마부석을 내어 주었다.
고삐를 건넬 때는 무표정한 독고랑마저 살짝 아쉬움을 보였다.
며칠뿐이었지만 그간 함께한 북해의 말들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아!”
따가닥, 따가닥.
빙설은 그 가녀린 체격에 비해 놀랄 정도로 말을 잘 다뤘다.
말들은 거의 지치지도 않은 채 길도 없는 초원을 빠르게 질주했다.
마차나 말에 대해 잘 모르는 운현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이야, 이거 하루 이틀 몰아 본 솜씨가 아닌데요?”
말을 몰 줄 아는 제갈기호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무슨 시녀가 이렇게 말을 잘 다룬답니까?”
“어, 그건…….”
시녀가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닐까 운현이 생각하는데 문득 십이궁주가 말했다.
“이건 나도 해요!”
“네?”
운현과 제갈기호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십이궁주께서요? 말을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제갈기호가 물었다.
십이궁주가 볼을 부풀렸다.
“어? 진짜다예요. 걸음보다 더 쉬워예요.”
제갈기호는 운현을 쳐다보았다.
진짜냐고 묻는 듯했지만 운현이라고 알 리가 없다.
운현이 어깨를 으쓱하자 제갈기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네네. 그러시군요.”
“동생의 말은 사실이에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십이궁주라면 몰라도 소궁주가 하는 말이라면 신뢰성이 크게 높아진다.
운현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소궁주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도, 말이라면 제법 잘 다루고요.”
그건 생각도 못 하던 일이었다.
말하는 소궁주의 표정이 어쩐지 새침스럽기도 하고, 뭔가 질투하는 것 같기도 한 것이다.
운현이 놀란 표정을 짓는데 제갈기호가 감탄을 흘렸다.
“오, 소궁주님이 말을 달리면 아주 한 폭의 그림이겠는데요?”
그 말에 운현은 동의했다.
아름다운 소궁주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모습은 확실히 멋질 테니까.
“우웅, 나도 그림이다예요.”
십이궁주가 입을 비죽 내밀며 항의했다.
하지만 제갈기호는 못 들은 척했다.
따가닥, 따가닥.
그러는 동안에도 북해의 강인한 준마들은 드넓은 초원을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
한없이 이어질 것 같던 초원도 며칠이 지나자 끝이 났다.
그리고 거친 황야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직 흙과 돌밖에 없는 불모의 땅이 시작된 것이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아무 곳으로도 갈 수 없는 광대한 미로.
대자연이 만들어 낸 그 역설의 미로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만일 소궁주가 길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어이구, 이런 황량한 길을 어떻게 오셨습니까?”
제갈기호가 혀를 내둘렀다.
소궁주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이곳의 혹독함을 상상하지 못해요. 이 땅이 이처럼 순순히 우리를 받아 주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에요.”
“이게 천운이라고요?”
“네. 그리고 지금은 시일을 단축하기 위해 조금 무리를 하고 있어요. 상단이 다니는 길은 따로 있지요.”
제갈기호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길이 있기는 합니까?”
“보이지 않는 이들이 없다 할 뿐, 길은 어느 곳에나 있어요.”
그 말에 제갈기호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렇지요.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요.”
“단지 지식의 문제만은 아니에요. 관점의 차이, 아니 어쩌면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운명요?”
조금은 난데없는 말에 제갈기호가 반문했다.
하지만 소궁주는 눈을 돌려 운현을 쳐다보았다.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가 말했다.
“어떤 이들에겐 당연한 것들이, 다른 이들에겐 그 존재를 아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운현은 내심 뜨끔했다.
어쩌면 소궁주는 ‘낙일의 주인’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뭐, 그렇긴 하지요.”
제갈기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세가의 일원이며, 사람들이 모르는 많은 것들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다 각자의 분수가 있는 법이지요.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네.”
운현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소궁주가 말했다.
“각자의 분수가 있는 법이에요.”
슬그머니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마차는 길도 없는 막막한 황야를 잘도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