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74화 (174/530)

174화. 강행 돌파

운현이 제갈기호의 몸놀림을 보며 놀라던 때였다.

벌컥.

반대편에 앉아 있던 십이궁주가 마차 문을 열었다.

“나도 볼래.”

탁.

짦은 한마디와 함께 십이궁주도 몸을 날렸다.

그녀는 유연한 동작으로 가볍게 마차 지붕으로 올라갔다.

황급히 문을 닫으려던 운현은 문득 맞은편에 앉은 소궁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이제 마차 안에는 운현과 소궁주, 그리고 빙설뿐이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운현은 마차 밖으로 몸을 일으켰다.

바깥엔 세찬 바람과 거친 말발굽 소리가 가득했지만, 소궁주와 빙설의 시선을 받는 것보다야 한결 나았다.

“대인.”

때마침 독고랑이 손을 뻗었다.

운현이 손을 잡자 독고랑은 가볍게 운현을 들어 마부석으로 옮겼다.

‘오.’

운현은 내심 감탄했다.

흔들리는 마차 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독고랑의 팔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따가닥, 따가닥.

마부석에 앉은 운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줄지어 늘어선 방패와 번뜩이는 창날이 더욱 가까이 보였다.

“방패에 창이라, 아주 본격적이네요.”

문득 뒤에서 제갈기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아예 길을 막진 못한 것 같아 다행이군요.”

시간이 없었는지, 아니면 주변에 적당한 나무가 없어서인지 몰라도 관도가 막히진 않았다.

하지만 방패에 창뿐이라도 마차를 막기엔 충분했다.

“하기야 말에는 장창이 정석이지요. 그리고 창에는.”

휘릭.

제갈기호의 짐 속에서 둥그렇게 말린 활이 모습을 드러냈다.

“활이 제격이고요.”

활 뿐만 아니라 짧고 굵은 화살도 우수수 쏟아졌다.

제갈기호는 능숙하게 활을 쥐고 활줄을 걸었다.

“에구, 이놈의 것은 들고 다니기가 영 귀찮아서……. 저기, 그거 만지시면 안 되거든요?”

화살을 집어 들던 십이궁주가 미안한 듯 웃으며 손을 거뒀다.

하지만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제갈기호의 활과 화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자, 그럼 저놈들을 깜짝 놀라게 해 볼까요?”

거칠게 흔들리는 마차 지붕에서 제갈기호는 몸을 낮춘 채 화살을 걸고 활을 당겼다.

끼이익.

활이 크게 휘어지며 활 시위가 소리를 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시위에 손을 얹은 채, 제갈기호는 힘든 기색도 없이 중얼거렸다.

“자, 첫 개시이니 잘 좀 맞아 보려무나.”

핑.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활시위가 맹렬한 기세로 화살을 쏘아 냈다.

피르르르.

바람결에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북호채 채주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섬뜩한 살기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크아악!”

뒤에 섰던 수하 하나가 피를 뿜고 고꾸라진다.

“화, 화살입니다!”

외마디 외침이 튀어나오며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뭐? 화살이라고?”

채주는 고개를 홱 돌려 돌진해 오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 위에서 활 시위를 당기고 있는 자의 모습이 그의 눈에도 똑똑히 들어왔다.

“화살이라니! 이제까지 그런 건 없었잖아!”

억울하다는 듯 채주는 외쳤다.

그러나 그 외침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싸!”

저 멀리서 도적 하나가 고꾸라지는 것을 본 제갈기호가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십이궁주가 찬물을 끼얹었다.

“빗나갔어요.”

제갈기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십이궁주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맞았잖습니까.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이 맞았다면 대박이었겠지만 처음부터 그런 요행을 바라면 안 되지요.”

“그래도 노렸잖아요? 노려서 안 맞으면 빗나갔음이에요.”

십이궁주의 말이 옳긴 하다.

하지만 제갈기호는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쨌든 아무나 맞았으니 상관없어요. 그리고 아가씨는 좀 가만히 계시지요. 그 화살은 내려놓고요.”

십이궁주의 손에는 어느새 화살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화살을 뒤로 감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이, 이건 그냥…… 헤헤헤.”

“그 화살 빨리 안 내려놓으면…….”

제갈기호가 인상을 쓰며 무어라 하려는데 운현이 나지막이 충고를 했다.

“그 아가씨는 북해빙궁의 소궁주입니다.”

“윽.”

제갈기호는 신음을 흘렸다.

이런 젊고 귀엽기까지 한 아가씨가 설마 북해의 소궁주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직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해서 그저 일행 중 한 사람이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제갈기호는 즉시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안 내려놓으면, 그냥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십이궁주가 대번에 반색을 했다.

“네, 그럼요. 비싸긴 해도 까짓것 얼마나 한다고 못 드리겠습니까? 맘에 드시면 더 가지셔도 됩니다.”

웃고 있었지만 제갈기호의 속은 편치 못했다.

제갈기호가 가져온 화살은 일반적인 것과 달리 무겁고 단단한 데다 매우 비싼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말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면 싼 편이다.

자칫 북해의 소궁주에게 협박을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에잇, 젠장.”

제갈기호는 화살을 걸고 부글거리는 화를 쏟아 내듯 시위를 당겼다.

“이거나 먹어라!”

피리리릭.

시위를 떠난 화살은 제갈기호의 울분을 싣고 도적 떼들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타앙, 파르르르.

방패에 박힌 화살이 부르르 떨었다.

뒤에 숨어 있던 채주는 움찔하고는 화를 버럭 냈다.

“야! 화살이 날아올 거란 말은 왜 안 했어!”

채주의 화를 덮어쓴 수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이때까지는 화살 같은 건 한 번도…….”

피르르르.

“크악!”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에 말하던 수하도, 채주도 움찔 몸을 낮췄다.

“아, 아마 그 사이에 원군이라도 합류했나 봅니다.”

“원군?”

채주는 인상을 썼다.

“그게 왜 지금 합류하고 난리야!”

“어, 어쨌든 버텨야 합니다. 일단 마차를 세우고 나면……. 이런!”

쩔쩔매며 말을 잇던 수하는 무언가 생각난 듯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채주님! 큰일 났습니다!”

“뭐가 또 큰일인데!”

채주가 짜증을 냈지만 수하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 못 막으면 큰일납니다. 누가 합류했다는 건 저들이 목적을 달성했다는 뜻이라고요! 이번에 놓치면 그냥 국경을 넘어 달아날지도 모릅니다!”

북해의 마차는 도적 떼들의 추적을 받으면서도 왜 이 지역을 떠나지 않았는가?

만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리고 이제 그들이 합류했다면 마차가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어진다.

바로 그 가능성에 수하는 생각이 미친 것이다.

“뭐? 저것들이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채주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수하의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일을 실패하면 자신은 죽는다.

청부자는, 채주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니까.

“나, 나가라!”

채주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화살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 따윈 이미 잊어버렸다.

그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나가!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나가서 창을 잡으란 말이다!”

채주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이런, 저놈들이 갑자기 왜 저러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을 숨기기에 바빴던 도적 떼들이 창을 쥐고 나오자 제갈기호는 투덜거렸다.

“왜요? 더 맞히기 쉬워졌는데?”

십이궁주의 목소리에 제갈기호는 한숨을 쉬었다.

“제 목적은 많이 맞히는 게 아니거든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갈기호가 말했다

“위협을 줘서 행동을 제한하는 게 목적인데, 저렇게 배 째라고 나오면 소용이 없어요. 저 많은 숫자에서 몇 놈 줄인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아하.”

십이궁주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묻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중얼거리던 제갈기호가 빙혼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요? 형씨.”

“돌파하겠다.”

빙혼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제갈기호는 인상을 썼다.

“저 창들은 어쩌고?”

방패 사이로 튀어나온 장창이 햇빛에 번들거렸다.

이대로 돌진하면 말이 꼬치처럼 꿰뚫릴 것이 뻔했다.

하지만 빙혼은 단호했다.

“뛰어넘겠다.”

제갈기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걸 뛰어넘어? 아니, 이 형씨는 마차가 무슨 날아다니는 새인 줄 아나?”

빙혼이 제갈기호를 흘깃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제갈기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말이야 뛰어넘는다 칩시다. 하지만 마차는 어쩌고? 이대로라면 반드시 뒤집힌단 말이오! 잘못하면 다들 죽는다고!”

제갈기호는 대놓고 짜증을 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마차는 위태할 정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도적 떼들과 충돌하면 뒤집힐 것이 뻔했다.

하지만 빙혼의 대답은 여전히 싸늘했다.

“두렵다면 안으로 들어가라.”

“들어가도 마차가 뒤집히면 최하 중상이라니까!”

그러나 빙혼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제갈기호는 운현을 돌아보았다.

“운 서기님, 이대로 놔둘 겁니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죽지는 않을 것 같으니…….”

운현은 독고랑이 지켜 줄 것이고 소궁주는 빙설이, 십이궁주는 빙혼이 보호할 것이다.

제갈기호도 제 한 몸 돌볼 능력은 되니 크게 다치거나 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차는 뒤집어지겠지만 말이다.

“허어어.”

제갈기호는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젠장, 어쩔 수 없지.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수밖에.”

투덜거리던 제갈기호는 옆에 치워 두었던 자신의 짐을 뒤적였다.

달그락.

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나무 한마디 정도의 검은 통 두개였다.

지켜보던 십이궁주가 눈을 반짝이고, 운현도 궁금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비장의 수를 이렇게 함부로 보여 주면 안 되는데.”

투덜거리면서도 제갈기호는 검은 통을 화살 앞쪽에 매달았다.

“이보시오, 형씨.”

제갈기호는 빙혼에게 말했다.

“이건 아주 잠깐이니 그 사이에 지나가야 하오. 알았소? 괜히 형씨가 겁먹고 마차를 세우거나 고삐를 놓치지는 마시오.”

빙혼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쳇. 이걸 여기서 벌써 써 버리다니.”

제갈기호는 투덜거리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타닥.

그의 손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운현은 똑똑히 보았다.

제갈기호는 그것을 얼른 화살에 매어 놓은 검은 통에 가져다 댔다.

치익.

심지가 달려 있었는지 검은 통에서 작은 불꽃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두 개의 검은 통에 불꽃이 피어나고, 제갈기호는 즉시 하나를 입에 물고 다른 하나를 활 시위에 걸었다.

끼리리릭.

커다란 체격의 제갈기호는 자세를 바싹 낮춘 채 활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시위가 울었다.

퉁.

피리리릭.

화살이 날아가는 즉시 제갈기호는 또 한 대의 화살을 걸었다.

퉁, 피리리리릭.

순식간에 두 대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갔다.

관도를 가로막고 있는 방패와 장창의 벽을 향해, 두 대의 화살은 작은 불꽃의 궤적을 꼬리처럼 끌며 짓쳐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앙.

폭음이 관도 위를 휩쓸었다.

“으아악!”

도적들은 혼비백산 비명을 질러 댔다.

그 비명이 채 가시기도 전에 두 번째 폭발이 터져 나왔다.

콰아앙.

귀가 멀 정도로 엄청난 폭음과 짙은 연기가 관도를 뒤덮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