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방해
“네.”
소궁주가 답했다.
“시간이 없어요.”
훅.
주변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비록 빙혼과 독고랑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숨 막힐 것 같던 살기는 더 이상 없었다.
“다행히 더 이상은 아무 문제도 없는 듯하니.”
운현은 주변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조금 전 그 광경을 보고서도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무림인들의 눈빛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다.
“가시지요.”
운현이 손을 뻗어 권하자 소궁주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사박, 사박.
소궁주가 움직이자 운현은 독고랑과 제갈기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도 갑시다.”
그 말이 신호인 양 일행은 객잔을 나섰다.
차락.
주렴을 걷고 밖으로 나오자 운현에게 제법 익숙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바로 북해 소궁주 일행의 마차였다.
“오, 상당히 큰데요?”
어느새 기색을 회복한 제갈기호가 둥그런 눈으로 말했다.
운현 일행이 타고 온 마차도 작진 않았지만 북해빙궁의 마차는 확실히 컸다.
내부를 가리기 위해 지붕을 얹고 벽을 세워서 더 크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타세요.”
소궁주의 말에 운현이 대답했다.
“저희도 마차가 있습니다.”
“짐이 될 뿐입니다. 돌려보내세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제갈기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우리 쪽 마차를 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뒤쫓는 자들의 눈을 속일 수도 있고…….”
그러나 소궁주의 대답은 단호했다.
“길이 급한데 준마를 버리고 병든 말을 탈 이유가 있을까요?”
제갈기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반박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건장한 북해의 말에 비하면 다른 말들은 병들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뒤쫓는 자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중요한 건 그들이 아니니까요.”
“네? 그게 무슨…….”
제갈기호가 반문했지만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달칵.
마차 문이 열렸다.
제갈기호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이야, 이래서 미녀가 가득하다는 소문이 났군요?”
마차 안에는 북해십이비의 한사람인 빙설과, 이전에 운현이 만났던 십이궁주가 타고 있었다.
제갈기호는 운현에게 슬쩍 건네듯 말했다.
“하나같이 다들 예쁜데요? 북해 여자들은 다 이런가요?”
운현은 조금 의아해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고 보면 확실히 빙설도 예쁜 얼굴이긴 하다.
십이궁주 역시 상당히 귀여운 인상이고 말이다.
그녀는 운현을 보고 반갑다는 듯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타요.”
어느새 마차에 오른 소궁주가 말했다.
제갈기호도 금방 태도를 바꿨다.
“어서 탑시다. 아차, 짐 가져와야지!”
그제야 생각난 듯 제갈기호는 얼른 마차로 달려갔다.
막 나오던 마부에게 알아서 돌아가라고 말하곤, 제갈기호는 봇짐 두 개를 안고 뛰어왔다.
그사이 자기만 두고 가 버릴까 봐 겁내는 것처럼 말이다.
“자, 갑시다!”
제갈기호가 마차에 오르려다 운현을 보고 재촉한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독고랑을 보았다.
“가세. 좀 좁긴 하겠지만…….”
“저 여인은 위험합니다.”
독고랑이 누구를 말하는지 운현은 알고 있었다.
언뜻 시녀 같은 빙설을 독고랑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아, 빙설은 괜찮네.”
운현은 빙긋 웃으며 독고랑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이겼거든.”
그건 사실 반쯤은 농담이었다.
독고랑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말이다.
그러나 독고랑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러셨군요.”
운현은 당황했다.
마차 안에 있던 빙설의 표정이 굳고, 소궁주마저 운현을 책망하듯 바라본다.
“저기, 그게 아니라…….”
그러나 운현이 상황을 수습할 기회는 없었다.
독고랑은 훌쩍 마부석으로 올라갔다.
이미 고삐를 잡고 있던 빙혼이 살기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독고랑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덕분에 운현만 열린 마차 문 앞에 홀로 서 있게 되었다.
“뭐합니까? 운 서기님, 빨리 타세요.”
어느새 마차 안에 자리잡은 제갈기호가 재촉했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으로 난처함을 얼버무린 후 마차에 올랐다.
탁.
“이랴!”
빙혼이 날카롭게 외쳤다.
따각, 따각.
눈처럼 하얀 북해빙궁의 마차는 즉시 객잔 앞을 떠났다.
아직도 어리둥절해 있는, 운현 일행이 타고 온 마차의 마부만이 객잔 앞에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
북해 일행의 마차는 여전히 커서 다섯 명이 탔어도 오히려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마차가 전력으로 관도를 질주하는 통에 크게 흔들리는 때도 잦았다.
덜컹.
“어이쿠.”
휘청하던 제갈기호가 운현의 허벅지를 잡았다.
운현이 반사적으로 쳐다보자 제갈기호는 슬쩍 손을 놓고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길이 좀 좋지 않군요.”
사실 관도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마차가 너무 빨리 달리는 데 있었다.
쿠당탕.
“앗.”
아니나 다를까, 마차가 또다시 크게 흔들리고 십이궁주가 운현의 팔을 붙들었다.
운현이 십이궁주와 제갈기호 사이에 앉아 있었던 탓이다.
“괜찮습니까?”
“네? 아, 네. 헤헤헤.”
십이궁주가 겸연쩍은 듯 운현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러다 얼른 손을 놓고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크흠, 소녀는 괜찮사와요.”
‘응?’
운현은 의아했다.
십이궁주는 본래 이렇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현은 십이궁주가 맞은편에 앉은 언니, 삼궁주의 눈치를 보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하.’
아마도 언니인 삼궁주에게 핀잔을 많이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운현에게 말을 걸고 싶어하는 표정이 너무 역력했다.
지금도 흘깃 운현을 쳐다보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아니나 다를까, 십이궁주는 활짝 웃으며 운현에게 대답했다.
“그때 멀리 갔어요. 그래서 다시 만날까 생각했어요.”
흥분한 그녀의 말은 여전히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런데 당신 중요한 사람이에요?”
“네?”
운현이 반문하던 그때였다.
“그만해.”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십이궁주가 얼른 목을 움츠리고, 소궁주는 운현과 제갈기호를 쳐다보았다.
“무림맹의 귀한 분들께 합당한 예를 차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소궁주의 눈동자가 반짝이듯 빛났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사절단의 정사이자 대표인 제갈기호가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괜찮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이해해야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제갈기호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도적 떼들이라니, 이거 참 곤란하군요.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갈기호는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러나 제갈기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쿵쿵.
마차를 치는 소리와 함께 빙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쪽에 적입니다.”
“적?”
제갈기호는 얼른 마차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따가닥, 따가닥.
귓가를 스치는 세찬 바람과 말발굽 소리 사이로 제갈기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뒤를 바라보았다.
“이런.”
제갈기호는 인상을 썼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쫓아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분명히 보이는 것은 그들의 손에서 번뜩이는 병장기들이다.
“앞에도 있소.”
이번에는 독고랑이 말했다.
고개를 돌린 제갈기호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윽.”
제갈기호는 신음을 내뱉었다.
“이거 곤란한데.”
그가 인상을 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길 앞쪽, 한 무리의 사내들이 관도를 막고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방패와 번뜩이는 장창들은 멀리서도 똑똑히 보였다.
***
“나타났습니다!”
수하의 목소리에 북호채 채주 호전충은 인상을 썼다.
“나도 보여 인마!”
기세 좋게 소리쳤던 수하는 채주의 짜증에 움찔하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과연 제 생각대로군요.”
옆에 섰던 또 다른 수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무턱대고 뒤를 쫓는 것보다는 길목을 지키는 것이 옳았습니다.”
그는 북해의 마차가 이 지역을 떠나지 않는 것에 주목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북해의 마차는 국경을 넘어가지도, 비교적 안전한 내륙으로 가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쫓아가는 것보다 기다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 네 말대로다.”
채주는 질주해 오고 있는 마차를 바라보며 커다란 도를 꼬나쥐었다.
“이놈들, 이번엔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
“네, 그러셔야 합니다.”
수하가 말을 덧붙였다.
“벌써 소문을 들은 무림인들이 꼬이고 있으니까요. 자고로 밤이 길면 꿈도 길다고…….”
“알았다잖아!”
채주는 버럭 소리를 쳤다.
“이놈이 누굴 바보로 아나, 했던 소리를 몇 번이나 또 하고 난리야! 조용히 안해?”
수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지금 채주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이러면 이거 완전 손해 아니냐고!”
북호채가 받기로 한 몫은 백칠십 냥이다.
마차 한 대 작살내는 것치고는 파격적인 보수였다.
옆에 있는 수하가 ‘마차 한 대에 이렇게 큰 돈을 쓰는 건 이상하다’고 했지만 채주는 개의치 않았다.
수성채와 대도채까지 함께한다니 만약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땡 잡은 기분이 박살 난 건 수성채와 대도채가 각각 이백 냥씩 챙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다음이었다.
속이 쓰리지만 참았다.
북호채가 그들보다 규모에서 밀리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적극적으로 나서던 수성채와 대도채가 빙혼의 칼에 죽어 나가면서 숫자가 확 줄었다.
덕분에 지금 북호채가 가장 힘든, 관도를 막고 마차를 저지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이다.
“젠장, 역시 설 생각은 없나 보군.”
채주는 질주해 오는 마차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얘들아! 준비해라!”
줄지어 늘어선 방패 사이로 장창이 번뜩였다.
방패를 든 자들이나 창을 든 자들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
“이거, 어떻게 하지요?”
제갈기호가 소궁주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쉽게 비켜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비켜 주지 않는다면.”
소궁주가 나지막이 답했다.
“힘으로 뚫고 갈 수밖에요.”
“하하. 뭐,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허탈하게 웃던 제갈기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시다면 제가 조금 도울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소궁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제갈세가의 공자께서 도와주신다면.”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그녀의 대답은 제갈기호를 흡족하게 했다.
제갈기호는 자신의 짐을 들고는 마차 문을 열었다.
따가닥, 따가닥.
바람이 마차 안으로 짓쳐 들었다.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여는 건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제갈기호는 한술 더 떠 아예 마차 밖으로 몸을 빼냈다.
휘릭.
“어, 조심…….”
놀란 운현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제갈기호는 이미 마차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곤 오히려 운현에게 묻는다.
“네?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운현은 얼른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