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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72화 (172/530)
  • 172화. 백색보차(白色寶車)

    북해 사절단 일행이 탄 마차는 관도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렇게 말을 달린 지 여러 날, 마차는 어느새 변경이라 할 수 있는 국경 인근 지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워, 워.”

    마부가 고삐를 낚아채자 말들이 걸음을 멈추며 거친 숨을 내뿜었다.

    쉬지도 않고 내달려 온 말들에게는 반가운 휴식이었고, 마차를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운현은 마차 밖으로 보이는 제법 커다란 객잔을 보며 물었다.

    “여기서 쉬는 겁니까?”

    “네. 말들이 많이 지쳤으니 이쯤에서 쉬지요.”

    제갈기호가 대답했다.

    그 역시 오랜 마차 여행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사람 좋은 미소만은 여전 잃지 않고 있었다.

    탁.

    운현과 제갈기호가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와 함께 앉아 있던 독고랑도 어느새 내려와 있었다.

    “이랴.”

    마부는 마차를 객잔 뒷편으로 몰고 갔다.

    말을 풀고 쉬게 하려는 것이다.

    “으어어어.”

    제갈기호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뚜둑, 뚜둑 하고 뼈 맞추는 소리까지 냈다.

    “마차도 아주 고역이군요. 지겨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운현도 그 말에 동의했다.

    제갈기호가 살을 좀 빼면 훨씬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아무리 오랜 여행으로 허물없이 되었다 해도, 상대의 외모를 비하하는 듯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북해 일행과 만나기로 한 곳은 멀었습니까?”

    “어, 아마 내일이면 도착할 겁니다.”

    제갈기호가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어차피 날짜를 정한 것도 아니고, 가면 기다리고 있거나 전언이 남아 있겠지요. 자, 들어가 봅시다.”

    몸을 푼 제갈기호는 성큼성큼 객잔으로 들어갔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독고랑은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운현의 뒤를 따랐다.

    “여긴 뭐가 맛있으려나?”

    제갈기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객잔의 주렴을 제쳤다.

    차라락.

    객잔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제법 이름난 곳인지 아직 초저녁인데도 사람이 많았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음식 냄새들이 객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자 점소이가 달려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뭘로 드실?”

    점소이의 말은 의례적이고 심드렁한 데다 짧았다.

    “여기 뭐가 괜찮나?”

    제갈기호의 말에 점소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희 객잔으로 말씀드리면…….”

    단숨에 생기가 도는 점소이의 목소리를 제갈기호가 끊었다.

    “아니, 그럴 것 없이 여기서 가장 괜찮은 요리로 대여섯 개 내오게. 술도 좀 주고.”

    세 사람이지만 제갈기호는 대여섯 개의 요리를 시켰다.

    하지만 운현은 이미 익숙했다.

    어차피 음식의 절반 이상은 제갈기호가 먹을 테고, 마부는 따로 여비를 주었으니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점소이는 탁자에 닿을 듯 고개를 숙였다.

    “아, 그리고.”

    막 돌아서려는 점소이를 제갈기호가 다시 불렀다.

    “어쩐지 분위기가 좀 부산한데, 이 근처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어, 그게…….”

    점소이는 주저했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어느새 제갈기호 앞 탁자에 동전 몇푼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슥.

    손끝으로 동전 둘을 점소이 쪽으로 밀며 제갈기호가 말했다.

    “혹여 위험한 일이라도 있으면 우리도 알아야 조심을 하지. 안 그런가?”

    점소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문간에 앉은 주인의 눈치를 보았다.

    아마도 입조심을 시킨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제갈기호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나쁜 소문 같은 건 걱정 말고. 우리야 지나가면 다시 올 일도 없는 사람인 데다가.”

    슥.

    제갈기호가 씩 웃으며 나머지 동전을 점소이 쪽으로 밀었다.

    “어차피 자네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말을 해 줄 테고 말이지.”

    점소이는 마음을 정했다.

    그는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채우는 척하며 재빠르게 동전을 챙겼다.

    “며칠 전부터 도적들이 아주 떼로 몰려다닌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속삭이듯 점소이가 말했다.

    “도적 떼?”

    제갈기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도적 떼라면 상인들에겐 중요한 일이겠지만 자신들에게 아니다.

    일단 고독검 독고랑이 버티고 있는 데다가 제갈기호 자신은 물론이고 ‘검성의 후계자’까지 있으니까.

    “헌데 그놈들이 좀 이상한 것이, 마을을 약탈하지도 않고 상단을 습격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마차 한 대를 죽어라고 쫓아다닌다고 하더군요.”

    제갈기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차라고?”

    “네. 눈처럼 흰 마차라고 하는데 절세미녀와 보화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 마차를 쫓다가 죽어 나간 도적 떼들이 벌써 부지기수라니까요?”

    “눈처럼 흰 마차?”

    “절세미녀?”

    운현과 제갈기호가 동시에 말했다.

    특히 제갈기호는 미녀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인 듯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관에서는 꼼짝도 안 하고 있습니다. 아니, 도적 떼들이 백주 대낮에 돌아다니는데, 나라의 녹을 먹는 놈들이 아무 일도 안 하면…….”

    “두칠아!”

    갑작스러운 객잔 주인의 호령에 점소이의 말이 끊어졌다.

    점소이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달아나듯 부엌으로 달려갔다.

    “절세미녀라니, 이거 참.”

    제갈기호는 혀를 차며 쓴웃음을 지었다.

    “변경은 항상 이런 식이지요. 관의 통제가 느슨하고 떠돌이들이 모이다 보니 온갖 헛소문이 돌아다니거든요. 정말 절세미녀가 타고 있는 마차라면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군요. 하하하.”

    짐짓 호탕하게 제갈기호가 웃었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제갈 공자님.”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 객잔에 어쩐지 무림인들이 많은 것 같지 않습니까?”

    “확실히 많긴 합니다만.”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고 제갈기호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는 이곳에 들어설 때 이미 확인을 끝냈기 때문이다.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우리와는 무관하니까요.”

    운현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점소이가 말한 그 마차가, 아무래도 우리가 만나야 할 마차 같습니다.”

    “네?”

    제갈기호가 이상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빙궁 일행의 마차가 흰색입니다. 눈처럼 하얀 마차 말입니다.”

    제갈기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운현이 말하는 것의 의미를 그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젠장, 북해 일행과 만나는 것도 쉽지는 않겠군요.”

    도적 떼가 붙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녀와 보화가 가득하다는 과장된 소문은 변경의 거친 무림인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일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오늘 밤에라도 움직여야겠군요. 오늘은 좀 편히 쉬나 했더니…….”

    투덜거리면서도 제갈기호는 즉시 대책을 강구해냈다.

    “일단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서, 아니 술부터 우선 취소하고…….”

    콰당탕.

    누군가 거칠게 들어오는 소리에 제갈기호의 목소리가 끊겼다.

    제갈기호 뿐만 아니라 객잔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배, 백색, 백색…….”

    넘어질 듯 뛰어들어온 사내는 헐떡이는 숨을 가누지도 못한 채 소리쳤다.

    “백색 보차다! 백색 보차가 나타났다!”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운현은 그 의미를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백색 보차(白色寶車), 하얀색의 보물 마차라는 뜻이다.

    ‘이름까지 붙어 있었어?’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객잔안은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백색 보차가 나타났다고?”

    “어디야? 어디에 나타났다는 거야?”

    눈동자를 번득이는 무림인들은 물론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상인들까지, 객잔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그 소란은 길지 못했다.

    차락.

    객잔 입구의 주렴을 걷으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무복을 입고 흰 두건으로 코 아래를 가린 사내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다.

    “윽.”

    “으으.”

    상인들은 물론이고 무림인들조차 단번에 기가 꺾였다.

    그러나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얼굴을 가린 그 사내는 바로 빙혼이었기 때문이다.

    사박.

    빙혼의 뒤를 따라 한 여인이 객잔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숨을 죽였다.

    객잔을 순식간에 침묵하게 만든, 마치 눈꽃의 화신인 양 아름다운 그녀는 바로 북해빙궁의 소궁주였다.

    “후와.”

    제갈기호가 나지막한 감탄을 터트렸다.

    “어마어마한 미인이군요.”

    운현은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봐서일까?

    그녀는 이전보다 더 아름다워진 듯했다.

    이전의 그녀가 마치 눈꽃처럼 아름다웠다면, 지금은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는 만개한 꽃 같은 느낌이다.

    ‘웃.’

    잠시 감상에 빠져있던 운현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바로 그 소궁주가 지금 운현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박, 사박.

    사람들은 홀린 듯 소궁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객잔 안의 모든 이들이 숨쉬는 것조차 잊은 채 소궁주를 바라보았다.

    “여기 계셨군요.”

    낭랑한 소궁주의 목소리가 객잔 안에 울렸다.

    그녀는 매혹적인 눈동자로 운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떠나도록 하지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나자마자 인사도 없이 가자고 하니 말이다.

    슥.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하게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오랜만입니다. 소궁주님.”

    소궁주의 고운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운현을 쳐다보던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요. 오래간만이군요.”

    그녀의 목소리엔 불쾌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어, 왜 그러지?’

    운현은 의아했다.

    하지만 소궁주는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크흠. 제갈 공자, 갑시다.”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제갈기호에게 말했다.

    “아, 그, 그러지요.”

    홀린 듯 소궁주를 보고 있던 제갈기호도 얼른 일어섰다.

    하지만 곧 쓴웃을 지었다.

    “그런데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

    제갈기호의 말이 옳았다.

    객잔 안의 분위기가 어느새 확연히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눈동자는 호기심에서 탐욕으로 변했고, 특히 무림인들로 보이는 자들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태세였다.

    그러나 소궁주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치워 버리면 그만이에요.”

    후우욱.

    순간 빙혼이 엄청난 살기를 내뿜었다.

    “허억.”

    “큭.”

    객잔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신음을 흘렸다.

    무림인들은 안색이 변해 뒤로 물러섰고, 상인들은 아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빙혼의 기세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슥.

    독고랑이 운현 앞으로 나선 것이다.

    비록 빙혼의 기세는 객잔 안의 무림인들을 향한 것이었지만, 운현의 코앞에서 발하는 살기를 독고랑은 용납하지 않았다.

    웅.

    독고랑의 검이 나지막이 울었다.

    그 분명한 적의에 빙혼이 즉시 반응했다.

    빙혼과 독고랑의 눈이 맞부딪혔다.

    파지직.

    ‘헉.’

    지켜보던 제갈기호는 헛바람을 삼켰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빙혼과 독고랑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제갈기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흉포한 두 마리 야수의 대치와도 같았다.

    독고랑이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산중의 대호라면, 빙혼은 죽더라도 반드시 상대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고 마는 설원의 늑대다.

    그때였다.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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