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두 개의 옥패
이른 아침,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제갈세가의 정문으로 나갔다.
“오, 운 서기. 이쪽입니다.”
커다란 덩치의 제갈기호가 쾌활한 목소리로 운현을 불렀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요.”
“하하, 내가 좀 바빠서 말입니다.”
제갈기호는 머리를 긁더니 문득 물었다.
“혹시 불편한 건 없었습니까?”
운현은 빙긋 웃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은 것 같아 죄송할 정도입니다.”
“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습니다. 자, 어서 가지요. 갈 길이 머니까요.”
제갈기호의 말에 운현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북해까지는 여전히 먼 길이다.
제갈기호가 먼저 마차에 타고 운현도 막 마차에 오르려던 때였다.
“운 학사님!”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운현의 발을 붙들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아, 남궁 소저.”
탁탁탁.
가벼운 움직임으로 날듯이 달려온 그녀는 바로 남궁비연이었다.
순식간에 운현 앞에 도착한 그녀는 살짝 숨을 가다듬었다.
아마도 급히 달려온 듯했다.
“지금 떠나시나요?”
조금 상기된 남궁비연의 물음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맹의 일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남궁비연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감사드려요. 학사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는 못했을거예요.”
그 말에 운현은 눈을 빛냈다.
“잘되신 모양이군요.”
“네.”
남궁비연은 환하게 웃었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에요.”
“다행입니다.”
운현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미소를 짓던 남궁비연이 문득 생각난 듯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아, 그리고.”
사락.
그녀가 품 안에서 꺼내든 것은 검은 수실이 달린 하얀 옥패였다.
남궁세가의 문양이 새겨진 고풍스러운 그 옥패는, 비록 제갈세가의 초록색 옥패에는 비하지 못해도 꽤나 귀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남궁비연은 운현에게 옥패를 내밀었다.
“아니, 이걸 왜…….”
“오늘 제갈세가의 도움을 얻게 된 건 학사님 덕분이에요. 지금은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나중에라도 꼭 남궁세가를 찾아 주세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남궁비연이 말했다.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은 소저께서 열심히 한 덕분입니다. 제게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에요.”
남궁비연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세가의 생리는 질리도록 잘 안다.
자신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가 확연히 바뀐 것이 누구 덕분인지 남궁비연은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떠나서라도, 제갈세가의 검을 단 삼 초식만으로 파훼한 운현의 실력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남궁세가는 결코 은혜를 잊지 않아요. 이 옥패를 보이시면 설령 제가 없더라도 학사님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반드시, 꼭 찾아와 주세요.”
말하는 남궁비연의 표정은 진지하고 간절하기까지 했다.
계속 사양했다간 절대 보내 주지 않을 기세라, 운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아니 시간을 내서 꼭 들르겠습니다.”
남궁비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운현의 손에 직접 옥패를 쥐어 주었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운현은 깜짝 놀랐다.
“크흠.”
운현은 짐짓 헛기침을 했다.
살짝 스친 남궁비연의 흰 손은 생각보다 더 부드러웠다.
“저, 운 서기. 이제 출발해야…….”
마차 안에 있던 제갈기호가 어쩐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운현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남궁 소저.”
“네. 운 학사님.”
남궁비연은 끝까지 운현을 ‘학사님’이라 불렀다.
이제 학사가 아니고 서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랴.
탁.
운현이 마차에 오르고 문이 닫혔다.
이미 마부석에 앉아 있던 독고랑이 마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는 크게 외쳤다.
“출발합니다!”
따각.
마차가 움직이고 운현은 남궁비연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남궁비연도 가만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따각, 따각.
창 밖으로 보이던 남궁비연의 자태는 곧 사람들 사이로 묻혀 버렸다.
이제 보이는 건 높이 솟은 제갈세가의 정문뿐이다.
“후우.”
창밖을 보던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 안에 있는 하얀 옥패를 매만졌다.
“이거 참…….”
기분이 묘했다.
같은 남궁세가의 누군가에겐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는데, 남궁비연은 이런 옥패까지 내어 주며 꼭 찾아와 달라고 했으니 말이다.
슥.
운현은 봇짐을 무릎에 놓고 잠시 무언가를 찾았다.
찾던 것은 곧 나왔다.
운현의 손에 초록색 옥패가 들렸다.
제갈세가의 가주가 준 옥패와 방금 전 남궁비연이 건넨 옥패가 양손에 하나씩이다.
‘두 개씩이나 봇짐에 넣어 둬도 괜찮을까?’
운현은 잠시 갈등했다.
이제껏 이렇게 비싸고 귀한 걸 가지고 다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림의 대환단이 있긴 했지만 이 옥패들은 그것과 달리 진짜다.
솔직히 운현으로선 부담이라, 그냥 도로 가져가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군자검과 남궁비연의 성의를 생각하면 그럴수도 없다.
‘이게 무슨 초청장도 아니고……. 아니, 잠깐.’
옥패를 보던 운현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런 옥패 없이 그냥 찾아가면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내쫓길 거라는, 그런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떨떠름하다.
운현은 탐탁잖은 표정으로 양손에 빛나는 옥패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제갈기호의 표정은 운현만큼이나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젠장. 이럴 줄은 알았지만 설마 저 옥패까지 주셨을 줄이야.’
제갈기호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운현이 꺼내 든 옥패는, 물론 그 자체로 대단히 값진 것이기는 하지만 제갈세가의 보물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가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제갈세가의 사람은 그 누구도 저 초록색 옥패를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저 옥패는 바로 군자검 제갈명의 친우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옥패를 지닌 자를 대함에 있어 결코 무례를 행해선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매사에 제갈세가의 가주를 대하듯 정중하고 극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저 옥패가 가지고 있는 진짜 의미다.
‘가주를 대하듯 하라니, 북해가 하루 이틀 걸리는 길도 아닌데!’
그 머나먼 땅까지, 아니 다시 돌아오는 그때까지 운현을 가주 모시듯 해야 할 사람은 바로 제갈기호다.
그러니 그가 속으로 울상이 된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으으으.”
제갈기호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운현이 바로 고개를 들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손에 하얗고 푸른 두 개의 옥패를 들고서.
“아,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갈기호는 즉시 고개를 저으며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저 옥패를 바라보고 있다간 부담감으로 속이 쓰려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젠장. 내 팔자 하곤.’
젊은 나이에 무림맹 사절의 정사를 맡게 되어 한껏 들떴던 것도 잠시뿐.
‘검성의 후계자’가 구태여 서기를 고집하는 것도 장단을 맞추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아예 가주 모시듯하게 생겼으니 한숨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하리라.
‘후우우.’
창밖으로 흘러가는 제남의 경치를 바라보며 제갈기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대로 마차에서 내리고 싶을 정도였지만 무심한 마차는 아랑곳없이 길을 재촉했다.
따각, 따각.
사방을 경계하는 독고랑의 날카로운 눈빛 속에, 마차는 제갈기호의 한숨과 운현의 걱정을 싣고 천천히 제남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북해를 향한 먼 길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
화려한 대전, 고풍스러운 긴 의자에 기대앉은 문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녹림의 산채들은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나?”
마치 여인처럼 가는 목소리였지만 주위에 선 이들의 표정에는 단번에 긴장이 흘렀다.
“그, 그렇습니다.”
옆에 선 중년의 사내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착.
문왕은 작은 비단 부채를 펼쳤다.
붉은 비단에 수놓은 금색 용봉 문양이 문왕의 얼굴을 가리고, 그 뒤로 보이는 그림 같은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흐음. 지난번에도 그렇고, 녹림이든 장강이든 영 미덥지 못하단 말이야.”
문왕은 문득 사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털썩.
사내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저, 저 같은 것이 어찌 저하 앞에서 하찮은 식견을 말씀드리겠습니까?”
말하는 사내의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자신의 의견을 말했던 자가 ‘주제넘다’며 팔을 잘린 것을 이미 본 까닭이다.
“흠, 그러냐?”
문왕은 흥미를 잃은 듯 시선을 돌렸다.
사락.
희고 가는 문왕의 손가락이 은쟁반에서 포도알 하나를 들었다.
“이번 일에 동원된 산채가 어디 어디라고 했지?”
“수, 수성채와 북호채, 그리고 대도채입니다.”
“인원은?”
중년의 사내는 주저했다.
정확한 인원까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탓이다.
“대, 대략 삼백여 명입니다.”
“삼백이십칠 명.”
문왕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며 정확한 숫자가 흘러나왔다.
“바로 사흘 전에 네가 보고했던 숫자다. 그들을 움직이는 데 얼마가 들었다고 했지?”
새파랗게 질린 사내는 와들와들 떨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대략, 아니, 치, 칠백, 아니 오백…….”
“은 오백칠십이 냥.”
싸늘한 목소리가 사내의 말을 끊었다.
“이 숫자 역시 네 입으로 직접 내게 말한 것이다. 역시 사흘 전에.”
문왕의 입안에서 포도가 터졌다.
“아니냐?”
“마, 맞습니다. 분명 그, 그러했습니다. 하하, 하하하.”
사내는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땀을 닦으며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길지 않았다.
“그래? 너는 정확한 숫자는 하나도 기억 못 했으면서.”
문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내가 맞다고 서슴없이 단언하는구나. 말의 앞뒤가 좀 안 맞는 거 아닌가?”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으며 문왕이 말했다.
“아니면 그냥 내 기분이나 맞춰 주려는 것이냐? 네가 보기에 내가…….”
아득.
문왕은 이를 갈았다.
“그렇게도 바보같이 보여?”
쿵.
중년의 사내가 즉시 머리를 찧었다.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제가 어찌 문왕 저하를…….”
착.
부채 접는 소리에 사내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불쾌한 표정이 역력한 문왕은 나지막이 말했다.
“……물러가라.”
“네, 네!”
사내는 급히 일어났다.
그는 고개를 땅에 닿을 듯 숙여 예를 표하고는 즉시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중년의 사내가 대전을 나가자 문왕은 혀를 찼다.
“쯧, 저런 멍청한 것에게 돈을 주고 일을 맡기고 있었다니.”
문왕은 중얼거리며 포도에 손을 뻗었다.
“처리해.”
스륵.
문왕의 뒤에서 모습을 나타낸 그림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언제 나타났었냐는 듯 다시 사라져 버렸다.
주위에 서 있던 수하들의 표정은 공포에 질리고, 은쟁반을 받치고 있던 시녀는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문왕은 그런 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녹림이건 장강이건 상관없이 그저 관(官)만 장악하면 끝날 일이거늘, 어찌 아버님께서는 이리도 번거로운 일을 벌이시지는지.”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문왕은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옆에 서 있는 수하에게 말했다.
“북해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수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소궁주 일행은?”
“아직 국경을 넘지 못했습니다.”
“녹림의 피해는 어느 정도냐?”
“어제까지 칠십사 명이 사망, 혹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흐음. 그녀가 아직 국경을 넘지 못했다니…….”
문왕은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넘지 못한 게 아니라 넘지 않은 것이겠군.”
문왕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가느다란 미소를 피워 올렸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넘을 수 있다는 것이겠지만, 과연 이번에는 어떨까?”
가느다란 문왕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여인의 입술처럼 짙은 붉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