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군자검의 호의
‘헉.’
자신의 목 앞에 멈춰 선 남궁비연의 칼날 앞에서 제갈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 어떻게…….”
혼란하고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제갈치는 남궁비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궁비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놀란 것은 남궁비연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자신은 그저 운현이 가르쳐 준 초식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 제갈치가 스스로의 목을 그녀의 검에 가져다 대었다.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그녀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가 이겼다.
비록 이것이 비무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짝, 짝, 짝.
정적을 깨고 누군가의 박수 소리가 연회장에 울렸다.
그는 바로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었다.
“좋은 검이오. 두 사람 덕분에 아주 좋은 여흥이 되었소.”
덜컥.
당황하는 다른 이들의 눈빛은 아랑곳없이 가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실례하겠소. 부디 계속 즐겨 주시기 바라오.”
“가, 가주님.”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지만 가주는 그대로 연회장을 떠났다.
몇 사람이 급히 그를 뒤따르고 그제야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스릉.
남궁비연은 검을 갈무리했다.
“감사합니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갈치를 향해 그녀는 가볍게 예를 표했다.
사락.
몸을 돌린 그녀는 이미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손을 권유하듯 내미는 건 아마도 같이 나가자는 뜻이리라.
“후후.”
남궁비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사박.
운현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몸짓은 비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대단히 가볍고 경쾌했다.
“제게 맡기셨다면.”
옆에 선 독고랑이 나지막이 운현에게 말했다.
“대인께서 번거로이 나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야 물론 그랬겠지만.”
운현은 독고랑의 말에 동의했다.
독고랑이라면 구태여 운현이 가르쳐 줄 것도 없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제갈치를 짓눌러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제갈치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고, 남궁비연이 돋보이는 일도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안 되네.”
운현이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자를 상대로 소중한 의제(義弟)를 내보낼 수는 없으니까.”
그건 운현의 진심이었다.
검기발현의 절정고수에게 제갈치 같은 자를 상대하라고 하는 건 이미 그 자체가 모욕이다.
“아, 그렇다고 남궁 소저를 함부로 여긴다는 건 아니고…….”
뭔가 할 말을 찾던 운현은 결국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독고랑을 돌아보았다.
독고랑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그런 거네.”
말을 얼버무린 건 벌써 남궁비연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갈까요?”
남궁비연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운현도 웃으며 답했다.
“네, 가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연회장을 나섰다.
독고랑이 묵묵히 그들을 뒤따르고, 운현의 말처럼 그렇게 연회는 끝났다.
제갈치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
새벽의 제갈세가는 조용했다.
간밤의 화려한 연회가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제갈세가는 어스름 속에 고요하게 잠겨 있었다.
사박.
운현은 천천히 숙소 주위를 거닐었다.
손님을 위해 꾸며 놓은 정갈한 산책로와 잘 다듬어진 정원은 운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수련을 할 만한 곳이 없다는 점이다.
심상 수련이 막혀 버린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아쉽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 운현은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무엇이 그리 아쉬우시오?”
저벅.
그는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운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거처는 편안하셨소?”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그는 바로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었다.
운현은 두 손을 모아 그에게 예를 표했다.
“네.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가주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우리 아이가 미숙한 탓에 무례를 범했소. 가주로서 사과드리오. 엄히 교육시킬 터이니 과히 허물치 말아 주시구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가주로서 사과한다는 말의 의미는 컸다.
운현은 기꺼이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저야말로 연회의 흥을 깨어 죄송합니다.”
자신이 남궁비연에게 초식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운현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가주라면 어차피 알고 있을 테니까.
“아니, 괜찮소. 그저 여흥이었을 뿐이니까.”
가주는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 빛나는 것을 운현은 놓치지 않았다.
“혹시 제갈가의 검을 이전에 본 적이 있었소?”
가주가 물었다.
“네. 용봉지회에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용봉지회라, 그럼 어제가…….”
“두 번째입니다.”
“허허.”
가주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렇다면 단 두 번만에 제갈세가의 검을 파훼했다는 것이오?”
“제갈세가의 검이 아니라 그 청년의 검이었을 뿐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미숙했으니까요.”
가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숙하다는 건 가주의 관점에서나 그런 것이다.
평생 가문의 검을 갈고닦아 온 제갈세가의 직계가 미숙하다면 세상에 누가 미숙하지 않다 말할 수 있을까?
“노파심이겠으나 혹여 그 아이의 검술만으로 제갈세가의 검이 평가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는구려.”
가주 제갈명의 눈동자에 빛이 번득이기 시작했다.
운현 역시 눈을 빛냈다.
‘혹시…….’
설마 그가 직접 한 수 보여 주겠다는 뜻일까?
운현으로선 기대감에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슥.
군자검 제갈명은 천천히 한 손을 사선으로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빈 손이었지만, 그가 손날을 세우자 즉시 주변의 기세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후우웅.
군자검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러나 운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네 주인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걱정말게.”
그것은 운현이 아니라 독고랑을 향해 한 말이었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독고랑이 검에 손을 얹은 채 군자검의 뒤에 서 있었다.
검기발현의 절정고수인 독고랑조차 긴장감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군자검의 기세는 대단했다.
슥.
군자검 제갈명이 손날을 그어 내렸다.
후욱.
그저 빈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빈손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이 운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파악.
펄럭이던 운현의 소매가 잘려 나갔다.
독고랑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려는 것을 운현의 미소가 제지했다.
“어떻소?”
제갈명이 물었다.
“대단하군요.”
운현이 솔직하게 답했다.
제갈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을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말씀드릴 수가 없겠습니다.”
“다음이라니?”
제갈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건 없다는 듯했지만 운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검로가 끝을 맺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이어지는 수가 몇 가지 있습니다만, 가주께서 무엇을 택하셨는지 궁금하군요.”
제갈명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군자검 제갈명은 천천히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대는 참으로 흥미로운 사람이구려.”
허연 수염이 무색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을 내뿜으며 제갈명이 말을 이었다.
“가능하면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을 정도로 말이오.”
“저도 그렇습니다.”
“하하하하.”
운현의 말에 군자검은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나 같은 늙은이와 있어 봤자 무엇이 재미있을까? 남궁가의 여식처럼 아리따운 아가씨와 있는 게 그대에겐 더 좋을 테지.”
“그렇지 않습니다.”
운현은 정색을 했다.
지금 군자검이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까닭이다.
“남궁 소저와 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가주님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기대가 됩니다.”
연회장은 남궁비연과 같이 나갔지만 그것이 전부다.
그녀는 일행이 기다리는 숙소로,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으니까.
“후후.”
군자검의 주름진 눈매에 미소가 번졌다.
“빈말이라도 고맙소.”
“빈말이 아니라…….”
슥.
군자검 제갈명은 자신의 품에 손을 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붉은 수실이 달린 자그마한 초록색 옥패였다.
“무림맹의 일이 끝나면.”
운현에게 옥패를 건네며 군자검이 말했다.
“언제고 한번 찾아오게. 제갈가의 사람에게 이 패를 보여 주면 감히 박대하지는 못할걸세.”
그는 운현에게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건 괜찮았다.
하지만 운현은 다른 이유로 당황하고 있었다.
“이, 이런 귀한 것을 연유도 없이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옥패의 표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과 단아한 붉은 수실은 이 옥패가 대단히 귀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귀한 것이긴 하지만 자네라면 상관 없지. 그리고 연유라면…….”
군자검은 웃었다.
“자네와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일세. 나이와 형편을 떠나서 흉금을 터놓고 말이야.”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후우.’
운현은 어르신들에게 약하다.
수염이 허연 노년의 군자검 제갈명이 이렇게 말하니 운현도 결국 그 옥패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두 손으로 정중하게 옥패를 받았다.
“내가 오히려 고맙네.”
“아닙니다. 이렇듯 호의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북해로 간다 했던가?”
문득 군자검이 물었다.
이번 북해 사절단을 말하는 것이리라.
“네.”
“먼 길이로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군자검은 운현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다녀오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 제갈세가가 언제든지 도울 테니.”
그것은 엄청난 말이었다.
제갈세가의 가주가 제갈세가의 이름으로 전폭적인 후원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운현은 그 말을 특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새 옷을 받은 것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또 보세.”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군자검은 몸을 돌렸다.
슥.
독고랑이 한 발 옆으로 비켜서 군자검에게 길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군자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검에 손을 얹고 있지는 않았다.
저벅, 저벅.
‘그 안목에 그 경지라.’
천천히 그 자리를 떠나며 군자검은 생각했다.
운현의 안목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절기 앞에서도 운현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저 머리로, 지식으로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바다의 거대함을 알지만 그 엄청난 파도 앞에서는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것처럼, 눈 앞에서 펼쳐지는 군자검의 절기에 경악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독고랑조차 긴장을 감추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나 운현은 그렇지 않았다.
공포에 질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경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경우라면 오직 하나뿐이다.
‘이미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는 뜻.’
저벅.
군자검 제갈명은 발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이르렀다 생각했는데, 결국 이 정도인가.”
검성.
그 이름은 모든 무인에게 경외의 대상이자 동시에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다.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검성의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을 때 군자검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검성이 인정한 자는 어떠한 자일까?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이며, 어떤 성품을 가진 자일까?
그에 대해 자신은 실망하게 될까, 아니면 경악하게 될까?
그래서 군자검은 기다렸다.
검성이 인정한 자이자, 자신과 검성의 간극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해 줄 운현을 말이다.
“허허.”
군자검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깊은 물은 소리가 없다 하였던가?”
어제 운현이 한 말을 그는 나지막이 되뇌었다.
어느새 새벽 하늘이 환하게 밝아 오고 있었지만, 군자검의 마음은 오히려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