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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69화 (169/530)

169화. 세 번의 초식

저벅.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중앙으로 나섰다.

본래 무희나 예인들을 위해 비어 있던 자리에 선 청년은 검을 빼 들었다.

스릉.

날카로운 칼날이 불빛 아래 번득였다.

연회장이 조용해지고, 청년은 검을 마주 잡고 가주에게 예를 올렸다.

“제갈치입니다. 부족하나마 검무를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를 표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운현 자신과 남궁비연을 바라보는 제갈치의 눈빛이 완연한 악의로 번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라랑.

악사가 검무를 위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제갈치의 칼날이 그에 화답하듯 불빛 아래 춤을 추었다.

쉬릭, 휘잉.

‘흐음.’

운현은 그의 칼날이 그리는 궤적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검무라고는 하지만 그가 펼쳐 내는 검로는 제갈세가의 검법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과연.’

성격과는 별개로 제갈치의 검로는 뛰어났다.

제갈세가의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잘 봐줘도 제갈치의 검법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만일 와불 선사가 있었다면 ‘네가 쓸데없이 눈만 높아져서 그래’라고 핀잔을 주었겠지만 말이다.

쉬익. 쉭.

차라라라랑.

음악이 고조되는 것과 함께 제갈치의 칼날도 사방에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 역시 제갈치의 검무에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를 추천했던 중년인의 표정에 흐뭇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할 무렵, 운현은 반대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제갈치의 현란한 검무가 점차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런.’

쉬익.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보며 운현은 독고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슥.

운현의 손이 독고랑에게 닿는 순간, 제갈치가 몸을 돌려 검을 휘둘렀다.

훙.

칼날이 운현과 남궁비연의 눈 앞으로 짓쳐 들었다.

그러나 운현은 눈도 깜빡 않고 그 칼날의 궤적을 지켜보았다.

운현은 알고 있었다.

제갈치의 검은 다만 위협일 뿐이라는 것과, 독고랑 역시 그것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다만 독고랑이 분노로 검을 뽑을까, 그것이 걱정되어 손을 뻗었을 뿐이다.

하지만 옆자리에 있던 남궁비연은 그렇지 못했다.

“앗!”

제갈치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설마 하던 그녀는 칼끝이 눈앞을 스치자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비록 무가의 여인이지만 연회 자리에서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한 탓이다.

아니, 오히려 내력이 담긴 칼날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멀리 있는 이들에겐 남궁비연이 겁을 먹어 과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훗.”

제갈치는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빙글 몸을 돌려 검무를 이어 갔다.

“푸훗.”

“호호.”

남궁비연을 보며 몇 사람이 웃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을 참아 내던 남궁비연도 얼굴이 붉어졌다.

“소저.”

그때 문득 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궁비연이 돌아보자 운현은 제갈치의 검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저 청년이 우리에게 못된 생각을 품은 듯합니다. 이대로 당해 줄 수는 없으니 이렇게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어떻게요?”

운현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남궁비연을 보았다.

“먼저 이 검로를 잘 기억하십시오.”

탁자 아래에서 손가락 하나를 세운 운현은 그것을 마치 검인 양 가볍게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남궁비연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녀 역시 무공으로는 세가에서 촉망받는 인재다.

비록 경지는 높지 않다지만 운현의 보여 주는 동작의 의미를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제가 어찌 감히 제갈세가의 검법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같은 동작을 몇번 반복한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 버릇없는 청년의 수준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것은 이제껏 남궁비연이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멋진 웃음이었다.

부웅.

띠리리링.

급박한 음악과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운현과 남궁비연은 고개를 들었다.

오만한 조소를 머금은 제갈치의 검이 또다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쉬익.

제갈치의 검이 다시 운현과 남궁비연 앞을 스쳤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욱 가까왔다.

훙, 후웅.

칼날이 불빛아래 번쩍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는 그들도 제갈치의 의도를 분명히 깨달았다.

그들 역시 제갈치처럼, 몰락한 경쟁 가문의 여식과 버릇없는 서기가 쩔쩔매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후욱.

검끝에서 일어난 바람이 운현의 머리카락을 또다시 흔들었다.

하지만 운현과 남궁비연의 반응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쯧.”

어디선가 아쉬운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검무를 이어 가던 제갈치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저것들이 감히.’

제갈치는 오기가 났다.

본래는 그저 잘난 척하던 서기가 벌벌 떠는 모습을, 몰락한 가문의 아가씨가 파랗게 질리는 얼굴을 보려고 했던 것뿐이다.

처음에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붉은 입술을 깨물고 굴욕을 참아 내던 저 자존심 강한 아가씨가 짧은 비명을 흘렸을 때는 무언가 변태적인 욕망마저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두려운 기색조차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제갈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흥, 본래 이렇게까진 안 하려 했지만.’

피를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문제가 다르다.

‘감히 주제를 모르고.’

제갈치는 이를 갈았다.

남궁세가의 아가씨라지만 이미 망한 가문이다.

무림맹 소속이라지만 서기라면 후환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옆에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걸리긴 하지만 이곳은 제갈세가다.

아무리 강호 무림의 고수라도 제갈세가 한복판에서 감히 무엇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제갈치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어디, 이러고도 너희들이 날 노려볼 수 있나 보자.’

남궁세가의 아가씨라면 옷자락을 베어 수치를 주는 것 정도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운현은 그렇게 넘어갈 수 없다.

귀 하나, 혹은 눈 하나.

아니면 저 꼴보기 싫은 얼굴에 긴 자상을 만들어 주는 것도 좋으리라.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갈 만한 흉터를 말이다.

검무를 이어 가던 제갈치가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사락.

남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

그녀의 목소리에 가주가 주목했다.

가볍게 예를 표한 남궁비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검무는 본디 상대가 있어야 더욱 흥을 더하는 법이지요. 부족하나마 제가 제갈 공자님의 상대를 하면 어떨까요?”

‘흥.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검무를 잠시 멈추고 있던 제갈치는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운현이 남궁비연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미 보았다.

아마도 운현이 남궁비연을 충동질한 것이 분명하리라.

“그거 좋군요.”

가주가 무어라 하기 전에 제갈치가 먼저 말했다.

“남궁 소저가 상대라면 저도 원하는 바입니다, 가주님.”

제갈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가?”

가주는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기대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대대로 검왕가라 자처해 온 남궁세가의 검을,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갈치가 꺾어 버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비록 상대가 남궁세가의 젊은 아가씨라 해도 말이다.

“그리하시게.”

가주 제갈명은 순순히 허락했다.

평소 그답지 않은, 마치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담담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박.

남궁비연은 연회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유연한 몸매와 부드러운 움직임은 그녀가 오랜 수련을 거친 무가의 아가씨임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창.

남궁비연이 자신의 검을 뽑았다.

곧게 뻗은 칼날이 연회장 불빛 아래 반짝였다.

슥.

남궁비연은 검을 맞잡고 가주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제갈치를 향해 섰다.

“부족한 재주나마 잘 부탁드려요.”

그것은 마치 비무와 같은 예법이었다.

제갈치는 가볍게 검을 들어 그녀의 예에 답했다.

“잘 부탁하오.”

‘흥, 차라리 나오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앉아서 위협을 당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검을 들고 맞서는 편이 낫다.

그럴 실력이 된다면 말이다.

‘어림없는 소리.’

한눈에 봐도 남궁비연은 매우 젊다.

물론 제갈치도 청년이지만 남궁비연보다는 나이가 많다.

게다가 조금 전, 자신의 검에 남궁비연이 겁을 먹는 모습을 제갈치는 분명히 보았다.

지금까지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제갈치로서는 남궁비연이 가소롭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너희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검무를 시작하면 갑자기 전력을 쏟아 남궁비연에게 짓쳐 들 것이다.

당황한 그녀의 검을 쳐서 날려 버리고 나면, 그다음은 제갈치의 마음대로다.

남궁비연의 옷을 베어 맨살을 드러내건, 아니면 실수를 빙자하여 저 서기의 얼굴에 검을 그어 버리건 간에 상관없다.

책임은 어디까지나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을 피하지 못한 서기에게 있는 것이니까.

슥.

제갈치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따라랑.

탓.

느리고 느긋한 연주였지만 제갈치의 칼날은 사정없이 남궁비연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기습.

하지만 그 순간 남궁비연은 오히려 운현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 시작하자마자 덤벼들겁니다.

―네? 설마요.

남궁비연의 말에 운현은 웃었다.

―참을성 없는 사람은 성급히 일을 저지르기 마련이니까요.

참을성 없다는 말 앞에 하려던 ‘멍청하고’라는 수식어는 생략했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평가를 넘어 모욕의 의미까지 담겨 있으니까.

―그가 펼칠 검로는 아마 이것일 겁니다.

제갈치가 어떤 검로를 펼칠 때 가장 자랑스러워했는지 운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만큼은 제갈치도 온 정신을 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운현의 손이 움직이며 세 번의 초식을 보여 주었다.

첫 두 번은 자연스러운 연결이었지만 마지막 초식은 전혀 난데없었다.

―정확히 이대로 검을 펼치세요.

남궁비연은 의아했지만 운현이 너무 태연해서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이번엔 운현이 오히려 의아해했다.

하지만 곧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다음에는.

운현은 웃으며 답했다.

―이 지루한 연회장을 나가 편히 쉴 수 있게 되겠지요.

남궁비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대로 앉아서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을 들고 나가는 편이 훨씬 그녀다운 선택이다.

쉬익.

그리고 지금 제갈치의 검이 그녀에게 짓쳐 들고 있었다.

운현이 말한 그대로 말이다.

웅.

내력을 실은 남궁비연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현이 보여 준 초식과 한 치도 틀리지 않은, 그야말로 정확하고 모범적인 움직임이었다.

휘릭.

‘웃.’

남궁비연의 칼날은 제갈치를 순간 움찔하게 했다.

상대가 당황하리라 생각했던 예상은 빗나갔고, 제갈치는 더욱 화가 났다.

하지만 분노할 시간은 없었다.

어느새 몸을 돌린 남궁비연의 칼끝이 제갈치를 향해 찔러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히!’

제갈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전력을 다해 남궁비연의 검을 쳐 냈다.

아니, 쳐 내려 했다.

‘어?’

그러나 남궁비연의 검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

제갈치는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평생 갈고닦아 온 제갈세가의 검법을 따라 몸을 움직이며 자신의 사각을 보호한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제갈세가의 무인다운, 칭찬받을 만한 대처였다.

그리고 그 대처는 운현이 이미 꿰뚫어 본 그대로이기도 했다.

훅.

옆에서 검이 제갈치를 향해 들어왔다.

아무런 전조도, 기세조차도 없었다.

그저 우연이라는 듯 뻗어 온 그 검은, 제갈치의 바로 목 앞에서 그 날카로운 칼날을 번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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