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67화 (167/530)
  • 167화. 제갈세가의 연회

    탁.

    누군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마차 곁으로, 정확히는 제갈기호가 앉은 쪽으로 다가왔다.

    제갈기호는 즉시 마부에게 말했다.

    “잠시 멈춰라.”

    따각.

    마차가 멈추고 젊은 여인이 제갈기호에게 예를 표했다.

    고급스러운 무복을 입은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였다.

    “누구시오?”

    “실례합니다. 저는 남궁세가의 남궁비연이라 합니다. 혹시 제갈세가의 분이십니까?”

    ‘아.’

    그녀는 운현이 아는 사람이었다.

    남궁비연, 바로 지난 용봉지회에서 보았던 아가씨였다.

    남해검문의 파진한을 상대로 제법 당찬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운현의 기억에 생생하다.

    “그렇소. 헌데 무슨 일이시오?”

    제갈기호가 사뭇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궁비연의 매력적인 눈썹이 꿈틀했다.

    남궁세가라고 밝혔음에도 이런 반응이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감정을 다스리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급한 일로 제갈세가의 가주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문지기가 들여보내 주질 않습니다.”

    부총관도 아니고 문지기다.

    가주님을 뵈려면 추천장을 가져오라며 문지기에게 핀잔을 들은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지만 화를 낼 수조차 없었다.

    남궁세가가 이전 같지 않음은 온 천하가 아는 사실이고, 그들은 이곳에 도움을 요청하러 온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 제갈세가의 깃발을 단 이 마차를 발견한 것이다.

    “그래요? 그래서요? 원하는 게 뭡니까?”

    제갈기호가 다시 시큰둥하게 물었다.

    남궁비연이 주먹을 꽉 쥐는 것을 운현은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저희가 중요한 용무로 찾아왔다고, 가주께 전해 주세요.”

    “허어.”

    제갈기호가 한숨을 쉬었다.

    “보시오.”

    슥.

    길을 메운 많은 사람과 마차들을 가리키며 제갈기호가 말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차례를 기다리고 있소. 모두가 아주 중요한 용무를 가지고 말이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편법을 쓰려고 하면 되겠소?”

    짐짓 엄한 눈빛으로 제갈기호가 남궁비연을 쳐다보았다.

    남궁비연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허나 저희는…….”

    “쯧, 알았소.”

    제갈기호가 인상을 쓰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 이번만은 문지기에게 말을 해 두겠소만, 다음부터는 조심하기 바라오. 세가의 자제라면 남에게 본이 되어야 하지 않겠소?”

    남궁비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모욕을 감내할 뿐.

    “가자!”

    제갈기호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랴!”

    마차는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남궁비연은 운현을 보지 못했다.

    따각, 따각.

    “이런 게 참 문제입니다.”

    제갈기호가 짐짓 곤란한 표정으로 운현에게 말했다.

    “신뢰받는 것이야 좋지만 여기저기서 무턱대고 손을 벌린다니까요? 개중에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도 허다하니, 남을 도와주는 데도 지혜와 분별이 필요합니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남을 돕는 데도 지혜가 있어야 하지요.”

    운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는 것 역시 필요하겠지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쉽게 상처를 받기 마련이니까요.”

    그건 제갈기호로서는 제법 뜨금한 말이었다.

    제갈세가의 위세를 보여 주려 했던 것이 오히려 부정적인 인상을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갈기호는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운 서기의 말이 참으로 지당하지요. 하하하.”

    따각.

    어느새 마차는 제갈세가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달칵.

    문이 열리고 운현과 제갈기호가 내렸다.

    얼른 달려와 예를 표하는 부총관에게 제갈기호가 말했다.

    “남궁세가 사람들이 저기서 기다리고 있으니 들여보내도록 하게.”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정문을 담당하는 부총관은 조금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곧 고개를 숙여 제갈기호의 명을 받들었다.

    “그럼 들어갈까요?”

    뚱뚱한 제갈기호가 넉살 좋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운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폐를 끼치겠습니다.”

    “아이구, 폐라니요. 운 서기도 참, 하하하.”

    제갈기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운현과 함께 제갈세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뒤를 무표정한 독고랑이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

    제갈기호는 고풍스러운 건물로 운현과 독고랑을 안내했다.

    ‘제갈세가의 높은 사람이라도 만나는 건가’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그곳은 두 사람을 위한 숙소였다.

    편히 쉬시라는 말을 남기고 제갈기호는 떠났다.

    의외긴 했지만 운현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먼 길을 급히 오느라 제대로 씻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오오.”

    숙소에 들어선 운현은 감탄을 흘렸다.

    방은 생각만큼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았다.

    그러나 옛스러우면서도 아담한 장식들과 벽에 걸린 글씨는 운현의 취향에 딱 맞았다.

    “응? 이 글씨는…….”

    운현은 글씨 앞에 서서 눈을 빛냈다.

    짐작이 맞다면 대단한 서예가의 작품이 분명했다.

    운현은 독고랑을 돌아보며 물었다.

    “독고 제의 방에도 글씨가 걸려 있었던가?”

    “모릅니다.”

    독고랑이 답했다.

    하긴 알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럼 가 보세. 그쪽에도 제법 대단한 것이 걸려 있을 것 같으니까.”

    운현이 앞장서서 독고랑의 숙소로 가려고 하던 때였다.

    슥.

    독고랑이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흰머리의 늙은 시종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운현과 독고랑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한 후 말했다.

    “가주께서 두 분을 저녁 연회에 초청하셨습니다.”

    “연회요?”

    운현은 반문했다.

    제갈세가에 왔으니 가주나 세가의 어른에게 인사를 올리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갑자기 연회에 초청받는 건 의외였다.

    노년의 시종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주께서 가까운 친지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자리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하시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이를테면 친족끼리의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인 듯싶었다.

    “감사합니다. 기꺼이 그리하지요.”

    운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

    제갈기호는 가주, 군자검 제갈명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 오거라.”

    흰 수염을 길게 기른 군자검 제갈명이 웃으며 제갈기호를 반겼다.

    곧은 자세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림 세가의 가주라기보다는 마치 백발의 노학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기세는 그가 제갈세가의 가주임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제갈기호는 정중하게 예를 표한 후 얄팍한 서찰 하나를 품에서 꺼냈다.

    “대사형의 서찰입니다.”

    “그래? 어디 보자.”

    바스락.

    무림맹 대표 제갈연이 보낸 서찰을 받아 든 가주는 그 자리에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음.”

    서찰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바스락.

    군자검은 서찰을 접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 연회에 그를 초대했다.”

    가주의 말이 당연하다고 제갈기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그도 예상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너는 참석하지 마라.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말고.”

    제갈기호는 즉시 가주의 의도를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제갈기호가 고개를 숙였다.

    역시 예상대로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나섰다.

    이제 연회가 끝나면 소위 ‘검성의 후계자’라는 운현에 대한 평가가 정해질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제갈세가의 방침도.

    “아, 그리고.”

    가주가 문득 말했다.

    “네가 남궁세가의 여식을 들이라 했더냐?”

    “네. 그가 관심을 보이기에 그리하였습니다.”

    “몰락한 세가의 여식과 서기를 자처하는 검성의 후계자라…….”

    가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재미있는 그림이 나올지도 모르겠군.”

    중얼거리던 가주는 고개를 들어 제갈기호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나가 보거라.”

    제갈기호는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조심스럽게 가주의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탁.

    문이 닫히고 군자검 제갈명은 서찰을 탁자 위에 놓았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어느새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더욱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저녁 연회는 커다란 대전에서 열렸다.

    그곳에 들어선 순간 운현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하라더니.’

    늙은 시종은 분명 가까운 친지들과 식사하는 자리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은 옳았다.

    다만 ‘가까운 친지’가 삼십여 명이 넘는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하하하.”

    환하게 불을 밝힌 대전에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좋은 차와 향기로운 미주를 즐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벼운 웃음을 흘리곤 했다.

    오직 운현과 독고랑만 어울리지 않는 곳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옷이 새 거라 다행이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숙소에는 운현과 독고랑의 새 옷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먼 길에 제대로 된 의복이 없음을 배려한 것이리라.

    늙은 시종은 갑자기 마련한 것이라 죄송하다고 했지만 운현이 가진 옷들보다 훨씬 좋았다.

    “이리 오시지요.”

    시녀의 안내에 따라 운현과 독고랑은 자리에 앉았다.

    상석도 아니지만 그리 낮은 곳도 아닌 평범한 자리였다.

    ‘가주는 아직 안 왔나?’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운현은 의외의 얼굴을, 그것도 바로 옆자리에서 발견했다.

    ‘어?’

    홀로 조용히 찻잔을 쥐고 있는 조금 긴장된 표정의 매력적인 젊은 아가씨.

    바로 남궁세가의 남궁비연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운현이 말을 건넸다.

    혼자 있던 남궁비연은 조금 놀랐는지 동그란 눈으로 운현을 쳐다보았다.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용봉지회에서 잠시 뵈었던 운현이라 합니다.”

    “아!”

    남궁비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모를 수도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녀는 운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북해빙궁의 소궁주와 함께 계시던 학사님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은 무림맹 서기로 있습니다.”

    운현은 그녀에게 가볍게 예를 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남궁비연 역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무림맹의 서기시라니, 북해 분들과 함께 떠나신 게 아니었나요?”

    “아, 전 용봉지회 동안만 함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셨군요.”

    문득 남궁비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때 학사님의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어요.”

    “네?”

    “남해검문의 파진한 공자를 위해 나서셨을 때 말이에요.”

    남궁비연이 말하는 것은 파진한이 이기고도 승리를 빼앗겼던 때를 말하는 것이다.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비무의 패배를 승복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운현은 크게 화를 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파진한 공자의 상대가 제갈세가의 사람이었는데…….’

    승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운현과 험악한 말까지 나눈 사람은 남궁세가였고 말이다.

    문득 남궁비연이 말했다.

    “사형의 일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어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