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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66화 (166/530)
  • 166화. 좋은 사람이라더니

    ‘끄응.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제갈기호는 내심 당혹스러웠다.

    ‘그 운현’이 저런 평범한 인상의 사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서기라 하니 문사 차림이야 이해하지만, ‘검성의 후계자’라는 명호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게다가 고독객 독고랑이라니?

    검기발현의 절정고수이자 최근 제갈세가에서 가장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그가 어째서 일개 호위로 참가한단 말인가?

    제갈기호가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관지부가 말했다.

    “북해에 전할 무림맹의 서한과 예물은 여기 있습니다.”

    화려한 비단으로 싸인, 그리 크지 않은 함 하나를 관지부가 공손히 내밀었다.

    “아, 네.”

    운현이 무심결에 반응했다.

    그때 제갈기호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삭.

    “이건 제가 맡도록 하지요.”

    둔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제갈기호의 몸놀림은 사뭇 재빨랐다.

    보통 이런 것들은 부사가 챙기기 마련이지만, 정사인 제갈기호가 그리 하겠다니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운현으로서는 등짐에 걸린 낙일검만으로도 충분히 어깨가 무겁다.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운현의 말에 제갈기호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지요.”

    새삼스레 당황스러워하는 그 모습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사람이라더니, 이상한 사람을 잘못 말했나?’

    분명 편어두는 제갈기호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운현이 보기에는 어쩐지 부산스럽고 이상한 사람에 더 가깝다.

    ‘북해까지 가는데 정사가 저러면, 부사로서 좀 불안한데…….’

    운현의 염려와 함께 일행은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정사 제갈기호와 부사 운현이 안에 타고 호위인 독고랑은 마부석에 올랐다.

    관지부와 변기량이 나란히 서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운현은 창밖으로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이랴!”

    따각, 따각.

    마부의 외침과 함께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나먼 새외의 땅, 북해를 향하는 여정이 지금 시작된 것이다.

    ***

    사절단의 마차는 넓은 관도를 순조롭게 달려 나갔다.

    저녁이면 객잔에 들러 휴식을 취했고,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길을 재촉했다.

    독고랑은 마부석에 앉아 묵묵히 주변을 경계했다.

    덕분에 마부가 좌불안석이었지만 그대로 며칠이 지나자 익숙해진 듯했다.

    다만 이야기 상대가 없어 매우 지루해하긴 했지만 말이다.

    따각, 따각.

    “운 서기님은 소속이 어디입니까?”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심심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제갈기호가 결국 운현에게 말을 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벌써 출발한 지 사흘이 지났고, 그간 제대로 된 대화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저는 지객당 소속입니다.”

    운현이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정사께서는 제갈세가의 분이라 하시던데…….”

    “그냥 편하게 부르십시오. 둘만 있는데 정사 부사 따져서 뭐하겠습니까?”

    제갈기호는 손을 내저었다.

    ‘음, 그래도 직분은 중요한데.’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정사의 뜻이니 그리하기로 했다.

    “제갈 공자님도 진법이나 학문에 조예가 있으십니까?”

    운현은 일단 제갈 공자라 부르기로 했다.

    제갈기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돌머리라서 그런 쪽은 영 꽝입니다. 게다가 형님이나 누님 중에 워낙 똑똑한 분들이 많아서요.”

    씨익 웃으며 제갈기호가 말했다.

    “저야 그냥 이것저것, 잡다하게 하는 편입니다.”

    “그러시군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제갈기호에게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박학다식이라 하지 않습니까? 하나를 깊이 아는 것도 좋지만 넓게 두루 아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겠지요.”

    그 말에 제갈기호는 눈을 빛냈다.

    ‘검성의 후계자’가, 오직 검 하나만 추구해 왔을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운 서기께서는 학문을 잘 아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갈기호의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학문을 잘 안다기보다.”

    한숨을 쉬고 운현은 말을 이었다.

    “시험 잘 보는 법을 아는 것이지요.”

    과거시험이 학문의 성취를 평가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정해진 형식과 규칙을 철저히 지켜 시험관들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작은 실수로도 수 년의 공부가 헛것이 되고, 단 한 자도 자신의 뜻대로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그러니 학문이 아니라 시험 잘 보는 법을 아는 것이라는 운현의 말은 지극히 옳았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운현이니 말이다.

    “어, 그런가요?”

    몸집 좋은 제갈기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과거시험에 합격할 정도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제갈세가에서도 자주 나오기 힘든 건데요, 그거.”

    운현은 씁쓸히 웃었다.

    그냥 합격이 아니고 장원이다.

    하지만 구태여 그걸 지적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따각, 따각.

    가슴속에 밀려드는 허탈감 때문일까?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갈기호는 그런 운현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검성의 후계자라…….’

    대사형 제갈연은 그가 검성의 후계자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갈기호는 가슴이 뛰었다.

    아니, 검을 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검성.

    한 자루 검, 한월로 살아 있는 전설이 된 사람.

    경외하는 자도 많고 적대하는 자도 무수하나 그 누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

    그가 바로 검성이다.

    그에게 후계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만으로도 강호는 한바탕 요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검성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다.

    무림맹에서 쉬쉬한 것도 넘치도록 납득이 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검성의 후계자는 제갈기호의 예상과 크게 달랐다.

    아니, 아예 비슷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그의 호위라는 고독객 독고랑이 ‘검성의 후계자’에 더 어울릴 정도였다.

    ‘고독객 독고랑을 호위로 부리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혜성같이 등장한 검기발현의 절정고수이자 홀로 강호를 떠도는 외로운 늑대.

    그가 바로 고독객 독고랑이다.

    그런데 그 고독객이 운현을 대하는 태도는 누가 봐도 수하가 주군을 대하는 듯했다.

    이 정도면 절대 단순한 호위 정도가 아니다.

    애초에 고독객 독고랑이 호위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운현은 독고랑을 ‘독고 제’라 부르며 친근히 대한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제갈세가에서 나고 자란 제갈기호로서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기세는, 확실히 범상치는 않은데…….’

    제갈기호 역시 촉망받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다.

    운현에게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세를 모를 리 없었다.

    문제는 그 기세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고독객 독고랑은 물론이고 제갈기호 자신과 비교해도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신화에 나오는 반박귀진의 경지도 아닐 테고.’

    어마어마한 고수가 되어 극의에 이르면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운현의 모습은 평범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다.

    ‘모르겠네.’

    제갈기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운현이 물었다.

    제갈기호는 아차 싶었다.

    혼자 생각이 너무 길었던 듯하다.

    “딱히 걱정 같은 건 아닙니다만…….”

    제갈기호는 얼른 말을 돌렸다.

    “가는 길에 잠시 본가에 들르는 것이 어떨까요? 조금 돌긴 하겠습니다만 일정엔 무리가 없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갈기호는 운현이 동의할 것을 알았다.

    “본가라면, 제갈세가 말씀입니까?”

    운현의 눈동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네. 제갈세가요.”

    비록 무림맹에 있지만 강호 무림은 운현에겐 여전히 미지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특히 제갈세가 같은 무림 세가라니, 운현의 흥미를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제갈기호는 사람 좋은 후덕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운 서기시라면 언제든 환영이지요.”

    그 말에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제갈기호가 본 중에 가장 환하고 밝은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며 제갈기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핑곗거리를 열 개는 더 넘게 준비했는데.’

    이렇게 쉽게 될 줄 알았으면 고민도 안 했으리라.

    어쨌거나 잘되었으니 다행이었다.

    ‘본가에 가면 운 서기의 정체도 조금은 감을 잡을 수 있겠지.’

    제갈세가에는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있다.

    그라면 이 정체 모를 서기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밝혀 줄 것이다.

    제갈기호는 그렇게 기대했다.

    따각, 따각.

    마차는 넓은 관도를 쉬지 않고 내달렸다.

    북해도 멀었지만 제갈세가가 있는 산동성 제남까지도 여전히 먼 길이었다.

    ***

    일행이 탄 마차는 순조롭게 제갈세가를 향해 달려갔다.

    무림맹의 깃발 덕분인지, 아니면 독고랑의 눈빛 때문인지 몰라도 마차에 시비를 거는 간 큰 도적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마차는 산동성의 성도, 제남에 들어서고 있었다.

    “제남이 보입니다!”

    마부가 유난히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남에서는, 적어도 과묵한 독고랑보다는 좋은 대화 상대를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곳이 제남이군요. 제갈 공자.”

    운현의 말에 제갈기호 역시 뿌듯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네. 아주 좋은 곳입니다. 운 서기의 생각보다 훨씬 말이지요. 하하.”

    운현과 제갈기호는 제법 편하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무료한 마차 여행에서 할 일이 대화밖에 없었고, 제갈기호는 매우 사교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따그닥, 따그닥.

    제남은 유서 깊은 고도(古都)다.

    창밖으로 지나는 고풍스러운 옛 건물들을 바라보며 운현은 눈을 빛냈다.

    책에서만 보던 역사의 장면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는 듯했다.

    “제남은 산동의 요충지예요. 매년 이곳을 지나는 물자와 사람이 결코 작지 않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겁니다.”

    제갈기호의 말대로였다.

    마차가 도심으로 접어들며 화려하고 번화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가가 도심 한가운데 있습니까?”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큰 세가의 장원은 보통 조금 외곽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차는 자꾸만 번화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본래는 아니었습니다만.”

    씩 웃으며 제갈기호가 말했다.

    “제갈세가가 자리잡은 곳이 가장 번화한 곳이 되었다 하더군요. 이곳 제남의 중심은 바로 우리 제갈세가니까요.”

    그건 사뭇 오만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그러나 제남에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렇습니까? 대단하군요.”

    운현의 말에 제갈기호의 표정이 더욱 뿌듯해졌다.

    그때였다.

    “워! 워!”

    마부가 속력을 늦추더니 곧 마차가 멈춰 섰다.

    제갈기호가 마부에게 물었다.

    “왜 멈추는 게냐?”

    “그게, 길이 무척 혼잡합니다.”

    운현은 고개를 내밀어 마차 앞을 살폈다.

    제갈세가의 정문으로 보이는 높다란 문이 저편에 보이고, 사람과 마차 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이러니 마차가 멈춘 것도 당연했다.

    “세가의 깃발을 마차에 달아 두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마부가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마부는 급히 작은 깃발 하나를 꺼내 마차에 달았다.

    그러자 주변이 웅성거리더니 사람과 마차 들이 옆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깃발 하나로 단번에 길이 열린 것이다.

    ‘호오.’

    운현이 놀라는데 제갈기호는 당연한 듯 마부에게 말했다.

    “가자.”

    “네. 이랴!”

    따각, 따각.

    마차는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본래 번잡하던 거리에 길을 내려니 사람이나 마차 들도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차를 향해 예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남에서 제갈세가의 위세가 어떤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운현이 어쩐지 복잡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때였다.

    “잠시만요.”

    문득 들려온 젊은 여인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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