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무림맹 북해 사절단
“흥.”
이무심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힘을 주어 자신의 칼을 빼냈다.
서걱.
낯선 기운이 일렁이는 이무심의 칼은 적혈마군의 가슴을 한 움큼 가까이 뜯어냈다.
그러나 어차피 상관없었다.
적혈마군은 이미 절명했기 때문이다.
스륵, 쿵.
커다란 적혈마군의 몸이 옆으로 기울더니 그대로 땅으로 고꾸라졌다.
그것이 장강수로채 연합의 총채주였던 적혈마군의 마지막이었다.
“그리 억울해 할 것 없다.”
쓰러진 적혈마군을 내려다보며 이무심이 말했다.
“어차피 너도 누군가를 죽이고 올라온 자리 아니더냐? 그러니 너도 칼에 죽는 것이 사필귀정이니라.”
거만하게 말한 이무심은 고개를 돌려 채주들을 바라보았다.
슥.
이무심은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적혈마군은 성정이 포악하여 총채주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나 이무심이 처단하였소. 이 일에 이의가 있는 분이 있으시오?”
채주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채주들은 슬며시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칼을 든 이무심이 아니라, 귀빈석에 앉아 부채로 얼굴을 가린 한 젊은 청년의 눈치를 말이다.
슥.
화려한 옷을 입은 그 청년은 이 참극이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일인 양 은쟁반에 놓인 과일을 집어 들고 있었다.
언뜻 곱게 자란 귀공자 같은 모습이지만 그를 무시하는 채주는 아무도 없었다.
그 청년이 바로 ‘문왕’이며, 누런 무복을 입은 황천대가 그의 주변을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천대가 뿜어내는 기세만으로도 채주들은 감히 쳐다볼 엄두조차 못 냈다.
“커험.”
이무심이 헛기침을 하자 채주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향한 그 공포의 눈빛들을 마주하며 이무심은 뿌듯함을 느꼈다.
“총채주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으나 막중한 자리를 언제까지 비워 둘 수는 없는 일. 누군가 적당한 분이 총채주 자리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오만,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소?”
자기가 죽여 놓고 ‘불의의 사고’라니, 이무심은 말뜻도 모르고 문자를 써 대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그걸 문제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회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슥.
문사 차림의 중년 사내가 조용히 일어섰다.
긴 수염을 가진 그는 이무심을 향해 예를 표하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흉악한 폭군을 벌하신 이무심 채주께서 총채주의 자리에 오르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는 이무심과 함께 온 ‘장자방’이라는 모사였다.
다시 말하면 이무심의 편이라는 뜻이다.
누가 봐도 짜고 벌이는 일이었지만 이무심도, 장자방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크흠, 내가 그런 중책을 어찌…….”
이무심은 짐짓 사양하는 척하며 채주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몇몇 채주들이 즉시 반응했다.
“이무심 채주께서 총채주의 자리에 오르셔야 합니다!”
“그, 그렇습니다! 이 채주께서 총채주님이 되심이 옳습니다!”
이무심과 한편이 된 채주들이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다른 채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 수적 생활로 눈치가 빠른 채주들은 이미 판이 뒤집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이무심에게 동조했다.
“채주님! 총채주가 되어 주십시오!”
“수로채 연합을 이끌어 주십시오, 채주님!”
“총채주님 만세!”
분위기는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여전히 불편한 표정을 짓는 채주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황천대의 섬뜩한 살기에 살갗이 저릿저릿했기 때문이다.
총채주였던 적혈마군조차 서슴없이 죽이는데 채주 한둘쯤의 목숨이야 거리낄 것도 없으리라.
“허어, 이거 참. 나는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닌데…….”
이무심은 피도 마르지 않은 칼을 든 채 너털웃음을 흘렸다.
“여러 형제들의 뜻이 그러하니 어쩔 수가 없겠소이다.”
소리치던 채주들은 숨을 죽인 채 이무심과 문왕의 눈치를 살폈다.
이무심 역시 문왕을 슬쩍 쳐다보았다.
문왕의 눈이 가늘게 웃는 것을 확인한 후, 이무심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이무심, 살신성인하는 마음으로 총채주의 직위를 받아들이겠소.”
채주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채주님 만세!”
“장강수로채 만세!”
“이무심 총채주님 만세!”
커다란 환호가 연회장이 떠나갈 듯 터져 나왔다.
아직 피도 마르지 않은 칼을 든 채 이무심은 연신 만족한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흘렸다.
유명무실하던 장강수로채 연합이 새로운 총채주를 맞이하는, 그리고 한낱 수적 떼 두목이던 이무심이 철면무심이라는 명호를 얻는 순간이었다.
***
짐을 챙긴 운현은 숙소를 나와 무림맹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북해로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그냥 가도 되는 건가?’
운현의 짐은 간소했다.
애초에 짐 자체가 별로 없던 데다가 뭘 챙겨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북해에 가는데 꼭 필요한 게 뭐지?’
운현도 몰랐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같은 신입 서기들의 조언도 그저 상식적인 수준에 그칠 뿐이었다.
추울 테니 따뜻한 옷을 준비하라던가, 먼 길이니 여벌의 신을 챙기라던가 하는 것 말이다.
‘옷은 맹에서 준다고 했고, 신발은 마차를 타고 가니 상관없을 것 같은데.’
혹시 몰라 신은 여벌로 챙겼다.
그래도 운현의 짐은 매우 단출했다.
특이한 것이라곤 단 하나.
등짐 옆에 걸려 있는, 거친 베로 둘둘 싼 낙일검뿐이었다.
‘낙일이라…….’
운현은 낙일검에 대해, 정확히는 낙일검에 숨어 있다는 비밀에 대해 곰곰 생각했다.
‘목함엔 아무것도 없었고.’
낙일검이 들어 있던 낡고 오래된 목함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래되고 닳아서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버릴 수는 없어서 숙소 한쪽에 고이 모셔 두고 왔다.
‘정말 대단한 명검, 아니 보검이긴 하던데…….’
자신의 등짐에 매달려 덜렁거리는 낙일검을 운현은 흘깃 바라보았다.
낙일은 그야말로 보검이라 할 만했다.
곧게 뻗은 검신과 날카로운 칼날은, 검에 대해 잘 모르는 운현이라도 그 대단함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처럼 거친 베로 둘둘 말아 등짐 옆에 매달아 놓은 것이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시간이 있다면 좀 더 살펴보았겠지만 낙일검을 받은 지 이틀 만에 북해로 떠나게 되어 여유가 없었다.
‘돌파구라…….’
검성이 말한 ‘돌파구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말을 떠올리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검과 수련이 자신의 위로가 되어 주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큰 근심거리가 되고 말았다.
“후우.”
한숨을 쉬며 운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무림맹 정문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현은 의외의, 아주 익숙한 사람들을 발견했다.
‘어?’
“운 형! 이쪽이오!”
손을 들어 보이는 사람은 바로 운현과 같은 신입 서기 안수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는 하품을 하는 조두식과 밤을 샜는지 눈이 충혈된 편어두까지 서 있었다.
모두가 운현과 함께 무림맹에 들어온 신입 서기들이었다.
“아니, 다들 여긴 어떻게…….”
운현은 놀란 얼굴로 얼른 그들에게 다가갔다.
조두식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운 형이 또 먼 길을 간다길래 배웅 나왔소.”
“배, 배웅이오?”
정말이지 생각도 못한 일에 운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갑자기 북해를 가라니, 너무한 것 아니오?”
안수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사뭇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운현에 대한 염려가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운현은 웃으며 답했다.
“어쩌겠습니까? 하라면 해야지요.”
“꼭 나쁜 것만은 아니오.”
옆에 있던 편어두가 슬쩍 끼어들었다.
“북해 사절단의 부사 직무를 맡았다는 건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아니겠소?”
운현은 북해 사절단의 부사다.
정사(正使)를 보좌하는 직무라지만 서기에게 부사의 직을 맡긴 것은 사뭇 파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쯧, 그래도 그렇지.”
혀를 차는 안수재를 무시하고 편어두가 운현에게 말했다.
“운 형, 내가 알아보니 정사인 제갈기호 공자는 주변에서 평이 나쁘지 않더이다. 성격도 쾌활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하니 수행하기가 그리 까다롭지는 않을 거요.”
편어두는 늘 그렇듯 소문에 밝다.
피곤해 보이는데도 사절에 대해 알아봐 준 것을 생각하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맙소. 다들 피곤할 텐데 괜히 아침부터…….”
운현은 살짝 목이 메었다.
“그깟 야근 정도로 피곤은 무슨. 운 형이나 몸조심하시오. 먼 길에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조두식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충혈된 눈과 연신 나오는 하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운현은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배웅이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고맙소. 조 형, 안 형, 편 형.”
진심을 담아 운현은 예를 표했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들을 어찌 가벼이 대할 수 있으랴?
“우린 이만 가 봐야겠소. 떠나는 것까지 보고 싶지만 우리도 요즘 일에 치여 사는 중이라서. 그럼, 잘 다녀오시오.”
세 사람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곤 무림맹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운현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작은 배려였지만 정말이지 고마웠다.
허전하던 가슴이 따뜻해질 만큼이나 말이다.
‘아차, 이러다 늦을라.’
운현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무림맹 정문을 지났다.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마차 한 대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미 정문 바깥쪽에 모여 있었다.
운현은 황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아, 어서 오십시오. 운 서기님.”
관지부와 변기량이 운현을 알아보고 말했다.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아직 시간 전인걸요.”
관지부의 말에 운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와 있었구려, 독고 제.”
날카로운 눈빛의 독고랑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독고랑은 이번 사절의 호위로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운현이 부사 자격으로 추천한 것이다.
믿을 만한 호위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독고랑이라면 혼자서라도 북해까지 따라오려 할 테니 말이다.
“대협께서 함께해 주시니, 무림맹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손님맞이에 익숙한 관지부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때, 고급스러운 마차 한 대가 무림맹을 향해 다가왔다.
“아, 마침 정사께서도 오셨군요.”
변기량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따각, 따각.
마차는 바로 앞에서 멈췄다.
조금 뚱뚱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마차에서 내렸다.
관지부는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갈 공자님.”
“아, 반갑소. 그런데 그분은 어디…….”
제갈 공자라 불린 청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독고랑과 시선이 마주쳤다.
독고랑은 늘 그렇듯 차가운 시선이었지만 제갈 공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음, 과연.”
커다란 체구의 제갈 공자가 그렇게 나지막이 중얼거릴 때였다.
“제갈 공자님. 이쪽이…….”
관지부가 얼른 말했다.
“부사인 서기 운현입니다.”
독고랑과 눈싸움을 하던 제갈 공자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지금 관지부가 소개한 사람은 비범한 기세의 독고랑이 아니라, 문사 차림의 젊은 운현이었기 때문이다.
“뭐라고요?”
반문하는 제갈기호에겐 아랑곳 않고 관지부가 운현에게 말했다.
“운 서기님, 이분이 정사이신 제갈기호 공자십니다.”
운현은 제갈기호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반갑습니다. 제가 운현입니다.”
제갈기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곧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아, 그. 처, 처음 뵙소이다. 제갈기호라 하오.”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제갈기호는 독고랑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면 저 사람은…….”
“저분은 고독객 독고랑입니다.”
관지부가 답했다.
“이번 사절단의 호위를 맡아 주실 것입니다.”
“고독객!”
제갈기호는 놀란 눈이 되었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관리했다.
“그, 그렇소? 하, 하하. 잘 부탁하오.”
그는 운현과 독고랑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