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64화 (164/530)
  • 164화. 알아야 잘 모실 거 아닙니까?

    ‘으음.’

    운현밖에 못 한다는 신승의 말에 더욱 부담이 커졌다.

    신승은 운현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다시 웃었다.

    생각해 보면 신승은 운현이 곤란해 할 때마다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뭐, 걱정할 것 없다. 무림맹의 정식 사절이니 함부로 목숨을 빼앗지는 않을 게야. 여차하면 낙일검도 있고, 북해제일지도 최악의 상황은 바라지 않을 테니 말이다.”

    ‘북해제일지?’

    운현은 문득 ‘북해제일지’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해졌다.

    북해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전에 들은 바로는 바로 북해 소궁주의 어머니라고 했다.

    “아, 하지만 정조 걱정은 해야 할게다.”

    신승이 말했다.

    운현은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네?”

    정조라니, 지금 그 말이 대체 왜 나온단 말인가?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 정조가 맞는 건가?

    운현이 그렇게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신승이 즐거운 듯 킬킬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같이 가겠다더라. 빙제의 일곱 번째 자식이자 북해제일지의 딸이라던 바로 그 아이가 말이야.”

    설명이 길어서 오히려 헷갈렸다.

    하지만 지금 신승이 말하는 사람은, 바로 북해의 삼궁주가 분명했다.

    “소, 소궁주가요?”

    운현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녀가 연관되어 있을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먼 북해까지 같이 갈 줄은 상상조차 못 하던 일이었다.

    “조심해야 할 거다.”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신승이 말했다.

    “너처럼 책임감 강한 놈들은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거든. 뭐, 그 아이 정도로 예쁘면 운명이다 생각하고 매여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신승은 한쪽 눈까지 찡긋했다.

    “좋은 기회니 잘해 봐. 알았지?”

    조심하라는 건지, 잘해 보라는 건지 헷갈리는 그 말에 운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쓴웃음을 짓는 운현의 귓가로, 신승의 의기양양한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거슬리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

    제갈세가는 강호에서 뛰어난 지략으로 명성이 높다.

    하지만 제갈세가의 무력 또한 결코 경시할 수 없었다.

    무력의 필요성을 절감한 제갈세가 가주들의 뼈를 깎는 노력도 있었지만, 정사대전을 거치고 살아남은 문파들 중에 무력이 약한 곳은 사실상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갈세가의 무림맹 대표자 제갈연 역시 그랬다.

    판관필로 펼치는 제갈연의 무공과 그 뛰어난 통찰력은 무림맹 내에서는 물론, 본가인 제갈세가 내에서도 크게 주목받고 있었다.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집무실에서 수염을 매만지며 서류를 들여다보던 제갈연은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모셔라.”

    “네.”

    사락.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젊은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사형!”

    약간 뚱뚱해 보이는 청년은 환한 표정으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과장된 몸짓으로 두 손을 모으며 예를 올렸다.

    “제갈기호, 대사형께 인사드립니다.”

    제갈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서 오너라. 오랜만이구나.”

    “저도 오랜만에 대사형을 뵈니 아주 기쁩니다. 하하하.”

    제갈기호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둥그런 그의 얼굴이 미소를 짓자 제갈연도 기꺼이 웃음으로 답했다.

    “녀석, 너도 변한 게 없구나. 이리 앉거라.”

    “네, 대사형.”

    제갈기호는 기꺼이 탁자에 앉았다.

    시녀가 정중하게 차를 준비하는 동안 제갈기호는 집무실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이야, 무림맹은 역시 다르군요. 크고 화려한데요?”

    “녀석.”

    제갈연은 피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오는 데 어려움은 없었느냐?”

    “어려움이라니요? 누가 감히 우리 제갈세가를 건드리겠습니까?”

    제갈기호는 힘자랑을 하듯 굵은 팔뚝을 들어올리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리고 저도 누가 건드린다고 가만히 당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제갈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본가는 요즘 어떠냐?”

    “에이, 그거야 저보다 대사형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

    사람 좋고 수더분하게 보이는 제갈기호지만 그 역시 두각을 나타내는 후기지수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역시 결코 어리숙하거나 둔하지 않다는 의미다.

    보이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말이다.

    대사형 제갈연이 자신의 대답을 요구하는 것을 알아차린 제갈기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별로 좋지 않습니다. 산동 쪽 일들이 조금 어그러져서요. 덕분에 이 일을 기획한 누님도 타격을 받았지만……. 뭐, 금방 만회하시겠지요. 워낙 똑똑한 분들이니까요.”

    제갈연은 찻잔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던 제갈기호가 문득 품에 손을 넣었다.

    “아, 그리고.”

    부스럭.

    제갈기호는 얄팍한 서찰 하나를 꺼냈다.

    “가주님의 전언입니다.”

    일반적인 경로가 아닌, 제갈기호를 통해 직접 전하는 가주의 서찰이다.

    그 중요성을 제갈연은 결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연은 짐짓 무심하게 그 서찰을 받아 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제갈기호에게 말했다.

    “북해로 떠나는 게 내일이지?”

    “네.”

    대답하던 제갈기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대사형,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항주까지 와서 기녀 손목도 못 잡아 보고 떠나라니요.”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제갈기호는 말했다.

    “무림맹을 대표하는 사절의 중책을 주신 건 감사하지만 일정이 너무 빡빡합니다. 이거 좀 어떻게 안 됩니까?”

    사뭇 울상이 되어 말하는 제갈기호의 속내를 제갈연은 모르지 않았다.

    제갈연은 피식 웃었다.

    “내게 그런 떠보는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제갈기호의 의도는 분명했다.

    자신에게 진짜로 사절의 권한이 있는지, 있다면 어디까지인지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고 제갈연은 말했다.

    “네가 의심하듯 진짜는 따로 있으니까.”

    제갈기호의 눈빛에 실망이 스쳤다.

    하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어쩐지 저 같은 무명소졸에게 사절이라는 중책을 맡긴다 싶었습니다.”

    머리를 벅벅 긁던 제갈기호가 다시 물었다.

    “누구입니까? 그 진짜가?”

    “누가 동행하는지 들었느냐?”

    “네. 호위와 서기 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국경 부근에서 북해의 소궁주 일행과 합류하기로 되어 있고요. 소궁주가 그리 예쁘다던데 기대가…….”

    “북해 사람들과 합류하기 전에.”

    제갈연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본가를 방문하도록 해라. 어차피 가는 길이니 적당한 핑계를 대면 될 게다.”

    제갈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다.

    문제는 대사형 제갈연이 아직 제갈기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답은 바로 나왔다.

    “다만 반드시 그 서기와 함께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갈기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 서기가 제갈연이 말한 진짜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자신처럼 이름뿐인 사절이 아니라, 북해에 가는 진짜 핵심 인물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그런데…….”

    제갈기호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 서기가 대체 누구죠?”

    제갈연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은 본래 너에겐 허락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듣고 잊도록 해라. 알겠느냐?”

    제갈기호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그는.”

    제갈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짐짓 무심하게, 자신의 동요를 숨기며 말했다.

    “검성의 후계자다.”

    제갈기호는 눈을 껌뻑껌뻑했다.

    그러나 그건 길지 않았다.

    “네에?”

    “그리고 어쩌면.”

    제갈연이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을 이었다.

    “신승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지.”

    후룩.

    맛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찻잔을 내린 제갈연은 제갈기호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당연했다.

    자신이라도 저런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제갈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신승의 후계자라는 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니까.”

    운현이 소림사에 한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은 이미 대표자들 모두 알고 있었다.

    소림사는 연관성을 부인했지만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승은 정말로 맹을 그에게 넘길 작정인가?’

    그런 의혹을 떠올린 사람은 제갈연뿐이 아니리라.

    덕분에 북해에 사절을 보낸다는 이 난데없는 안건은 아무 이의도 없이 통과되었다.

    천하무림대회를 앞둔 이 중대한 시기에 운현을 멀리 보내고 싶어 하는 건 모두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들이 모르는 신승의 심계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해도 말이다.

    “하하, 이거 참.”

    제갈기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검성의 후계자에 신승의 후계자라니. 이건 무슨 얼토당토 않은 신분이랍니까? 아니, 그런 사람이 서기는 또 뭡니까?”

    투덜거리던 제갈기호가 물었다.

    “그래서, 그 대단하신 분의 명호는 어찌됩니까?”

    “명호?”

    생각에 잠겨 있던 제갈연이 반문했다.

    제갈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별호라든가, 존성대명이라도 알아야 잘 모실 거 아닙니까?”

    완연히 비꼬는 그 말에 제갈연은 피식 웃었다.

    “없다.”

    “네?”

    제갈기호가 다시 인상을 썼다.

    하지만 제갈연은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없어. 무림맹 서기 운현. 그게 전부다.”

    이건 또 무슨 농담이냐고 인상을 쓰는 제갈기호를 바라보며 제갈연은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분명 항주 최고였을 차 맛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

    장강수로채 연합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명무실한 곳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뿐인 곳이라 해도 주인은 있기 마련이다.

    적혈마군이라는 거창한 별호를 가진, 수로채 연합의 총채주가 바로 그 주인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커헉.”

    적혈마군은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도를 내려다보았다.

    “씨버럴 개자식이.”

    무심파 채주 이무심이 짐짓 분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히 본좌더러 근본도 없다니? 어디서 감히 그런 망언을 씨부리고 지랄이야?”

    평소 문자를 쓰며 근엄한 척하던 이무심은 노골적인 욕설을 내뱉었다.

    “끄, 끄으윽.”

    적혈마군은 믿을 수가 없었다.

    무심파의 기세가 하도 등등하여 슬쩍 비꼬듯 던진 말이었다.

    이무심이 사실 근본도 없는 건 옳은 말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 한마디에 바로 칼을 빼 들다니?

    그것도 다른 채주들이 즐비한 바로 이 연회장에서 말이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러나 적혈마군이 믿을 수 없는 건 이무심의 미친 짓이 아니었다.

    적혈마군도 강호 무림에서 온갖 일을 겪어 온 노괴다.

    아무리 갑작스럽다 해도 이무심의 칼쯤 막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칼이, 이무심의 칼과 격돌한 순간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이다.

    “어, 어떻게……. 쿨럭.”

    이무심의 칼은 적혈마군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그 칼에 일렁이는 낯선 기운은, 거칠고 탁해 보이긴 해도 분명 검기였다.

    절정고수의 상징이라는 검기가 이무심의 칼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끄으으.”

    적혈마군은 눈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이 넘치던 연회장엔 싸늘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던 예기들은 겁에 질려 한곳에 모여 있었고, 적혈마군의 수하들은 목에 닿은 칼날 앞에서 병기조차 뽑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누런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다른 이들을 제압한 것이다.

    연회장에 둘러앉은 채주들 역시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어떤 채주는 경악하고 어떤 채주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한 가지, 아무도 적혈마군을 위해 나서지 않는 건 똑같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