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
그건 운현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운현은 무제가 두렵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것도, 그 검에 결코 자비를 두지 않을 것도 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이 두려운가?”
“제가 두려운 것은.”
운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본 것에 제 검이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건 지나치게 막연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그 경험을, 그 경지를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운현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검성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가?”
문득 검성이 말했다.
그는 찻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두렵네. 아니, 나뿐만이 아니지. 칼을 든 자는 운명적으로 많은 것을 두려워하게 되네. 아주, 많은 것을.”
검성의 목소리에는 짙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언제나 단 하나뿐이지.”
달칵.
찻잔이 소리를 냈다.
검성은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네는 이미 그것을 찾았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게. 때가 이르면 그것이 자네를 찾아올 테니까.”
그 말은 일견 모순이었다.
그러나 운현은 검성이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마음을 담아 운현은 검성에게 예를 표했다.
검성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자네의 검은 어디있나?”
“아, 그건…….”
새로 산 목검은 숙소에 있다.
하지만 운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승이 불쑥 끼어들었다.
“부서졌어. 산산조각이 나 버려서 새로 구했다더군.”
“부서졌다고?”
검성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신승을 돌아보았다.
“그래. 그리고 새로 구한 것도 또 목검이야. 무슨 목검에 한이 맺혔는지 맨날 부수고 새로 사고, 부수고 새로 사고……. 쯧쯧.”
신승은 혀를 차고는 차를 후루룩 들이켰다.
검성은 운현을 돌아보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 그런 건 아닙니다만 딱히 좋은 검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해서…….”
무림인들은 이름난 명검, 혹은 병장기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아주 작은 차이로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무림의 생리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운현에게 명검은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검.
운현이 목검을 쓰는 것은 그저 애착에 불과하다.
“검은 중요하네.”
담담하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검성이 말했다.
“아주 중요하지. 무인의 병기는 때로 유일한 이해자요 벗이 되기도 하네. 나 역시 한월이 없었더라면.”
검성은 손을 뻗어 자신의 검, 한월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했겠지.”
한월은 검성 이검학의 상징과도 같은 검이다.
수많은 강적들을 상대해 온, 말 그대로 생과 사를 함께 한 검.
그 한월을 바라보는 검성의 눈빛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간혹 어리석은 자들은 병기를 과신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지만 자네라면 그럴 염려가 없을 터.”
검성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운현에게 말했다.
“그러니 한번 기대어 보도록 하게.”
“좋은 검이 필요하냐?”
신승이 불쑥 끼어들었다.
“마침 괜찮은 검이 하나 있는데 어떠냐? 몸매도 잘 빠진 데다가 출생의 비밀까지 있는, 아주 죽여 주는 검이다.”
검신(劍身)이니 몸매가 잘 빠졌다는 비유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만 그 검은 제겐 너무…….”
“가져가 보게.”
검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나는 그 검이 자네와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네. 어쩌면 자네에게 돌파구를 열어 줄지도 모르지.”
만일 신승의 말이었다면 그저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검성 이검학이 그렇게 말하니 감히 경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리고 또 모르는 일이잖느냐? 북해에 가면 그 검이 도움이 될지도.”
신승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운현이 북해에 가는 걸 아예 기정사실처럼 말하고 있었다.
“북해에선 제법 애지중지하는 검이니, 이걸 넘겨주는 대가로 딴 걸 받아 낼 수도 있을 게야. 아니면 깊은 바다 같은 곳에 던져 버리겠다고 협박하든가.”
북해 사람이 들으면 경악할 말을 신승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운현은 신승과 검성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리 말씀하시니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기뻐한 사람은 바로 신승이었다.
“오냐, 진작 그럴 것이지.”
덜컥.
신승이 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낡고 오래된 긴 목함.
운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벌써 신승은 낙일검을 준비해 놓은 것이다.
“자.”
신승이 목함을 운현에게 밀었다.
운현은 천천히 손을 뻗어 목함을 열었다.
달칵.
목함이 열리고 오래된 천으로 둘둘 말아 놓은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운현은 이미 알고 있다.
그 안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한 자루의 아름다운 검을.
바로 북해의 검, 낙일(落日)이다.
낙일검을 쳐다보던 운현은 문득 검성 이검학을 보았다.
그 역시 낙일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짙은 회한이 담겨 있는 시선으로.
“이 검은.”
검성 이검학이 목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주 많은 것들과 바꾼 것일세.”
의미심장한 그 말에 운현은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이 검은 검성 이검학에게 정말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검이다.
과연 운현 자신이 이 검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그래. 그러니까 돈 몇 푼에 넘겨주고 그러지 마라.”
신승이 그 심각한 분위기에 초를 쳤다.
그는 운현을 보며 사뭇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적어도 북해의 소궁주 두셋 정도는 아내로 줘야 내주겠다고 해. 절대 싸구려로 팔아넘기지 말라고. 알았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 검이 북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게 되었다.
이방인에게 북해의 소궁주를 내어 줄 정도라니, 가히 짐작조차 못 할 일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다 곧, 자신의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소궁주를 아내로 받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 그리고.”
검성 이검학이 문득 말했다.
“내가 그 검을 처음 받았을 때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네.”
“이상한 느낌요?”
운현의 반문에 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비록 나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자네라면 그 검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역시나 신승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는 이검학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도 알아내지 못한 걸 이놈이 찾아낸다고? 검을 알아도 자네가 더 잘 알고, 북해를 가 본 적도 자네가 더 많을 텐데 어떻게 이놈이 그걸 찾아내겠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쯧쯧.”
그 말에 운현은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격장지계에 넘어가선 안 되지.’
상대를 자극하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계책을 격장지계라고 한다.
신승이 무엇을 노리는지 운현은 뻔히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도 있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운현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호라.”
신승이 씨익 웃었다.
“이검학이 풀지 못한 걸 네가 풀 수 있다는 뜻이냐? 네가 이검학보다 낫다고?”
“물론 제가 더 나을 리는 없겠습니다만.”
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저도 못 할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조금 전 검성 이검학도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운현이라면 낙일검의 비밀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클클클.”
신승이 웃었다.
“오냐. 그럼 과연 네가 낙일에 숨겨진 비밀을 어찌 풀지 한번 보자꾸나. 만일 네가 이 검의 비밀을 알아내면, 딱 한 가지 네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들어주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말이다.”
“그거 좋군요.”
운현 역시 웃으며 말했다.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약속하지요. 제가 낙일의 비밀을 풀지 못하면 무엇이든 한 가지, 신승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 드리겠습니다.”
“좋다. 그 말, 절대 잊지 않도록 해라.”
“네. 신승께서도 절대 잊지 마십시오.”
“말싸움이 끝났으면.”
검성 이검학이 말했다.
“나는 이제 가겠네.”
슥.
정말 검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현은 당황했지만 신승은 익숙한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천산에 다시 가 보겠다고 했던가?”
신승의 말에 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먼 데를 잘도 가는군. 가면 맛있는 거라도 좀 사 오게. 아니면 참한 처자라도 데리고 오든가.”
검성은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 나이에 말인가?”
“너 말고 나 말이다. 늙으면 사람 온기가 그리워지는 법이라고.”
신승이 투덜거렸지만 검성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운현을 보며 말했다.
“이번에 가면 한동안 만나지 못할 것이다.”
천산은 아주 먼 곳이다.
갔다가 바로 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제 한동안은, 아니 제법 오래 검성을 보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슥.
검성의 커다란 손이 운현의 어깨에 얹혔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다.”
그 묵직한 음성에 담긴 것은 무인의 기개였다.
운현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검성의 기대에 응하겠다고 해 버린 것이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운현은 검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훗.”
검성은 웃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저벅, 저벅.
검성은 곧 와룡헌을 벗어나 사라졌다.
그 뒷모습에서 운현은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운현에게 베푼 호의는 대단히 크다.
천하에 그 누가 검성으로부터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누가 검성으로부터 검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도 적잖은 의미가 담긴 북해의 낙일검을 말이다.
그러므로 운현은 검성 이검학에게 마음 깊이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클클, 저 커다란 놈이 쑥스러워할 줄도 아는군.”
신승은 그렇게 말하며 식어 버린 차를 홀짝 들이켰다.
“어차피 잘된 일 아니냐? 북해가 하루 이틀 걸릴 일도 아니니, 이 기회에 차분히 검이나 붙잡고 궁리해 보려무나.”
‘아.’
운현은 그제야 북해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실 운현이 가겠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이제 와서 안 가겠다고 하는 것도 무리다.
“저기, 제가 북해에 가서 뭘 해야 합니까?”
어쩌면 처음 물었어야 하는 질문을 운현은 그제야 했다.
신승 불영은 언제나처럼 킬킬 웃었다.
“딱히 할 건 없다. 그저 북해분들은 북해에서 잘 먹고 잘 사시라고, 그렇게 안부나 전해 주면 그만이다.”
언뜻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운현은 그 말의 의미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 말씀은.”
운현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북해가 이곳으로 내려오려 한다는 뜻이군요. 그리고 저더러 그것을 막으라고 하시는 거고요.”
“흘. 눈치 한번 빨라서 좋구나.”
운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그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야 모르지.”
신승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못 하면 아무도 못 한다. 그건 확실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신승은 단언했다.
그 이유를 운현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북해가 인정하는 사람은 낙일의 주인이다.
그리고 지금 낙일의 주인은, 적어도 북해가 알기로는 바로 운현 자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