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난세를 바꾸는 힘
“지지 않으셨습니다.”
문득 묵직한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운현과 이서연은 동시에 독고랑을 돌아보았다.
독고랑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대인께서는 지지 않으셨습니다.”
달칵.
찻잔을 들며 독고랑이 무심히 덧붙였다.
“그저 때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후룩.
운현과 이서연은 멍하니 독고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독고랑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차를 음미할 뿐.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독고랑의 말도 옳지만 자신이 부족했었다는 생각만은 바꿀 수가 없었다.
운현은 이서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호암상단도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지?”
“아, 네.”
여전히 놀라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서연이 답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사실 북해 일도 그와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데…….”
상인(上人)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모든 일의 배후라는 말까지 하기는 조심스러웠다.
“암천무제가 북해와 연관이 있다고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운현은 이서연의 섣부른 추측을 경계했다.
하지만 이서연의 머릿속은 즉시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암천무제가, 새외인 북해와?’
남궁세가의 패배 이후 거대 상단들은 암천무제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대륙 물길의 중심인 장강의 패권은, 경우에 따라 상단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천무제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운현이, 그 누구도 모르는 암천무제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천금 같은 가치를 지닌 내용을 말이다.
‘당신은…….’
이서연은 운현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암천무제만큼이나 운현에 대해서도 놀라고 있었다.
‘대체 누구인 거야?’
이서연은 호암상단의 힘과 인맥을 이용하여 운현에 대해 조사했다.
하지만 알아낸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무림맹에서 운현에게 무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운현 같은 고수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문제는 그의 출신과 배경이다.
대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무슨 배분을 갖고 있기에 그 오만한 무림맹 대표자들조차 운현을 존중하는 것일까?
“오라버니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지요?”
빛나는 이서연의 눈동자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운현은 그녀의 눈빛을 보지 못하고 찻잔을 어루만졌다.
“글쎄? 아마도 북해에는 가야 할 것 같은데…….”
이서연은 가만히 운현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니었지만 상관 없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운현의 모습이, 그 반응이 그녀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신경 쓸 일들이 많아서 말이야.”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서연을 보았다.
이서연은 어느새 방긋 웃으며 운현을 보고 있었다.
“그렇군요.”
달칵.
찻잔을 놓으며 이서연이 말했다.
“어느 쪽이든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말씀드렸듯이 전 오라버니 편이니까요. 언제나, 어디서나 말예요.”
그건 조금 부담스러운 말이었지만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서연 누이.”
“먼저 일어나야겠어요.”
문득 이서연이 말했다.
“조금 더 오라버니와 있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 그래.”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연은 무림맹에 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다.
당연히 오래 시간을 낼 수는 없으리라.
달칵.
이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라버니는 좀 더 계세요. 이곳의 차는 제법 괜찮으니까요.”
빙긋 웃으며 말한 이서연은 고독객 독고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만나 봬서 반가웠어요, 고독객 대협.”
독고랑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럼 오라버니, 저는 이만.”
사락.
돌아서는 이서연에게 운현이 얼른 말했다.
“아, 형수님과 아영 누이에게 안부 전해 줘.”
탁.
발을 멈춘 이서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더없이 화사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이에요.”
이서연은 가벼운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사박, 사박.
그녀가 사라지고 운현은 다시 찻잔을 쥐었다.
“후우.”
한숨을 쉬던 운현은 문득 고독객 독고랑이 이서연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가 있소?”
슥.
독고랑이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운현은 피식 웃었다.
고독객이라는 명호와 달리 가끔 보면 독고랑도 참 실없는 때가 많다.
달칵.
운현은 찻잔을 들었다.
조금 식긴 했지만 명품이라 불리는 차는 여전히 좋은 향을 풍겨내고 있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시간, 다루를 나서는 이서연의 입가엔 한점의 미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달칵.
이서연은 대기하고 있던 고급스러운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마차는 곧 항주 시내를 지나기 시작했다.
따가닥, 따가닥.
‘글쎄라고?’
말 발굽 소리를 들으며 이서연은 조금 전 운현의 대답을 떠올렸다.
‘그건 아니지. 내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으면 당신은 그보다 더 나은 대답을 했어야 해.’
혼란의 시기, 소위 난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세력일까, 아니면 누구도 비견할 수 없는 무력일까?
이서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욕망이었다.
그 어떤 일을 감수하고라도 권력을 쥐고자 하는 탐욕스러운 의지.
설령 피로 물든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오로지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인 독선.
바로 그것이 난세를 바꾸는 힘이다.
그런 치열한 권력욕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근본적인 동력이다.
이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운현의 대답은, 그녀에게 있어선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마차 밖으로 흐르는 항주의 번화한 풍경을 바라보며 이서연은 생각했다.
‘여전히 가장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패이기도 하지.’
이미 드러난 패들, 예컨대 십팔대 문파나 무림맹은 큰 이익을 기대하기 힘들다.
세상을 얻으려면 남이 보지 못하는 미래의 가능성에 투자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운현은, 암천무제와 함께 여전히 이서연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패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아무리 시도해도 끈조차 댈 수 없는 암천무제와 달리 운현은 이미 이서연의 손 닿는 곳에 있지 않은가?
따가닥, 따가닥.
마차는 어느새 서호의 호반을 지나고 있었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서호의 풍광을 바라보며 이서연은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좀 더 분발해야 할 거예요, 오라버니.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나 그 뒷말은 마차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 자신에게도.
***
무림맹으로 돌아온 운현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운현의 상사이자 지객당 책임자인 관지부였다.
정문 앞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던 관지부는 운현을 발견하자 한달음에 뛰어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잖아도 바쁜 관지부가 어째서 정문까지 나와 운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물을 필요는 없었다.
관지부는 운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빠, 빨리 와룡헌으로 가 보십시오. 지금 와룡헌에…….”
편히 대해 달라는 운현의 부탁도 잊은 듯 관지부는 새파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검성께서 오셨습니다.”
“네?”
이번엔 운현도 놀랐다.
“검성께서요?”
갑자기 검성이라니?
하지만 동시에 기대가 솟았다.
검성이라면 자신의 이 고민에 답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어서, 어서 어서 가 보십시오.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신단 말입니다아!”
관지부는 애가 타는 듯 말했다.
그럴 만도 했다.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인 검성을 기다리게 하다니, 관지부로서는 상상도 못 할 무례다.
“알았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독객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작별 인사를 한 후, 운현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와룡헌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사뭇 가볍기까지 했다.
며칠 만에 다시 찾은 와룡헌은 늘 그렇듯 변함이 없었다.
무림맹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면서도 전혀 무림맹 같지 않은 곳.
그것이 바로 와룡헌이었다.
저벅.
와룡헌으로 들어선 운현은 곧 검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성 이검학은 신승 불영과 함께 마당의 탁자에서 차를 나누고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슥.
검성 이검학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운현은 그의 눈동자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뻗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음.’
운현은 얼굴을 굳혔다.
검성 이검학이 운현을 향해 기세를 발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콰아아아.
아무런 전조도 경고도 없었다.
엄청난 기세의 폭풍이 운현을 향해 휘몰아쳤다.
‘과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검성 이검학의 기세는 대단하다.
암천무제의 그 파괴적인 기세조차도 검성의 이 압도적인 기운 앞에서는 빛이 바래는 듯하다.
콰과과곽.
자신을 향해 덮쳐드는 엄청난 기세 앞에서 운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파라라락.
운현의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옷자락이 펄럭였다.
하지만 운현은 여전히 그 가운데 서 있었다.
흉포한 기세의 폭풍은 금방이라도 운현을 삼켜 버릴 듯했지만, 그러나 운현은 조용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고요한 바람 가운데 서 있듯 그렇게.
“음.”
검성이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 폭풍 같던 기세가 사라져 버렸다.
훅.
“후우.”
운현은 나지막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운현은 검성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훌륭하군.”
검성이 말했다.
마주 앉아 있던 신승의 눈살이 찌푸러졌지만 검성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아주, 훌륭해.”
검성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눈동자는 은은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서라.”
신승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검성에게 말했다.
“여기서 드잡이질을 했다간 그나마 집 한 칸 있는 거 다 날아간다. 그런 건 나 죽은 다음에 해. 알았냐?”
“음.”
검성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끓어오르던 호승심은 한결 가라앉은 듯했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일세.”
검성이 운현의 인사에 답했다.
“헌데.”
운현을 똑바로 보며 검성이 말을 이었다.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네?”
자신도 모르게 운현은 반문했다.
하지만 검성은 여전히 강렬한 눈빛으로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을 운현은 깨달았다.
“……무제라 하는 자를 만났습니다. 그와 겨루었고, 이기지 못했습니다.”
졌다고 말하지 않은 건 독고랑 때문이었다.
결코 진 것이 아니라고, 독고랑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래서, 그가 두려운가?”
검성이 물었다.
“아니면 그의 검이 두려운가?”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검성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대답했다.
“두렵지 않습니다. 그의 검도, 그도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