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나는 오라버니 편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운 서기님.”
변기량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관지부 역시 당연하다는 듯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운현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지객당을 나왔다.
“이거 참…….”
지객당을 나오며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같은 신입 서기들, 안수재나 편어두, 조두식은 모두 바쁘다.
오죽하면 그 술 좋아하는 조두식이 ‘술 냄새 맡을 겨를도 없다’고 투덜거릴 정도일까.
그러니 만날 사람도 없다.
‘독고랑이라도 만나러 갈까?’
아무리 운현의 종복을 자처한 독고랑이지만 무림맹까지 들어올 수는 없었다.
아니, 사실은 들어오려 했지만 운현이 말렸다.
항주 시내에서 출퇴근할 수 있도록 요청할 테니 잠깐만 기다리라며 말이다.
그때 문득, 변기량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수련을 하시든, 좌선을 하시든, 아니면 푹 쉬시든 간에요.
운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닌 게 아니라 그에겐 지금 큰 고민이 있었다.
바로 심상 수련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련이라…….’
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제와의 비무를 통해 운현은 놀라운 경지를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좌절을 가져다주었다.
그날 이후 운현은 심상 수련을 할 때마다 무제를 맞서야 했다.
그리고 그날 그랬듯이, 마지막 순간 운현의 검은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다.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그 엄청난 상실감을, 심상 수련 때마다 마주쳐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결국 운현은 심상 수련을 중지했다.
이러다간 소위 주화입마는 아니더라도 정말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우.”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이건 무제 때문이 아니다.’
입술을 깨물며 운현은 생각했다.
‘그리고 검 때문도 아니야.’
목검이라서 부서진 것일까?
운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부서졌어도 진작에 부서져야 했다.
목검에 내력을 실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순간 운현은 모든 것을 놓지 않았던가?
내력도, 기세도, 기운도 상관없이 오직 그 흐름에, 생각만으로도 전율이 이는 그 거대한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긴 채로 말이다.
‘결국.’
운현은 자신의 손을 들어 쳐다보았다.
‘내가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이겠지.’
목검은 단지 운현의 마음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검이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면 결국 운현의 마음이 아직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의미다.
‘무언가 부족한데…….’
운현은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게 무얼까?’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일까?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운현은 대체 어떻게 했어야 하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아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운현은 신승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막힌 것 같다’라고.
“후우우.”
운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누가 정답이 이런 거라고 보여 주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태산같이 믿음직한 사람이 담담히 웃으며 올바른 길을 보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헛된 미망을 깨트리며 진정 바라봐야 할 것을 알게 해 주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세상에 정답은 없고 보여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사박, 사박.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젊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운현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사한 비단옷을 입은 매력적인 그 여인은 바로 호암상단의 영애, 이서연이었다.
“운 오라버니!”
운현이 놀라는 사이, 이서연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서, 서연…… 누이.”
무심코 ‘소저’라 부르려던 운현은 그녀가 ‘누이’라 불러 달라며 토라졌던 것을 떠올렸다.
“네, 저예요.”
사박, 사박.
이서연은 날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젊은 아가씨의 화사한 향내가 운현을 훅 감쌌다.
“역시 무림맹에 오니까 오라버니를 만나는군요.”
이서연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봄날의 꽃처럼 밝고 화사했다.
“아니, 여긴 어떻게…….”
여전히 놀란 운현의 반문에 이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요? 그야 배를 타고 왔지요.”
“그게 아니라…….”
이서연이 방긋 웃었다.
“나도 알아요. 무림맹에 일이 있어서 잠깐 들른 거예요.”
‘아하.’
운현은 납득했다.
호암상단은 거대 상단이다.
무림맹과 거래가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아니, 없으면 오히려 그게 더 어색할 것이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길까요?”
이서연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래도 되지요?”
아름다운 이서연의 매력적인 미소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던 참인 데다, 답답한 무림맹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운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
운현과 이서연은 항주의 한 다루에 들어섰다.
일행은 어느새 셋으로 늘어나 있었는데, 무림맹을 나서자마자 독고랑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독고랑은 그저 ‘우연’이라고 말했지만, 그 우연도 그냥 될 리가 없다는 걸 운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아마도 계속 정문 부근에서 머물렀던 것이리라.
이서연에게 양해를 구하고 운현은 독고랑과 동행했다.
그래서 지금 이곳 항주의 다루에는 운현과 이서연, 그리고 독고랑 세 사람이 앉아 있게 되었다.
“오라버니의 의제시라고요?”
이서연이 눈을 빛내며 독고랑에게 물었다.
말 없는 독고랑을 대신해서 운현이 대답했다.
“응. 독고랑이라고 해.”
운현은 편한 말투로 말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서연이 살갑게 대한 덕분인지 금방 자연스러워졌다.
“독고랑이라면, 설마 고독객 독고랑요?”
이서연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독고 제를 알고 있어?”
“그럼요.”
달칵.
이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독고랑에게 예를 표했다.
“고독객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저는 호암상단의 이서연이라고 해요.”
매력적인 그녀의 정중한 예에도 불구하고 독고랑은 무덤덤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인 것이 전부일 뿐, 입조차 열지 않았다.
그러나 이서연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고독객 독고랑이 철정산에서 검기 발현을 한 것은 이미 강호 무림에 파다하다.
아무리 이서연이 호암상단의 영애라 해도 절정고수에게 정중한 예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고수일수록 성격이 괴팍하다는 것을 이서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 고독객 대협께서 오라버니의 의제셨다니…….”
사뭇 놀란 표정으로 이서연이 운현을 돌아보았다.
운현이 조금 쑥쓰러워하는 모습에 이서연은 빙긋 웃고는 다시 독고랑을 향해 말했다.
“부디 오라버니를 잘 부탁드려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엔 사뭇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독고랑은 그 별호가 말해 주듯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 다였다.
인사가 끝난 듯하자 운현이 이서연에게 말했다.
“서연 누이는 그간 잘 지냈어?”
“네. 오라버니.”
이서연이 환한 얼굴로 답했다.
화사한 그녀의 모습은 은은한 차향과 함께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오라버니는 어땠어요? 무림맹 일은 재미있었나요? 아, 어딘가 멀리 다녀오셨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싶었지만 곧 이해했다.
아마도 무림맹에서 들었을 것이다.
운현은, 비록 자신의 의도는 아니지만 무림맹 내에선 제법 유명하니까.
“소림에 다녀왔어.”
“소림요?”
“응.”
운현은 찻잔을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분도 만났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 아주 좋은 시간이었지.”
와불을 떠올리며 운현은 말했다.
모용세가나 조사단에 대한 건,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이서연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오라버니의 표정은 안 좋아 보일까요?”
“아, 그게…….”
사락.
이서연이 운현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 하며 말했다.
“저는 오라버니를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치 속삭이듯 은근한 목소리가 이서연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제게는 다 말씀하셔도 돼요. 저는 언제나 오라버니의 편이니까요.”
반짝이는 이서연의 눈동자는 사뭇 고혹적이기까지 했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젊은 아가씨의 얼굴을 이렇게 빤히 바라보는 것은 선비의 예가 아니다.
덕분에 이서연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지는 건 보지 못했다.
“실은.”
운현은 살짝 한숨을 쉬고 말했다.
“맹에서 북해에 가지 않겠느냐는 말이 있어서…….”
“북해요?”
이서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시기에 북해라니?’
강호 무림이 한창 시끄러운 요즘이다.
운현을 북해에 보내야 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괜찮네요.”
이서연이 웃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새로운 경험을 해 보는 건 좋은 일이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북해에 관한 일이라면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과연 상단의 아가씨다운 발상이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좀 걸리는 것이 있어서.”
“그래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서연은 말했다.
“그럼 가지 마세요. 이 시기에 자리를 비우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손바닥 뒤집듯 의견을 바꾸는 이서연의 말에 운현이 조금 놀랐다.
하지만 이서연은 부드럽게 웃었다.
“말했잖아요. 나는 오라버니 편이라고. 오라버니가 편한 대로 하세요. 그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운현은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런 걸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마음을 써 주니 고마운 것도 사실이다.
“고마워.”
“천만에요.”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인 이서연은 다시 운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 왜, 왜?”
젊은 아가씨의 은근한 시선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운현이 더듬거리듯 말했다.
“어쩐지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아서요.”
이서연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붉은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제가 눈썰미가 제법 좋거든요. 오라버니의 고민은 북해만이 아닌 것 같아요.”
이번엔 운현도 진짜 놀랐다.
그렇게까지 자신의 얼굴에 다 드러나는 건가 싶어서 독고랑을 돌아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독고랑은 이쪽엔 시선도 주지 않고 조용히 차를 음미하는 중이다.
마치 자신은 없다고 생각하라는 듯이.
“그게…….”
찻잔을 매만지며 잠시 망설이던 운현은 결심을 했다.
“암천무제를 만났어.”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이 말했다.
“그리고 내가 졌지.”
그건 이서연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이서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뭐라고요?”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반문까지 이서연은 하고 말았다.
그 정도로 운현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암천무제.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남궁세가를 실제적인 봉문에 이르게 한 사내.
그의 무위를 직접 본 그녀에겐 더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