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것입니다만
지객당을 나온 운현은 가까운 나무 그늘 아래서 서찰을 열었다.
바스락.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고운 필체로 적어 내려간 서찰은 형수님과 일아영의 요즘 생활을 자상하게 전해 주고 있었다.
형수님이 한결 밝은 표정이 되었다는 것과, 일아영이 호암 상단에서 제법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요즘 일이 많아져서 정혼자를 만날 시간이 없다는 푸념도 있었다.
“후후.”
운현은 웃음을 머금었다.
‘잘 지내고 있나 보구나.’
문득 운현은 일충현의 본가가 그리워졌다.
자신이 땀을 흘려 다듬었던 정원도, 일아영의 정혼자인 이 공자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러나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바로 형수님과 일아영이다.
“휴가를 얻으면 꼭 내려가 봐야지.”
바스락.
운현은 천천히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몸조심을 당부하며 꼭 다시 오라는 일아영의 글에선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응?’
운현이 이상한 내용을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남궁세가의 사건 때문에 호암상단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그건 일아영이 자신의 일에 대해 말하던 중에 나온 이야기였다.
남궁세가가 장강의 영향력을 상실한 탓에 호암상단이 그 대책을 마련하느라 바쁘다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동정호로 갈 때 이서연과 함께 있던 이들도 남궁세가였다.
그러나 남궁세가는 암천무제에 의해 봉문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운현은 그 암천무제와 결코 잊을 수 없는 비무를 했다.
바삭.
서찰을 쥔 운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운현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운현은 서찰을 접어 품속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신승 불영의 거처, 와룡헌을 향해서였다.
***
와룡헌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와불의 초막을 떠올리게 하는 그 모습에 운현은 살짝 그리움마저 느꼈다.
“대사님.”
문득 어디선가 꿀밤이 날아올 것 같았다.
와불이 하도 ‘땡중’이라고 해 댄 탓에 대사라는 호칭마저도 어색하기만 하다.
“왔냐?”
새 모이를 주고 있던 불영이 씩 웃었다.
그 모습에 운현은 살짝 한기를 느꼈다.
어쩌면 스승과 제자가 저리도 비슷할까?
언뜻 아주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와불 선사와 신승 불영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흡사했다.
“선사님의 서찰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신승은 운현이 전하는 서찰을 받아 들었다.
바스락.
“잘 계시더냐?”
“……네.”
신승 불영은 무심한 시선으로 서찰을 읽었다.
그러곤 가볍게 코웃음을 흘리고 대충 서찰을 접어 품에 넣었다.
“저…….”
주저하던 운현이 말했다.
“한번 찾아뵙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누구? 스승님 말이냐?”
초막에서 홀로 지내는 와불을 떠올리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사실 날도 오래 남지 않으신 듯하고…….”
신승 불영은 피식 웃었다.
“괜찮다. 그분은 나보다도 더 오래 사실 테니까.”
불영은 스스럼없이 말을 이었다.
“그 성질 고약한 노인네, 아마 나 죽은 다음에도 팔팔하게 살아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을 게다. 클클클.”
무례한 말이었지만 운현은 반박하지 못했다.
와불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할 말이 남았냐?”
잠시 망설이던 운현은 입을 열었다.
“장강의 일 말씀입니다만.”
“장강? 남궁세가 말이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하는 것이 옳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건 많은 사람들과 관련된 일이니까.
“무제의 배후에는 상인(上人)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신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래서 뭐 어쩌냐는 듯한 태도였다.
운현은 애써 힘을 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상인에 대한 단서가, 아무래도 북해에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해라고?”
신승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빙설과 비무를 했던 때 소궁주는 분명히 말했었다.
상인의 정체를 알려면 북해에 와야 할 것이라고.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상인이 바로 암천무제의 배후이자 강호 무림을 혼란케 하는 자다.
“흐음.”
신승 불영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북해라, 이것 참 공교롭구나.”
신승은 문득 운현을 보며 씨익 웃었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신승이건 와불 선사건 저렇게 웃을 때는 운현에게 좋은 일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해에 갈 서기가 한 명 필요하던 참이라서 말이다.”
“네?”
그건 정말이지 난데없는 말이었다.
북해에 서기라니?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조합이란 말인가?
그러나 신승은 이미 운현을 향해 더욱 난감한 이야기를 내뱉고 있었다.
“네가 가라.”
“저요?”
그렇게 물어보면 ‘그래. 너’라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걸 운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난데없이 북해로 가라는 말에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럼 내가 가랴? 이 나이에 이 노구를 이끌고?”
신승은 와락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스승 와불 선사를 빼닮았는지 순간 운현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걱정 마라. 맨입으로 가라곤 안하니까.”
신승은 운현의 반응이 사뭇 즐겁다는 듯 말을 이었다.
“검도 주고 마차도 주고 여비도 넉넉히 준다. 그뿐이냐? 아리따운 북해의 아가씨와 친해질 기회도 주지. 남자는 혼인을 해야 안정도 되고 책임감도 생기는 법이니 이 기회에 장가를 드는 것도 좋지 않겠냐?”
신승 불영은 넉살좋게 말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래서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북해에 가라는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클클클.”
신승은 사뭇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와불 선사와 똑같아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것은 운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이 지긋한 어르신 앞에서 노골적으로 짜증을 표현하는 순간이었다.
“후우.”
운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여쭙겠습니다만.”
운현은 침착하게 신승 불영에게 말했다.
“그건 공식적인 명령입니까?”
무림맹 서기로서 업무를 명령받으면 따라야 한다.
운현은 ‘북해에 가라’는 말이 공식적인 지시냐고 묻는 것이다.
신승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부탁쯤 된다.”
‘쯤’ 되는 건 또 뭔가 생각하며 운현이 물었다.
“그렇다면 북해의 소궁주가 연관이 있습니까?”
사실 그건 물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북해의 일에 소궁주가 연관이 안 될 리가 없는 데다가, 얼마 전 헤어질 때도 또 보게 될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승이 웃었다.
“그래.”
운현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절대 좋은 느낌은 아닌데.’
신승만으로도 버거운데 소궁주까지 얽혀 있다.
운현은 이 일이 결코 순탄하지 않으리란 것을 예감했다.
아니, 확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소림에서 와불 선사와 함께 지낸 탓인지, 이젠 신승 불영이 남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슥.
운현은 슬쩍 와룡헌을 돌아보았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결국은 작고 외진 초막이다.
신승 불영 역시 그렇다.
환우오천존이니, 무림맹의 맹주니 하지만 불영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복마전이나 다름없는 무림맹에서 홀로 강호 무림을 위해 애쓰고 있는 나이 든 승려에 불과한 것이다.
그 모습을 깨닫고 나니 운현의 마음에 측은함이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치 홀로 있는 와불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결국 운현은 신승에게 말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신승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무슨 고민이 있는 게냐?”
“네.”
운현은 순순히 대답했다.
신승처럼 눈치 빠른 사람을 속일 자신도 없고, 이미 남이라 여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여자 문제로 고민할 리는 없고……, 역시 검이겠구나.”
신승은 대번에 핵심을 찔렀다.
‘여자 문제로 고민할 리는 없다’는 말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조금……, 막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신승은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을 지긋이 쳐다보던 신승이 조용히 물었다.
“그가 네게 그리도 큰 벽이었더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신승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운현이 암천무제와 겨룬 것과, 그 결과까지도 말이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운현은 담담히 말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흐음.”
신승 불영은 운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놈.’
운현의 눈동자에 절망이나 낙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깊고 큰 열망이 운현의 눈빛 아래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을 불영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라.”
신승 불영이 말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라. 여심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으니까. 헐헐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심’이 그냥 비유인지 아니면 소궁주의 마음인지 아리송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슥.
운현은 신승 불영에게 예를 표했다.
그대로 와룡헌을 나서려던 운현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것입니다만.”
운현은 거친 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이거, 대환단 같은 건 아니지요?”
묻는 순간 이미 알 수 있었다.
신승 불영이 잇몸까지 환히 드러내며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큭, 크큭, 클클클, 우헐헐헐헐.”
운현의 모습이 우습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 말고도 와불 선사에게 당한 사람이 있다는 게 기쁜 것인지 모르지만 그 웃음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배를 움켜쥐고 웃는 불영의 모습에 운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천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와룡헌을 빠져나왔다.
그때까지 신승 불영의 웃음소리는 운현의 뒤통수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
무림맹은 무척 분주했다.
여섯 달 후에 열릴 천하무림대회 때문이었다.
서기들과 문사들은 모두, 심지어 신입 서기들까지 하루종일 격무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운현은 예외였다.
그것은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이쿠, 왜 이러십니까?”
지객당에 출근한 운현이 서류를 집어 들자 대번에 변기량이 뛰어왔다.
“이건 제게 주십시오. 운 서기님은 중요한 일을 하셔야지요.”
변기량은 운현이 들고 있는 서류를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이게 제 일입니다.”
운현이 말했지만 변기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운 서기님은 천하무림대회를 준비하셔야 합니다.”
눈까지 빛내며 변기량은 말했다.
“그러니 이런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가셔서 수련을 하시든, 좌선을 하시든, 아니면 푹 쉬시든 간에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서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기량은 운현을 고매한 인격자로 안다.
검성의 후계자인데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지위와 권력에 초탈한 진짜 존경할 만한 고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들 바쁘신데 저도…….”
그래도 운현은 서기다.
이렇게 바쁠 때 일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운현뿐인 듯했다.
“크흠.”
옆에서 일을 하고 있던, 지객당의 책임자인 관지부가 짐짓 헛기침을 했다.
말은 안 하지만 그도 운현의 눈치를 꽤나 살핀다.
운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는 돕기는커녕 방해만 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