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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59화 (159/530)

159화. 남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도시에 도착한 운현과 독고랑은 소궁주의 마차에서 내렸다.

십이궁주는 귀엽게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고, 빙설과 빙혼은 냉막한 표정으로 독고랑과 눈싸움을 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운현은 삼궁주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삼궁주는 운현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또 보게 될 거예요.”

“네?”

운현이 되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탁.

문이 닫히고 소궁주의 마차는 멀어져 갔다.

그렇게 운현은 소궁주 일행과 헤어졌다.

***

운현은 무사히 항주에 도착했다.

독고랑을 항주 시내에 일단 머무르게 하고 운현은 무림맹으로 향했다.

그리고 운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운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림맹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신입 서기들은 물론 안수재와 조두식, 편어두까지 온통 일에 매달리는 통에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무슨 일이야 있었다.

무림맹 십팔대 문파 중 하나인 남궁세가가 봉문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무림맹 전체가 바쁠 이유는 없다.

게다가 보아하니 바쁜 사람들은 자신 같은 서기들 뿐이다.

“어쨌든 지금은……”

영호준에게 결과를 알리고 대환단을 전해 주는 것이 우선이다.

운현은 대환단이 든 주머니와 서찰을 소중하게 품고 영호준의 집무실을 향했다.

‘그런데 있으려나?’

매화검 영호준의 집무실은 텅 비어 있는 때가 더 많다.

오죽하면 주루를 찾아보는 게 더 빠를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오늘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 같아서, 운현은 헛걸음이 될 거라는 염려를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오, 운 서기!”

영호준이 먼저 운현을 발견했다.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성큼 성큼 걸어왔다.

“영호준 대협.”

운현이 예를 표했지만 영호준은 가볍게 웃었다.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소. 갔던 일은 잘 끝났소?”

운현은 슬쩍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영호준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네. 대환단은 무사히…….”

하지만 운현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헉, 왜 이러오? 기분 나쁘게. 나도 모르게 검을 뽑을 뻔했지 않소?”

영호준이 와락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는 몸을 뒤로 빼고 소름 끼친다는 듯 뺨을 문질렀다.

게다가 그의 다른 한 손은 정말로 검 손잡이에 가 있었다.

당황한 사람은 운현이다.

“아니, 그게…….”

“그리고 대환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운현은 화들짝 놀랐다.

대환단이라는 말을 이렇게 크게, 공공연히 해도 되는 것일까?

운현은 애써 목소리를 낮추며 급히 말했다.

“아니, 저보고 가져오라고 하신 대환단 말입니다.”

“내가?”

영호준이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적 없는데? 내가 언제 운 서기더러 대환단을 가져오라 했소?”

“네?”

운현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영호준의 표정은 절대 장난이 아니다.

부스럭.

운현은 품속에서 거친 천으로 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와불이 그에게 준, 지금껏 조심스럽게 간직해 온 대환단이다.

“아니, 이걸 와불 선사께서 제게…….”

“어디 봅시다.”

영호준은 천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러곤 그 자리에서 즉시 끈을 풀었다.

데굴.

큼직한 환약 같은 것이 영호준의 손바닥으로 굴러나왔다.

영호준은 조심스레 냄새를 맡았다.

“흠.”

잠시 환약을 살피던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나쁜 거 아닌 것 같소만 대환단은 아니오. 당설련 소저에게 물어보면 더 정확하겠지만 권하고 싶지는 않소.”

영호준은 큼직한 환약과 천 주머니를 무심히 운현에게 돌려주었다.

턱.

운현은 얼른 대환단과 천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보다 서찰은 받았소?”

“아.”

운현은 대환단 주머니와 함께 받았던 서찰에 생각이 닿았다.

“여기…….”

운현이 품에서 서찰을 꺼내려 하자 영호준이 제지한다.

“아, 됐소. 그 서찰이 내 손을 거쳤다가는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르니까. 미안하지만 운 서기께서 직접 신승께 건네주시오.”

“아, 예.”

그렇지 않아도 와불이 신승 불영에게 전하라 한 것이다.

불영이 먼저 보는 것이 마땅하리라.

“저기 그런데 이 대환단은…….”

“수고하셨소.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영호준은 운현의 말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곤 가벼운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집무실 쪽이 아닌 것으로 보아 또 항주의 주루에 가는 듯했다.

하지만 운현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게 대환단이 아니라고?’

운현은 멍하니 손에 들린 환약과 천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와불 선사가 대환단이라며 건네줬는데 아니라니?

심지어 영호준은 대환단을 받아 오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아니, 분명 그런 말은 없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영호준이 그런 말을 하진 않았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무엇엔가 홀린 듯했다.

‘신승께 여쭤 봐야겠군.’

대환단을 알아보는 것은 당설련보다 신승 불영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운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환약을 다시 작은 천 주머니에 넣었다.

바삭.

‘어?’

천 주머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운현은 안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작은 쪽지 하나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럽던 운현은 쪽지를 꺼냈다.

바스락.

두 번 접힌 쪽지에는 날아갈듯한 서체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자세히 쳐다보던 운현은 드디어 그 문장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 평생의 심득을 전해 주마. 명심해라. 남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느니라.]

‘억!’

순간 운현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대환단이라는 말을 꺼낸 사람은 오직 와불뿐이었다는 사실을.

‘이, 이런.’

운현의 표정은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귓가에 와불의 킬킬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빙혼.”

소궁주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자 빙혼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네. 소궁주님.”

“빙혼은 설영대와 함께 이곳에 남도록 하세요.”

빙혼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들었다.

그러나 소궁주는 창밖을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곳의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설영대가 전부 철수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문왕의 뜻대로 되는 거예요.”

“그러면 소궁주께서는…….”

“빙궁에 다녀와야겠어요.”

소궁주가 조용히 말했다.

“어린 동생이 천 리를 마다않고 찾아왔으니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살짝 입술을 깨물고 나서 소궁주가 말했다.

“그것이 바로 북해제일지(北海第一智)의 뜻일 테니까요.”

십이궁주가 이 먼 곳까지 찾아올 결심을 스스로 했을리는 없다.

그녀를 부추긴 사람이 누구인지 삼궁주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허나 그리되면 빙설은 더 이상 소궁주님의 힘이 되지 못합니다.”

빙혼이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빙설은 북해십이비의 한 사람이다.

북해빙궁으로 돌아가면 그녀는 더 이상 소궁주의 휘하에 속하지 않게 된다.

북해십이비는 오직 북해를 위한 힘이니까.

“저와 설영대가 없다면…….”

“괜찮아요.”

소궁주는 가볍게 웃었다.

“호위를 한 사람 데리고 갈 거예요. 우리 편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믿을 수 있는 존재지요.”

순간 빙혼의 뇌리에 운현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소궁주의 뜻임을 빙혼은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붉은 입술에 번져 가는 미소는, 운현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항상 떠오르던 바로 그 모습이었으니까.

“설영대의 임무는 막중해요.”

어느새 미소를 지운 소궁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십이궁주가 습격받은 건 우연이 아니에요. 문왕은 이미 녹림에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최대한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하세요. 아,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소궁주가 물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대로 설영대 몇 명을 먼저 북해로 보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소궁주님.”

빙혼은 즉시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이제 북해의 운명은.”

소궁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 손에 달렸군요.”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십이궁주가 가져온 소식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야말로 북해의 근본을, 그리고 미래를 뒤흔들 만한 일대 사건.

으득.

소궁주는 이를 악물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붉은 입술이 무참히 일그러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

운현은 먼저 지객당으로 갔다.

신승 불영에게 서찰을 전하기 전에 본래 소속인 지객당에 자신이 돌아온 것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객당은 난리였다.

관지부와 변기량은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현은 그제야 ‘천하무림대회’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천하무림대회요? 무림맹에서요?”

“네. 그것 때문에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

운현을 존경하는 변기량은 죽을 듯한 표정으로 하소연을 했다.

“참가하겠다는 문파들의 신청은 쏟아져 들어오지요, 서찰은 서찰대로 미어 터지지요. 문서부 사람들은 지금 열흘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다고 합니다.”

무림맹이 천하무림대회를 연다는 소식은 엄청난 반향을 몰고왔다.

각 성에서 내로라하는 큰 문파들은 물론이고 군소 문파들과 무관들, 알려지지 않던 기인들에 심지어 새외 문파들까지 서찰을 보내는 판국이었다.

그러니 무림맹이 난리가 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오죽하면 날짜까지 바꿨습니다. 한 달 뒤에 열겠다고 했다가 항의가 엄청나서요.”

먼 곳에 있는 문파라면 항주까지의 여정만 해도 한 달이 넘게 걸린다.

결국 무림맹은 여섯 달 뒤로 날짜를 바꿨고, 각 문파별로 참가 인원에도 제한을 두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간 항주가 무인들로 미어터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림맹의 높으신 분들도 몰랐던 것이지요. 무림맹의 영향력이 이토록 대단할 줄은 말입니다.”

이런 엄청난 호응은 무림맹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문사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무림맹의 무인들은 오히려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운 서기님 앞으로 서찰이 와 있습니다.”

“서찰요?”

“네. 그게…….”

따로 빼 두었던 듯, 변기량은 금방 서찰 하나를 찾아 운현에게 주었다.

“글씨가 아주 예쁘던데요.”

변기량이 씨익 웃었다.

운현은 서찰을 받아 들었다.

‘서찰이라고? 누가…….’

운현은 서찰을 살펴보았다.

겉에는 변기량의 말처럼 예쁜 글씨로 자신의 이름이 써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일아영’이라는 세 글자가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의형 일충현의 딸, 일아영이 악양에서 서찰을 보낸 것이다.

“읽어 보세요.”

변기량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닙니다. 일하시는데…….”

운현은 서찰을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승께 드릴 서찰이 있으니 전해 드리고 바로 오겠습니다.”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보며 운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쉴 때는 아닌 것 같으니까요.”

지객당은 무림맹의 손님을 맞는 부서다.

다시 말하면 천하무림대회의 일 대부분이 지객당의 업무라는 뜻이 된다.

산처럼 일이 쌓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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