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눈꽃 같은 그녀
히히힝.
“워, 워어!”
말 울음소리와 함께 당황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함께 가던 다른 마차들 역시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독고랑이 즉시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어 상황을 파악했다.
“사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착 가라앉은 독고랑의 말에 운현도 창밖을 살피며 물었다.
“사고요?”
“네.”
독고랑이 나지막이 말했다.
“도적 떼들입니다.”
‘또?’
운현은 한숨을 내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자신도 모르게 소궁주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소궁주 일행과 함께 있을 때도 늘 도적 떼들이 몰려들더니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재현된 것이다.
“왜요? 왜 날 봐요?”
십이궁주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묻는다.
“아뇨.”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연주를 끝까지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요.”
“괜찮아요. 또 해 줄게요.”
소궁주가 씩씩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우선 내리지 말고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렇게 말한 운현은 마차 밖을 살폈다.
마부들에겐 이미 익숙한 일인 듯 누군가 도적들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저벅.
“나는 마차의 호위를 맡은 청류관의 사범이오.”
무복을 입은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은 어느 산채의 호걸들이시오?”
그의 말투는 정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청류관의 무사는 자신까지 모두 일곱인 반면, 도적들의 수는 언뜻 보아도 오십이 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도적들 중 두목으로 보이는 텁석부리 장한은 눈을 찡그릴 뿐 사범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확인해 봐라.”
“네!”
대여섯 명의 도적들이 즉시 고개를 숙이더니 마차들에 다가갔다.
“이, 이보시오! 원하는 게 무언지…….”
사범이 다급히 말했지만 도적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방해하면.”
두목과 도적들이 눈을 흉흉하게 빛냈다.
“죽이겠다.”
그 기세는 사뭇 심각했다.
여느 도적 떼와는 확연히 다른 그 모습에 사범은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전부 뒤져라!”
오십여 도적들이 살기를 번득이는 가운데 몇몇 도적들이 마차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 명이 조심스레 문을 잡고 다른 네 도적이 칼을 꼬나 들었다.
벌컥.
“사, 살려 주시오!”
마차 안에 있던 사람이 겁에 질려 소리쳤다.
흠칫 뒤로 물러섰던 도적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이 썅. 깜짝 놀라서 그냥 쑤실 뻔했잖아!”
투덜거리던 도적은 마차 안을 살펴보고는 두목에게 소리쳤다.
“첫 번째는 아닙니다!”
“다음!”
다섯 도적들은 두 번째 마차로 몰려갔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한번에 몰려다녔는데, 누가 보아도 반격을 대비하는 모양새였다.
세 번째 마차에 있던 운현의 안색이 굳었다.
‘설마 대환단을?’
저들은 분명히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
그렇다면 대환단만큼 그에 어울리는 것도 없을 것이다.
‘큰일이로군.’
어쩌면 운현이 대환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새어 나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다지 당황스럽거나 초조하지는 않았다.
슥.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독고랑이 의연한 표정으로 도적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라면 도적 떼 정도야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같이 있는 십이궁주와 다른 승객들이다.
도적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으니, 자칫 희생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일단 몸을 피하는 게 나으려나?’
어느 쪽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인지 운현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저 사람들 뭐예요? 도적이에요?”
십이궁주가 머리를 쏙 내밀며 말했다.
생기발랄한 그녀의 목소리는 침묵이 내려앉은 주변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도적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운현과 독고랑, 그리고 십이궁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찾았습니다!”
도적 중 한 명이 크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오십여 도적들의 눈빛이 흉흉하게 변했다.
운현은 아차 싶었다.
앞선 도적들 다섯이 즉시 운현이 탄 마차를 향해 다가왔다.
“꼼짝마라, 이년!”
“이년?”
소궁주의 눈빛 역시 날카롭게 변했다.
“당신, 나한테 나쁜 말 했지요?”
탁.
소궁주는 서슴없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비파 위에 하얀 손을 얹었다.
후웅.
‘엇!’
순간 운현은 깜짝 놀라 소궁주를 쳐다보았다.
비파를 든 소궁주의 가조각 끝에 범상찮은 기세가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차앙.
운현은 보았다.
날카로운 충격파가 소궁주의 비파에서 쏘아져 나가는 것을.
놀란 운현의 눈에 분노한 소궁주의 동그란 얼굴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퍼엉.
“으아악!”
세 명의 도적이 단번에 고꾸라지며 뒤로 날아갔다.
소궁주는 거침없이 비파를 탄주했다.
창, 차창.
비파 소리가 울려 퍼지고 다시 충격파가 쏘아져 나갔다.
펑, 펑.
“크아악!”
남아 있던 두 도적도 날아갔다.
보고 있던 도적 한 명이 외쳤다.
“두목님!”
“나도 알아!”
두목은 성질을 부리며 외쳤다.
“겁내지 말고 몰아붙여라! 저년의 사술(邪術)은 사람이 많으면 못 쓴다!”
멀쩡한 음공(音功)을 사술이라 몰아붙였지만 두목의 말은 정확했다.
소궁주의 음공은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한 번에 아홉 이상은 무리였다.
오십에 가까운 도적들이 일제히 몰려들자 소궁주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마차에는 소궁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독고랑.”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네. 대인.”
슥.
이미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독고랑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엄청난 살기를 사방으로 내뿜었다.
후우욱.
“헉!”
도적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냥 봐도 범상찮은 독고랑이 기세를 내뿜자 마치 사신 같은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두, 두목님!”
“나도 안다고 했잖아!”
두목이 벌컥 짜증을 냈다.
그 역시 독고랑의 기세를 보고 있었다.
‘젠장!’
건장한 텁석부리 두목은 속으로 욕을 했다.
‘아무도 없을 거라더니 악귀 같은 놈이 버티고 있잖아!’
이래선 이야기가 다르다.
으득.
두목은 갈등했다.
숫자를 믿고 이대로 강행할 것인가, 아니면 ‘그분’의 분노를 감당할 것인가?
하지만 분노는 나중 일이고 독고랑의 칼은 바로 눈앞에 있다.
‘젠장, 젠장.’
두목은 선택했다.
어차피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모두…….”
퇴각한다고 외치려던 때였다.
후우욱.
찬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한 줄기 섬뜩한 기운이 두목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소궁주 옆에 있던 문사 차림의 청년이 무어라고 외치는 모습이 보였다.
‘어?’
이상한 것은 그 광경이 옆으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두목 자신이 옆으로 쓰러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곧 새까만 어둠이 그의 시야를 뒤덮어 버렸다.
두목은 그제야 그 문사 청년이 ‘안 돼’라고 소리친 것을 깨달았지만 그의 의식은 이미 사라져 가고 있었다.
쿵.
목이 잘린 거구의 두목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으, 으아악!”
도적들은 혼비백산했다.
사람을 죽여 본 그들이라도 눈앞에서 목이 잘리는 모습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운현은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멈추시오! 빙혼!”
운현은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빙혼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쉬익.
빙혼의 검이 도적들을 향해 날았다.
하지만 그 검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카앙.
독고랑의 검이 빙혼의 검을 막아섰다.
빙혼의 날카로운 눈빛이 독고랑의 무덤덤한 시선과 맞부딪히는 사이, 운현이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그만두십시오, 소궁주님!”
바스락.
운현이 소리친 그곳, 아무도 없는 듯하던 수풀 사이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한 송이 눈꽃처럼 수려한 자태를 지닌 그녀는 바로 북해의 소궁주였다.
“아!”
비파를 들고 있던 십이궁주는 삼궁주를 향해 날아갔다.
삼궁주는 얼른 팔을 벌려 십이궁주를 안았다.
팍.
“언니!”
십이궁주는 삼궁주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별로 키 차이도 나지 않았지만 십이궁주를 품에 안은 삼궁주의 표정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보고 싶었어, 언니!”
“오랜만이구나.”
십이궁주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삼궁주가 말했다.
비록 북해의 언어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운현이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럽고 온화했다.
“어떻게 여길 혼자서 올 생각을 했니?”
꾸중하듯 삼궁주가 말했다.
하지만 십이궁주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꼭 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사이, 도적들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 으아악.”
그 모습에 빙혼의 눈살이 일그러졌지만 독고랑이 비켜 주지 않았다.
“됐어요. 물러나세요.”
삼궁주가 빙혼에게 명했다.
슥.
빙혼은 그제야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독고랑 역시 담담한 표정으로 검을 갈무리했다.
삼궁주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하아.”
삼궁주의 붉은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당신은…….”
“언니, 언니! 큰일났어.”
하지만 삼궁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품에 안겨 있던 십이궁주가 고개를 들고 울먹이며 말했기 때문이다.
“아바마마가, 아바마마가…….”
십이궁주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삼궁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
도적들이 도망치고 나자 마부와 호위무사 들은 얼른 사태를 수습했다.
이런 피비린내 진동하는 곳을 어서 떠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다만 마차 행렬 중 한 대만은 텅 빈 채로 출발해야 했다.
타고 있던 운현과 독고랑, 그리고 십이궁주가 다른 마차로 갈아탔기 때문이다.
‘이 마차도 오랜만이네.’
운현은 소궁주의 마차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따각, 따각.
소궁주의 마차는 그때나 다름없이 크고 화려했다.
다만 지금은 어쩐지 좁은 느낌마저 들었다.
본래 타고 있던 소궁주와 빙설, 그리고 운현 외에 십이궁주와 독고랑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십이궁주는 마치 아이처럼 삼궁주 옆에 꼭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도적 떼들을 향해 서슴없이 손을 쓰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슥슥.
삼궁주는 십이궁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십이궁주는 만족스러운 듯 눈까지 감고 삼궁주의 팔에 기댄다.
그 모습이 아직 어린아이 같아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북해의 소궁주를 구해 주신 것에.”
문득 들려온 삼궁주의 음성에 운현은 눈을 들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가 똑바로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저야말로 좋은 연주를 들었습니다.”
소궁주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이 아이가 연주를 해 드렸나요?”
“아,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궁주는 자신의 품에 기댄 십이궁주를 내려다보았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십이궁주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학사님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요.”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렸다.
십이궁주가 사람을 가린다는 느낌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야 경계를 했지만, 낯선 땅에서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닌가?
소궁주는 운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치 숨어 있는 무엇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고 또한 집요했다.
“……저기, 소궁주님?”
그렇지 않아도 대환단을 숨기고 있던 운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무슨 용건이라도…….”
제 발 저린 운현의 말에 소궁주는 눈을 깜빡였다.
아름다운 그녀의 속눈썹이 살짝 흔들린다.
“……아니.”
소궁주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용과는 너무 다른 그 목소리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대화가 길어지면 곤란한 사람은 운현이다.
다름 아닌 소림의 대환단을 가지고 가는 중이니까 말이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소궁주의 시선이 뺨에 느껴졌지만 운현은 애써 외면하며 창밖을 보았다.
따각, 따각.
운현이 그렇게 어색한 시간을 견디는 동안, 여섯 대의 마차는 다음 목적지였던 도시에 성큼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