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안 중요합니다
다음 날,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등봉현을 떠났다.
난향 다루의 주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와불을 위한 용정차 값을 맡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항주의 무림맹까지 운현은 가능한 대도시와 관도 중심으로, 최대한 안전하게 이동하기로 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다름 아닌 대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현은 안휘성 합비에 도착해서야 남궁세가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네? 남궁세가가요?”
운현이 놀라자 늙은 노인은 혀를 찼다.
“쯧쯧, 이 사람 어디서 뭘 했길래 이런 소식도 아직 모르고 있었나?”
고작 수채에 남궁세가가 패했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가주 뇌검 남궁진천이 죽었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다름 아닌 암천무제라니!
“그럼 지금 남궁세가는…….”
“말도 말게. 완전히 초상집이야. 그 뭐라더라……, 봉분이라 했던가?”
“봉문(封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상 봉문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 진짜로 한 건 아니라지만.”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독한 술을 들이켰다.
“천하에 거칠 것 없던 남궁세가 가주님이 그리 가실 줄 누가 알았겠나? 나만 해도 젊을 적에는 종종 세가의 일을 하곤 했었지. 무릎에 부상만 입지 않았어도…….”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느새 신세타령으로 변한 노인의 말에 운현은 얼른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감사의 뜻으로 약주 한 병을 주문하는 것을 잊지 않고, 운현은 독고랑과 객잔을 나섰다.
저벅, 저벅.
독고랑과 함께 역참으로 걸음을 옮기는 운현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가 남궁세가의 가주를 죽였다니.’
암천무제가 대단한 무위를 가지고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남궁세가의 가주를 죽였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지금 무제의 이름은 강호 무림을 온통 진동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째서 소림사에 나타났던 것일까?
‘남궁세가 다음에 소림사를 노린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수하 한 명만 대동하고 온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는 생각을, 운현은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제의 압도적인 무위를 떠올리며 운현의 표정이 한층 굳어 가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아녜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운현의 상념을 깨뜨렸다.
운현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저는 반드시 돈을 냈어요.”
막 소녀티를 벗은 듯한 귀여운 아가씨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국적인 하얀색 비단 옷에 등에 맨 비파가 유난히 눈에 띄는 아가씨였다.
‘외지에서 온 악사인가?’
운현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비파라, 꽤 오랜만인걸.’
비파는 연주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제대로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은 더 드물다.
“어허, 이 아가씨 정말 말이 안 통하네.”
마부는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이봐요. 아가씨가 누구한테 돈을 줬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받지 않았다니까? 그런데 내가 왜 아가씨를 태워 줘야 하냐고?”
하얀 옷을 입은 귀여운 아가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부의 말을 곰곰 생각하던 그녀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항주에 가니까요.”
“엥?”
엉뚱한 대답에 마부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러나 아가씨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항주에 가요. 그러니까 이 마차를 타야 해요.”
마부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안 돼! 못 태워! 타고 싶으면 돈을 내든가!”
답답한 것은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막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실례합니다.”
운현이 끼어들었다.
“누구시오?”
마부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운현을 보았다.
운현은 가볍게 예를 표했다.
“저는 무림맹 서기로 있는 운현이라 합니다.”
“무, 무림맹?”
마부의 표정이 변했다.
보통 사람들에게 무림맹이라면 하늘 위의 존재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운현이 문사의 복장을 하고 있어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런데요?”
마부가 묻고 귀여운 아가씨도 운현을 쳐다보았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괜찮다면 제가 도와 드려도 될까요?”
왜 갑자기 운현이 끼어드는지 마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림맹 사람이 하겠다는데 거절할 담력 같은 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뒤에 서 있는 독고랑의 기세도 사뭇 무시무시하고 말이다.
“그, 그러시오.”
마부가 승낙하자 운현은 귀여운 아가씨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북해에서 오셨습니까?”
운현의 말에 귀여운 아가씨의 표정이 일순 환해졌다.
하지만 곧 그 커다란 눈동자에 경계의 빛이 떠오른다.
“그걸 왜 알아요?”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본 적 있는 복식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그녀는 북해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이곳의 언어나 관습에 익숙하지 않아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키는 것도 똑같다.
소궁주 일행을 떠올리게 하는 그 모습에 운현이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보다 혹시 누구에게 돈을 줬는지 기억합니까?”
“물론 알아요.”
귀여운 아가씨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기억 좋거든요.”
그다지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
따닥, 따닥.
단조로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는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항주로 가는 마차는 모두 다섯 대나 되었다.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그중 한 마차에 타고 있었다.
“저기, 고마워요.”
북해의 아가씨가 주저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별일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일의 전말은 간단했다.
복잡한 역참에서 그녀는 다른 곳으로 가는 마차의 마부에게 돈을 낸 것이다.
그러고는 항주로 가는 마차를 타려 했으니 말썽이 난 것도 당연했다.
마침 사라진 손님을 찾던 마부에게서 돈을 돌려받는 것으로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그야말로 별것 아닌 오해였다.
“우웅, 하지만 도움을 받으면 값을 줘야 해요.”
‘값?’
어색한 그녀의 어법에 운현이 쓴웃음을 짓는데 문득 아가씨가 은자를 내밀었다.
“받으세요.”
그건 차칫 모욕으로 느껴질 만한 행동이었다.
사람의 순수한 친절에 값을 매기다니 말이다.
하지만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소궁주 일행 역시 그랬었지.’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돈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네?”
아가씨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안 주면 모욕하는 건데요?”
“이곳은 조금 다릅니다. 순수한 호의는 진솔한 감사로 답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래요?”
조금 미심쩍은 듯 했지만 그녀는 일단 은자를 거뒀다.
그러곤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기도 순수한 호의는 없던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저기, 그런데요. 아저씨도 항주로 간다고 했지요?”
아가씨가 다시 물었다.
아저씨라는 말이 매우 거슬렸지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아저씨는 아닙니다.”
아가씨는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아저씨도 오라버니예요?”
다른 남자처럼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는 것이냐는 뜻이었지만 운현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닙니다. 제 이름은 운현이라 합니다.”
아가씨는 움찔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여기선 이름 말해도 되는 거였지? 깜짝 놀랐네.”
그건 북해의 언어였다.
그녀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운현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항주 무림맹에 북해 소궁주가 찾아온 적이 있나요?”
재잘거리듯 낭랑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무림맹 용봉지회에 참석할 거라고, 언니가 그랬거든요.”
“언니요?”
이번에는 운현이 놀랐다.
“소궁주님이 아가씨의 언니란 말입니까? 빙설, 빙혼과 함께 있던 그분요?”
“아하!”
아가씨는 손뼉을 쳤다.
“맞아요. 언니를 만났군요!”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물었다.
“언니는 지금 어디 있어요? 나, 언니 만나러 멀리 왔어요.”
북해는 머나먼 땅이다.
멀리 왔다는 그녀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아니, 그 먼길을 왜 이런 아가씨 혼자…….’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그녀의 물음에 답을 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소궁주께서 지금 어디 계신지는 모릅니다.”
“그래요?”
아가씨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러다 문득 무엇이 생각난 듯 그녀가 다시 물었다.
“무림맹 서기라고 했죠? 서기는 중요한 사람인가요?”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일을 하는 직분입니다만, 일반적으로 크게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북해의 젊은 아가씨에게 그 말은 너무 복잡했다.
찌푸린 그녀의 표정에 운현이 얼른 다시 말했다.
“안 중요합니다.”
말해 놓고도 씁쓸한 이야기다.
하지만 아가씨는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힘들겠네요. 중요한 사람이면 설영대가 붙어 있을 텐데.”
중얼거리듯 말한 그녀의 말은 운현은 이해하지 못했다.
일단 ‘설영대’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저기 그런데 아가씨는…….”
“아가씨가 아니라 소궁주예요.”
“네?”
“나도 소궁주라고요.”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의 봉긋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북해빙궁의 십이궁주가 바로 나예요. 언니는 삼궁주고요.”
마치 은혜라도 베풀듯 아가씨가 운현에게 말했다.
“그냥 소궁주라고 불러도 좋아요.”
운현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북해에 웬 소궁주가 그리 많은가 하는 생각과, 다 소궁주면 헷갈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귀여운 소궁주는 사뭇 의기양양한 표정이라 그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어쩐지 귀여운 작은 동물 같다는 생각을 하며 운현은 웃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소궁주님은 어째서 혼자 오신 건가요?”
소궁주, 그러니까 삼궁주에게는 빙설과 빙혼이라는 호위가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작고 귀여운 소궁주는 이 먼 곳까지 혼자 온 것일까?
“그건 말 못 해요.”
소궁주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씩씩하게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요. 나에겐 이……. 아, 미안해요 이름은 있지만 줄 수는 없어요. 이 비파가 있으니까요.”
조금 난해한 말이었지만 운현은 이해했다.
‘비파에 이름이 있지만 알려줄 수 없다는 뜻이구나.’
운현의 관심은 그녀가 안고 있는 비파를 향했다.
가까이서 보니 고색창연한 것이 한눈에도 비범함을 알 수 있었다.
흔히 쓰이는 당비파와 달리 줄 수나 모양도 조금 다르다.
“나, 제법 잘해요. 빙궁에선 두 번째지만.”
“제일 잘하는 사람은 누군데요?”
무심코 물어본 운현은 순간 아차 싶었다.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궁주는 오히려 환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우리 언니죠. 우리 언니 비파는 세상에서 최고예요!”
‘소궁주가?’
그건 운현에게 사뭇 의외의 말이었다.
“하지만 소궁주께서 비파를 타시는 건 한 번도 못봤는데요?”
“그럴 거예요.”
십이 주는 비파를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비파가 바로 언니 거였거든요. 이곳으로 떠나면서 제게 주고 갔어요.”
눈을 빛내며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난 반드시 언니를 만나야 해요.”
그녀의 눈빛에는 단호한 결의가 엿보였다.
운현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감사하며 한 곡 들려 드릴까요?”
소궁주가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어법은 서툴렀지만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반드시 하고 싶다는 의지를 넘치도록 전해 주고 있었다.
어차피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지라 운현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입니다.”
정중한 그 말에 소궁주는 미소를 지었다.
“으흠.”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비파를 안고 자세를 잡았다.
품에 한 손을 넣었다 빼자 은빛 가조각 셋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빛난다.
띠링.
청명한 음색이 마차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띠리링, 띠링.
비파의 음률은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이미 장담했듯 그녀의 솜씨도 뛰어났다.
단지 음률이 고울 뿐만 아니라, 그녀의 비파에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다른 마차의 사람들마저 비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덜컹.
돌연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