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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56화 (156/530)
  • 156화. 비파를 든 아가씨

    새소리 가득한 깊은 산 길을 두 사람의 남녀가 걸어가고 있었다.

    앞서 걷는 사내는 허리에 검을 차고 사뭇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이국적인 흰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은 불안한 눈빛으로 연신 사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막 소녀티를 벗은 듯 어린 모습에다 갸름한 얼굴과 동그란 눈은 그 귀여운 매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요?”

    젊은 아가씨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딘가 어색한 발음은 그녀가 이곳 사람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아가씨.”

    젊은 사내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기가 지름길이라니까? 이 오라버니가 옆에 있으니 염려 놓으라고.”

    그러나 귀여운 아가씨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으슥한 산길로 접어든 지 벌써 한참이 되었다.

    지름길이라 해서 들어섰지만 인적 없는 길이 계속되니 불안을 느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길은 언제 마쳐요? 너무 안정되지 않아요.”

    “너무 안정되지 않아? 하하하.”

    서툰 발음과 이상한 용법에 사내가 웃었다.

    아가씨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 아닌가? 불안이었나?”

    고개를 갸웃하는 아가씨의 모습은 대단히 귀여웠다.

    젊은 사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귀여운 누이가 북해에서 비파만 익히느라 다른 건 배울 기회가 좀 없었나 보지? 그럴 땐 불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사내의 말대로 아가씨의 등에는 비파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새하얀 천에 싸여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보기에도 분명한 비파였다.

    그 비파는 갓 소녀티를 벗어난 듯 앳된 아가씨의 예쁜 얼굴과 대조되어 무척이나 도드라져 보이고 있었다.

    사내는 지긋이 아가씨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오라버니에게 좀 더 가까이 오는 거고 말이야.”

    말뿐이 아니라 사내는 손을 뻗어 아가씨의 손목을 잡으려 들었다.

    그러나 젊은 아가씨는 사내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탁.

    “날 웃기게 보지 말아요!”

    아가씨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곳에 와서 뭘 하려는 거죠? 이 운적!”

    “운적?”

    젊은 사내의 얼굴이 다시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아!”

    아가씨가 또다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자신의 연이은 실수가 창피한지 얼굴까지 살짝 붉어졌다.

    “우, 움적이던가?”

    “하하하하하.”

    결국 사내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래, 운적이지. 지금부터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맛보게 해 줄 참이니 그 말도 맞아. 하하하.”

    “운우지락?”

    하얀 옷을 입은 아가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곧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 나쁜 사람! 항주로 간다는 말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죠!”

    “아, 거짓말은 아니야. 물론 항주로 가야지. 단지…….”

    그는 은근슬쩍 다가서더니 손을 그녀의 뒤로 돌려 어깨에 슬며시 얹었다.

    “이 오라버니랑 즐기다가……. 악!”

    사내가 손을 움켜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타서 하얀 옷을 입은 그 아가씨는 얼른 몸을 빼냈다.

    “광고했죠! 날 우습게 보지 말라고.”

    아마도 경고라고 하려 했던 것일 테지만 지금 사내에겐 비웃어 줄 여유가 없었다.

    그가 움켜쥔 손등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정말 이년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당신이 언제 나한테 ‘오냐’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방금 나쁜 말 했어요!”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사내를 가리키며 항의했다.

    그 손가락 끝에서 은빛 금속이 반짝였다.

    귀부인들이 장신구로나 쓰는 가짜 손톱이었다.

    보통은 아주 길고 화려하게 만들어 자신의 부귀를 뽐내는 데 사용하지만, 이 아가씨의 손에 있는 것은 조금 짧으면서도 아주 날카로웠다.

    아마도 비파를 연주할 때 사용하는 가조각(假爪角)인 듯 보였다.

    “이년이!”

    “또!”

    사내가 성큼 다가서자 그녀는 부드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끝이 사내의 얼굴을 대각선으로 지나갔다.

    “아악!”

    이번에 사내가 감싸 쥔 것은 그의 코였다.

    어느새 코끝이 날카롭게 베여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이게…….”

    사내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점잖게 끝내려 했더니 안 되겠구나.”

    차앙.

    “내 성질을 건드린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새하얀 장검이 그의 손에서 번뜩였다.

    하지만 아가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어요?”

    사락.

    아가씨의 손엔 어느새 비파가 들려 있었다.

    “나는 이미 후회하고 있어요. 당신 같은 사람을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커다란 눈물방울인 양 매끄러운 곡선을 가진 비파는 그녀의 손에 아담하게 자리 잡았다.

    사내의 눈에 경계의 빛이 번득였다.

    악기에 검이나 암기를 숨기는 것은 강호 무림에서 흔한 일이다.

    사내는 긴장하며 그녀를 살폈다.

    따라랑.

    그러나 곧 비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사내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대체 뭐하자는……. 윽.”

    비웃던 사내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한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뭐, 뭐야?”

    “흥.”

    비파를 켜는 귀여운 아가씨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당신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띠링, 띠리링, 땅.

    그녀의 비파는 평범한 악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귀여운 아가씨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하얀 손이 비파 위를 내달릴 때마다 내력이 담긴 소리가 사내에게 충격을 주고 있었다.

    “이, 이년! 그만두지 못해!”

    이대로 연주를 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판단한 사내는 급히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쿠당탕.

    하지만 사내는 그만 첫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나뒹굴고 말았다.

    어이없게도 발을 헛디딘 것이다.

    “억.”

    사내는 땅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비파 소리는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띠리링, 띠링

    “이, 이게 정말…….”

    사내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순간, 더 이상 비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응?’

    사내는 혼란에 빠졌다.

    비파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아가씨의 하얀 손은 여전히 현 위를 내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라락.

    손이 현 위를 지나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처음 보는 그 광경에 사내는 눈을 찌푸렸다.

    그사이, 아가씨의 하얀 손은 연주를 멈추고 살포시 현 위에 내려앉았다.

    “이제.”

    아가씨는 고개를 들어 사내를 보았다.

    “당신은 끝났어요.”

    하지만 사내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저 아가씨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다.

    사내는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어쨌거나 아무래도 좋다.

    “네년이 대체 무슨…….”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온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힘을 주었지만 전혀 느낌이 오지 않았다.

    ‘어?’

    사내는 손을 들어 입을 만져 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엉뚱하게도 전혀 다른 곳을 향해 번쩍 들어 올려졌다.

    ‘어어?’

    사내의 얼굴에 절망과 혼란이 동시에 떠올랐다.

    마치 술에 취한 듯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말했죠. 이제 끝났다고.”

    그녀는 들고 있던 비파를 내렸다.

    이젠 그녀의 목소리조차 그에겐 들리지 않으리란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의 귀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어요. 그리고 당신의 귀가 쓸모없어지면.”

    사내는 거의 정신이 나가 있었다.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고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엄청난 격통이 사내에게 엄습했다.

    끼이이잉.

    ‘끄아아아악.’

    머리가 깨지는 듯한 굉음에 사내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수 없었다.

    그런 사내를 보며 아가씨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많은 것이 고장나 버리고 말아요.”

    사내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서 세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것을, 그 충격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감당해 내야 했다.

    “끄어억.”

    낮은 신음과 함께 피거품을 흘리며 사내는 쓰러졌다.

    털썩.

    쓰러진 사내의 팔다리가 경련했다.

    하지만 아가씨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하아.”

    젊은 아가씨는 한숨을 쉬며 비파를 내렸다.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여긴 북해가 아니니까.”

    그건 낯선 언어였다.

    혐오스러운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던 그녀는 흰 천으로 비파를 조심스레 감싸고는 다시 등에 맸다.

    사박.

    아가씨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결국 되돌아가야 하네.’

    이 길이 정말 지름길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위험을 무릅쓰느니 되돌아가는 것이 낫다.

    ‘왔던 길로 가기만 하면 되겠지.’

    익숙지 않은 숲길이지만 아가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너무 안일했다는 걸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숲길은, 그녀가 살던 초원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

    운현은 등봉현 난향 다루의 한 방에서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침상 곁에 서 있는 독고랑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일어나 앉은 운현에게 독고랑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습니다.”

    운현은 빙긋 웃으며 독고랑에게 말했다.

    “며칠이나 됐지요?”

    “사흘입니다.”

    쓰러진 지 사흘이나 되었다니 어이가 없었다.

    운현은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흘……, 어쩐지 더 좋아진 것도 같군요.”

    그건 거짓이 아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온몸에 내력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의형 일충현이 전해 준 내력인데, 마치 본래 자신의 것인 듯 느껴진다.

    아마도 이것이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인 듯했다.

    ‘하지만 딱히 한 건 없는데.’

    구태여 찾자면 무제와 비무하던 그 마지막 순간뿐이다.

    ‘음.’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그때의 감정과 희열이 전율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잠시 감정을 추스른 운현은 독고랑에게 물었다.

    “독고 제는 괜찮습니까?”

    독고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침상 옆에 놓인 대환단 주머니와 서찰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소림에서 무어라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선사님이나.”

    무승들이 달려오던 기억이 떠올라 운현이 말했다.

    “대인을 소림에 모시겠다고 했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선사님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소림에 신세를 지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자칫 대환단 문제를 걸고 넘어질지도 모르니까.

    다만 와불 선사에게서 아무런 말도 없었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아마 그것이 와불 나름의 인연을 정리하는 방법이리라.

    “그렇군요.”

    운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하루만 더 쉬고 떠나도록 하지요.”

    “아직 불편하십니까?”

    독고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나보다는 독고 제가 쉬어야 할것 같아서요.”

    자신이 쓰러진 사흘간 독고랑이 한잠도 자지 않았으리란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는…….”

    “내일 출발합니다.”

    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쉬세요. 알았지요?”

    독고랑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곧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 독고랑이 멀쩡하고 대환단이 무사히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쁘게 기다리겠소.

    무제의 묵직한 그 말.

    그건 결코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다.

    ‘이대로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목검은 부서져 버렸다.

    그건 목검이 약해서가 아니다.

    목검에는 단 한 줌의 내력조차 실리지 않았으니까.

    결국 자신이 그 경지에 제대로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비록 무제는 승부를 결정짓지 못한 것이라 말했지만 운현에게는 아니었다.

    자신은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패배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 무제가 검을 비틀지 않았다면 이렇게 살아 있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 모습을 독고랑이 착잡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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