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길 위의 비무
“소궁주님.”
빙혼이 한쪽 무릎을 꿇어 소궁주에게 예를 표했다.
서찰들을 살펴보고 있던 그녀는 눈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죠?”
“소림을 감시하던 설영대가 백 장 밖으로 물러났습니다.”
바스락.
작은 소리와 함께 소궁주의 시선이 빙혼을 향했다.
“어째서요?”
“비련이 나타났습니다.”
“비련이?”
소궁주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비련은 암천무제의 분신과도 같은 여인이다.
“어째서 그녀가 소림에…….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 생각하던 소궁주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경고군요.”
빙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영대의 은신술이 북해 제일이기는 하지만 비련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즉, 비련은 일부러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다.
설영대주는 그 의미를 즉시 깨닫고 설영대를 백 장 밖으로 물러나게 한 것이고 말이다.
“어찌할까요?”
“목표는?”
“설영대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아직 소림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음.”
소궁주의 아름다운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곧, 작은 한숨이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결국 무제가 오는군요.”
비련이 경고를 했다는 건 방해하지 말고 물러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럴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녀의 주군, 암천무제가 오는 것이다.
“지금 무제가 소림을 건드릴 이유는 없으니 아마도 목적은 ‘그’겠지요?”
“네.”
빙혼의 대답에 소궁주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소궁주는 빙혼을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영대는 소림에서 백 장을 더 물러납니다. 어느 쪽이든 절대 접촉이 있어서는 안 돼요. 다만 목표의 움직임은 언제든 확인할 수 있도록 길목과 등봉현에 감시를 집중하도록 하세요.”
빙혼은 고개를 숙여 소궁주의 명령을 받들었다.
“아, 그리고…….”
막 일어서려던 빙혼은 움직임을 멈췄다.
소궁주가 이렇게 말을 덧붙이는 경우는 이례적인 일이다.
“사람이 필요해요. 설영대 중에 잠입술이 뛰어난 이들로 몇 명 준비시켜 주세요.”
“잠입술이라면…….”
“빙궁의 움직임이 마음에 걸립니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북해빙궁은 그들의 본거지다.
본국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데 잠입술이 뛰어난 설영대가 필요하다는 것은 사안의 심각성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바스락.
소궁주는 내려놓았던 서찰을 들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긴급 행동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지만.”
빙혼의 안색이 변했다.
“문왕이 이번에는.”
살짝 짜증을 섞으며 소궁주는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귀찮은 짓을 벌이는 것 같군요.”
소궁주의 말은 끝났다.
빙혼이 예를 표하고 물러났지만, 소궁주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서찰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운현은 와불이 전해 준 대환단 주머니와 서찰을 품속에 넣고 소림을 나섰다.
소림을 나서기 전에 계율원 원주 전각을 만나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여 대환단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을까, 예컨대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 돌려 달라거나 아니면 다른 추가 조건을 붙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계율원 원주는 그저 형식적인 인사만으로 운현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운현이 소림사 경내를 벗어난 때는 아직도 아침 햇살이 가득한 이른 시간이었다.
“후우.”
등봉현으로 내려가는 운현의 감회는 남달랐다.
막중한 임무를 완수하고 내려가는 길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용정차를 사 대느라 오르락내리락 할 때는 생각도 못하던 일이다.
‘시간도 그렇고, 돈도 참 많이 들었어.’
매화검 영호준에게 ‘소림사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까마득한 예전 같은 느낌이다.
어쩌면 그건 와불과 지내는 초막의 날들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득 가슴이 허전해지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운현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난향 다루에도 이야기를 해 둬야겠군요. 제가 없는 동안에도 선사께 용정차를 가져다 드리도록 말입니다.”
독고랑을 향한 말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신뢰를 뜻한다는 것을 알기에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어디 보자, 경비를 빼면 남는 돈이…….’
난향 다루에 용정차를 주문하려면 돈을 맡겨야 한다.
운현은 무림맹까지 가는 경비를 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나머지는 전부 다루에 줄 작정이었다.
운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등봉현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였다.
사아악.
운현은 문득 바람이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독고랑의 안색이 확 변했다.
‘응?’
슥.
운현이 의아한 표정을 하는 것과 동시에 독고랑이 검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운현은 즉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바람이……, 아니다.’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형의 압박.
뒤로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게 만드는 이 어마어마한 기세를 운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예전 무림맹에서 검성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운현과 독고랑은 그대로 멈춰 선 채 길 저편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사람이 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자신도 모르게 운현은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두 배는 족히 될 듯한 거대한 체구, 온몸을 두른 검은색의 무복,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는 엄청난 기세.
웅.
운현의 마음에 검 한 자루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다가오던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건.”
묵직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아직 거리가 있음에도 그 목소리는 운현과 독고랑의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
“참으로 기대 이상이로군.”
그 목소리에는 완연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
목말라 죽어 가던 이가 물을 찾은 것처럼, 운현을 발견한 그의 눈빛은 완연한 생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당신은.”
운현이 물었다.
“누구시오?”
그 순간에도 독고랑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가 뿜어내는 기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도 등 뒤에서 날카로운 칼날처럼 독고랑을 위협하고 있는 또 하나의 기척이 분명히 경고하고 있었다.
이 순간을 방해하는 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말이다.
“후후.”
사내가 웃었다.
그는 마치 오랜 친우에게 말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두운 하늘 아래 서 있는 자, 암천무제요.”
그것은 참으로 광오한 명호였다.
스스로 무제라 칭하다니, 평소의 운현이라면 눈살을 찌푸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 명호가 정말이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내의 기세는 엄청났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운현 자신도 ‘검주’를 자처하지 않았던가?
“검성의 후계자, 아니 검성과 인연이 있는 자를 만나게 되어 반갑소.”
“나는.”
운현이 목소리를 뱉은 것은 반쯤 충동적인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오해에는 이미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 서기 운현이오.”
“서기?”
젊고 건장한 무제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운현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렇소? 서기라, 하아, 아하하하!”
무제는 크게 웃었다.
하지만 운현에겐 그 웃음소리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우습소?”
“하하하. 아, 미안하오.”
무제는 가볍게 손을 들며 사과했다.
평소의 그로서는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무제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기라니, 쉽지 않은 일인데 참으로 대단하다 싶어서 말이오.”
그건 조롱이 아니었다.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인 신승마저도 와룡헌에 칩거하는 것이 저항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검성의 후계자가 스스로를 서기라고, 그것도 그토록 당당하게 밝히니 무제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무제의 귓가에는 얼마 전 남궁세가의 가주가 한 말이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이토록 강한 그대도 자유롭지 못하다니, 웃긴 일이지 않나?
그러므로 무제의 웃음은 운현에 대한 감탄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기도 했다.
잠시 씁쓸한 웃음을 삼킨 후 무제가 말을 이었다.
“그대를 찾은 것은 조금 변덕이었지만 참으로 잘한 선택인 것 같소.”
후우우욱.
엄청난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운현은 즉시 자신의 목검을 빼어 들었다.
그 순간, 무제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주군!”
독고랑이 외치며 그의 검을 뽑았다.
자신의 등 뒤를 위협하는 날카로운 살기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현의 목검은 그보다 더 빨랐다.
아니, 정확히는 운현의 마음이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목검은 그저 그 마음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었다.
콰앙.
폭음이 터져 나오고 폭풍처럼 대기가 흔들렸다.
운현의 목검과 무제의 커다란 검이 그 날을 맞대고 있었다.
우우우웅.
그리고 두 사람의 검에는 이미 완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독고 제.”
운현이 무제를 응시한 채 말했다.
“나는 걱정 말고 피하십시오.”
“비련.”
무제도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시선 역시 운현을 똑바로 향한 채였다.
“방해하지 마라.”
무제를 막으려던 독고랑의 검과, 독고랑의 등 뒤를 향하던 비련의 소검이 아주 천천히 물러났다.
슥.
독고랑은 무제를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거리를 벌렸다.
홀연히 나타났던 비련도 어느새 그 가냘픈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운현도, 그리고 무제도 그런 걸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아니, 서로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단 한 순간 한눈파는 것조차 참지 못하는 도도한 미인처럼, 두 사람은 오직 서로만 바라볼 것을 강제하고 있었다.
“기쁘오.”
무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참을 수 없는 희열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대를 만난 것은 분명 운명일 테니.”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 역시 넘쳐나는 생동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마음속에 완연히 떠올라 있는,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그의 검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무제와 같은 적수를 만났다는 것에 말이다.
“이제.”
무제가 말했다.
그리고 운현은 그가 무엇을 이야기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지. 피차, 진솔하게.”
“기꺼이.”
어쩌면 운현의 말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그의 목검이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웅.
“그리하겠소.”
갑작스러운 시작이었지만 운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도 이미 가슴이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그리고 운현의 검도.